페이지 터너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자각입니다. 불신자는 아무리 성공하고 번영하여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실패하고 심지어 죽음이 닥쳐올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신다는 믿음을 갖습니다. 풍성한 생명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존 웨슬리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묘비에 기록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얼굴로 나를 비추고, 그 얼굴을 나를 향해 드신다는 믿음을 소유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나를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혹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연주회에서 피아노 독주자의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는 연주자가 아닙니다. 그는 무대 위에 서 있으나 없는 존재와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그를 주목해 보지 않습니다. 그는 무대복을 화려하게 입지도 않고, 따로 조명을 받지도 않습니다. 다만 연주자의 연주 속도에 맞춰 조용히 악보를 넘겨주어야 합니다.
우리 집 큰 아들이 독일에서 김나지움 다닐 때 일입니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기에 학교에 들어가서 자연스레 오케스트라에 참여하였습니다. 엄한 노인 선생님에게 찔끔거리며 배운 바이올린 솜씨가 도움이 된 모양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학교개교기념일에 콘서트가 열린다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학교 구경도 할 겸 일찌감치 방문하였고, 강당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독일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여러 선생님들이 함께 참여하였고, 합창단 뒤편에는 나이가 지긋한 털북숭이 선생님들이 멋진 단복을 입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든, 합창단이든 학생과 교사의 경계가 없는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무대 중앙에는 큰 피아노가 놓였는데, 그라프 엥엘베어트 김나지움 출신의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가 협연을 한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개교기념을 자축할만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음을 조율하면서 곧 시작될 연주회 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 속에 우리 아이가 눈에 뜨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빼곡하게 선 합창단을 향해 눈을 씻고 찾아봤지만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아우는 형의 행방을 몹시 궁금해 하며 이리저리 찾았습니다. 곧 연주회가 시작할 텐데 도대체 우리 아이는 어딜 간 것일까요? 객석에 앉아 있는 부모의 속이 탔습니다.
드디어 연주회의 막이 올랐고, 맨 처음 순서로 그 유명하다는 피아노 연주자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곁에는 키 작은 페이지 터너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피아노 옆으로 가서 선 페이지 터너는 바로 민규였습니다. 우리 부모는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습니다. “한규야, 형아다!” 물론 페이지 터너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페이지 터너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다만 피아노 연주자의 악보를 조심조심 넘겨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있으나 없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습니다. 참 눈부신 가슴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누구든 자기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등장하는 인생의 무대에서 나는 항상 연주자이고, 주인공입니다. 누가 뭐래도 당당히 내가 주역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 홀로 연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내가 의식하지 않게 속도에 맞춰 악보를 넘겨주고, 연주를 잘하도록 기다려 주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조를 맞춰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는 행여 내 연주가 조금 더디더라도 결코 나보다 먼저 페이지를 넘기지 않습니다. 악보 한 페이지, 음표 한 자리, 내 숨과 호흡 사이에서 언제나 동행하고, 나를 리드해 줍니다.
내 인생의 연주무대에서 나와 동행하는 페이지 터너는 누구입니까? 내 인생의 광야 길에서, 때로는 내 침묵의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심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페이지 터너가 되시는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믿습니까?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사 43:1-2).
첫댓글 목사님
이글을 읽고 한동안 깊은공감과 감동이 있었습니다.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도 좋으시지만 감동도 있고 메세지도 있어서
저같은 무미건조한 가슴을 출렁거리게했습니다.매회 칼럼을 읽으면서 따뜻한 목사님을 자주느낍니다.힘드실텐데 잘부탁드립니다.
권사님이 무미건조하시다뇨? 참 촉촉하신 분이죠. '민감, 정감, 공감'하는 능력을 배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