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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학 강좌방 스크랩 [인물] 영원한 선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
鶴邨/김용찬 추천 0 조회 73 08.04.17 16:3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영원한 선비 사계 김장생

논  산  문  화  원

          목  차

Ⅰ. 서 언

Ⅱ. 김장생의 가계와 생애

1. 김장생 시대의 조선사회
2. 김장생의 가계(家系)와 향리(鄕里) 연산
  1) 출생과 본관에 대하여
  2) 향리 연산과 선조에 대하여
3. 김장생의 생애
  1) 어린 시절의 시련과 뛰어난 자질
  2) 산림학자로 드러나다
  3) 불혹의 나이를 넘어
    (1) 국란 극복을 위해
    (2) 당론에 초연한 모습으로
    (3) 일상에서
  4) 넓은 인품, 큰 학문
    (1) 넉넉하고 따뜻한 인품
    (2) 현실을 외면 않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노학자

Ⅲ. 김장생의 학문

1. 조선중기의 학문적 배경
2. 김장생의 학문적 연원(淵源).
  1) 가학(家學)
    (1)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2) 신영(申瑛)
  2) 김장생의 스승들
    (1)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2) 율곡(栗谷) 이이(李珥)
    (3) 그 밖의 인물
  
3. 김장생 학문의 전개
   1) 예학
    (1) 󰡔�상례비요(喪禮備要)󰡕�
    (2) 󰡔�가례집람(家禮輯覽)󰡕�
      (3) 󰡔�의례문해(疑禮問解)󰡕�
    (4) 󰡔�전례문답(典禮問答)󰡕�
   2) 경학
    (1) 󰡔�경서변의(經書辨疑)󰡕�
    (2) 󰡔�소학(小學)󰡕� 존중 태도
    (3) 학문의 태도와 특징

Ⅳ. 김장생의 사상

1. 김장생의 사상형성의 배경

2. 바른 학문의 길
  1) 학문의 중요성과 공부하는 과정
  2) 성리학과 의리학
  3) 인간의 본성과 예학사상
  4) 정성과 공경을 중요시하다
  5) 예학 정신과 인생의 태도

3. 바른 사회를 만드는 길
  1) 조선시대 이전의 한국 예절문화
  2)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전래와 한국 예학의 발전
  3) 가족질서의 회복과 사회사상
  4) 가정의례를 정리하다.

4. 어진 정치를 이루는 길
  1) 예를 통한 어진 정치
  2) 가통(家統)을 중요하게 여기다
  3) 국통(國統)을 바로 세우다

5. 김장생 선생의 학문과 사상의 의의

Ⅴ. 김장생의 문학

  1. 머리말
  2. 시(詩)는 성정(性情)에 근본(根本)한다
  3. 양성당(養性堂)을 매개로 한 문학 교유
  4. 사계의 생활시
  5. 맺음말

Ⅰ. 序言

우리는 현실의 시공간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현실 혹은 현재라는 것은 과거라는 시간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서 보면 미래이고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인 것이니 시간의 영원한 순환구조를 생각해 보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시간의 연속성 중에서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속에 펼쳐졌던 수많은 삶의 모습들을 역사라고 한다. 역사는 단순한 사건이나 인물의 행위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역사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서 인간들의 참으로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져 있으며 동시에 그 다양한 모습들은 일정한 구조로 축약되어 우리에게 지표를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역사를 탐구하고 고대의 인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미증유의 혼란기를 몸소 살아온 인물로서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를 둘러싼 시대상황이 결코 쉽지 않았던 격변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장생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학문과 정신을 지탱해왔다. 선생은 천생의 학자였다. 그는 세상사람들이 즐겨하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 하였으며 평생토록 자신의 세계를 연마하고 도덕적 완성을 추구했던 전형적인 선비였다.

서양의 중세에는 기사도가 있고 일본에는 무사도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선비도가 있다. 선비는 전통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집단을 규정하는 개념이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선비는 전통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핵이었다. 그들은 정치 일선에 진출하여 유학적 정치사상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했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물러나면 진정한 자신의 완성을 위해 철저히 노력했던 집단이었다.

간혹 지나치게 아집에 빠지고 폐쇄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선비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선비도의 근본 정신보다는 선비라는 개념의 피상적인 행동에 얽매였던 인물들이었으므로 선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선비는 정신적으로는 우주와 대자연의 존재 이법을 알고자 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아의 존재를 알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치열한 학문적 연찬과 각고의 노력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위로는 군주를 도와 가장 완벽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아래로는 무지한 백성들을 돌보고 다스려 그들로 하여금 혜택을 주고자 고심했던 사람들이 바로 선비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김장생은 한국 선비의 전형적 모델이며 한국 학자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로부터 사사 받은 유학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켜 조선조 중기의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자칫하면 나라 전체의 선비들이 지리하고 공허한 성리학(性理學)적 논변에 빠질 수도 있었던 때에 선생이 유학의 본질적인 문제로 학문의 조류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조선조의 유학사(儒學史)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전환점에 김장생은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학문의 역사를 새롭게 쓰도록 한 위대한 학자였다.

예라고 하는 것은 천지자연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해와 달과 별이 빛을 내며 바람이 불고 강물이 흐르는 것도 예의 현상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한 대자연의 형성 원리를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 속에 재현한 것이 예의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단지 가례(家禮)를 지키고 윗사람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예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되면 예의 본질은 지극히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만이 예의 참다운 모습이 아니므로 이제 예의 원형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재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생활 방식이 새롭게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삶을 지속하는 이상 결코 바뀌거나 누락시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가 바로 그것의 대표적인 실례이다. 더군다나 현대는 기계문명이 앞서고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풍요가 인간의 지향점이 되고 있는 실정이므로 자칫 예가 사라질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예의 탐구와 실천에 열성적이었던 우리의 선조들을 재조명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온전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인물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한가지 관점만으로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김장생의 경우처럼 위대한 인물들은 다각도로 조명하여 그것을 총체적으로 종합해야만 진실한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본 저서에서는 김장생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그의 가계와 생애, 학문, 사상, 문학 등으로 나누어서 접근해 보기로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원만하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집필을 의뢰하였다.

Ⅱ. 김장생(金長生)의 가계(家系)와 생애(生涯)

1. 김장생 시대의 조선 사회

김장생(1548~1631)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학설의 계승자로서 학문과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치, 사회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장생을 좀더 깊이 알기 위해 그가 태어난 시대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김장생이 살았던 16․17세기는 대체로 사화와 붕당(朋黨)간 다툼으로 조선의 지배체제가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다. 즉 정치적으로는 폭군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낸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謀反事件),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으로 인한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이괄(李适)의 난 등이 일어나, 사회가 매우 어수선하던 시기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두 차례에 걸친 왜란과, 호란으로 큰 위기를 맞았다.

경제적으로도 16세기 이후 토지가 일부 계층에게 집중되고, 가혹한 수취체제의 모순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 상업의 발달로 계층간의 분화가 심해지면서 농촌사회가 동요하고, 전국 각지에서는 도적무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중앙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정변을 계획한 사람도 있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은 일부 양심적인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이 음탕(淫蕩)과 사치로 빠진 폭군 연산군을 군대를 동원해 추방하고 그의 이복 동생을 추대한 사건이다. 이후 중종 전반기에는 조광조(趙光祖)가 등용되면서, 왕과 진보적인 사림(士林)이 어느 정도 선정을 베풀어 사회가 안정되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화(士禍)로 사림이 쫓겨나고 훈구대신(勳舊大臣)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급진적 성향을 가진 사림(士林) 중에는 민중세력과 손잡고 정부 전복을 시도하는 이도 있었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쫓겨난 젊은 관료 김식(金湜)은 거창 지방의 농민층과 연결하여 무장폭동을 꾀하다가 실패하였고, 1559년(명종14) 임꺽정이라는 양주 출신의 백정은 몰락한 사림, 아전, 노비, 평민 등을 규합하여 황해도 구월산에 본거지를 두고 서울과 서북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 통로를 장악하고 부정한 사람들과 대항해 싸웠다. 이들은 단순한 도적이라기 보다는 의협(義俠)으로 백성들에게 인식되어 3년간이나 버티다가 관군에게 토벌되었다. 임꺽정의 행동은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1589년(선조22)에는 전라도와 황해도 지방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反亂)을 꾀하려 했던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謀反事件)이 일어났다. 이는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16세기말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큰 사건이었다. 전주 출신의 정여립은 원래 이이(李珥)의 제자로서 명망 높은 학자이기도 했으나, 당시 정치에 불만을 품고 승려, 천민, 평민을 끌어들여 새 왕조를 세워보려는 혁명을 꿈꾸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사상계는 정치․사회의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일부 학자들이 정치에의 참여를 자제하고 성리학의 기본정신에 충실하려는 관념철학의 경향이 나타났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중심이 되어 활발한 철학논쟁을 전개한 것도 이와 같은 경향을 반영한다. 이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보다 더 심화되어 예학(禮學)으로 발전하였다.

양란을 겪고 난  조선사회는 기존 성리학이념으로는 더 이상 사회문제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무너지는 사회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예학에 대한 관심이 집중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김장생이 조선중기 ‘예학의 대가’로, 당론(黨論)에 초연한 ‘청백리’로 주목받는 것은, 그가 살아온 삶과 행동이 그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2. 김장생의 가계(家系)와 향리(鄕里) 연산(連山)

1) 출생과 본관에 대하여

김장생은 1548년(명종3) 7월 서울 황화방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조선에서는 본명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본명 이외에 이름을 따로 지어 편하게 부르던 이름을 자(字)라 했다. 또한 자기의 거처, 취향, 인생관 등을 반영하고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르는 이름을 호(號)라고 했다. 이에 따라 김장생은 자를 희원(希元), 호를 사계(沙溪)라 했다.    

김장생의 본관(本貫)은 광산(光山)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충청도 연산(連山)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본관은 시조(始祖)의 고향 즉 성(姓)을 연시조의 출신지를 말하는 것으로 출생지와 거주지 및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世居地)와는 구분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 나라의 성씨제도(姓氏制度)는 세계 어느 나라와도 다른 독특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성씨의 본관은 특정 지역명칭으로 구분되지만 그 본관은 출생지도 아니고 주거지도 아니며, 심지어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본관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먼 조상대에는 본관과 본적지가 일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본적지를 떠나 각기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게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출신을 말할 때는 본적지명(本籍地名)을 사용했다. 이것은 조선시대 각 가문의 문벌 숭상 의식이 강했던 때문인데, 세상에 알려진 인물인가의 여부를 떠나서 그 지방에 맨 처음 들어와 살았던 인물을 시조로 받드는 중국의 경우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씨족의 규모가 커지고 씨족원들이 분산되어 살게 되면서, 분파가 생기고 파보(派譜)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씨족 안의 파(派)나 파보(派譜)의 명칭에는 관직명이나 호(號)를 붙여 구분하고, 어떤 경우에도 지명(地名)을 붙이지 않았다. 그만큼 본관은 같은 씨족을 하나로 엮어주는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인명사전에 출생지도 아니며 거주지도 아닌 본관을 빼지 않고 적은 이유도 여기서 말미암는다.

김장생의 본관인 광산(光山)은 전남 북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을 가리킨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원래는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757년, 경덕왕16)에 무주(武州)로 고쳤다. 그 후 892년(진성여왕6)에는 견훤이 이곳에서 후백제를 세우기도 했으며, 940년(태조23) 고려 태조가 광주(光州)로 고쳐 부르도록 했는데, 광산(光山)은 광주지역의 별칭으로 익양(翼陽)이라고도 했다.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이곳 광산에 처음 자리잡은 김흥광(金興光)에서 비롯한다. 김흥광은 신라 왕자로 통일신라 말기 곳곳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경주를 떠나 무진주 서일동(西一洞, 현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김흥광(金興光)이 살던 서일동은 고려시대 후손 가운데 장관급인 평장사(정2품직)가 여럿 배출되자, 사람들이 마을의 이름을 평장동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조선후기 족보가 조상을 높이고 자랑하려는 성격을 강하게 띰으로 인해 내용의 진위와 허실에 대한 논쟁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족보가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성관(姓貫) 의식과 가계(家系) 의식을 이루어 왔다는 점에서 족보에 의한 가계는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5대파를 이루기까지의 광산 김씨 세계(世系)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광산김씨 세계표(世系表)  

1세 흥광(興光) --->2세 식(軾)--->3세 길(佶)--->4세 준(峻)--->5세 책(策)      --->6세 정준(廷俊)--->7세 양감(良鑑)
--->8세 약온(若溫)--->9세 선(璇)
--->8세 의원(義元)--->9세 광중(光中)--->10세 대(帶) --->11세 위(位)▲▲▲
                                                  --->11세 주영(珠永)▼▼▼

▲▲▲--->11세 위(位) --->12세 광세(光世)--->13세 경량(鏡亮)
      --->14세 수(須) --->15世 태(台)
                     --->15世 태현(台鉉) ♠문정공파 시조♠
      --->14세 주정(周鼎) ♠문숙공파 시조♠


▼▼▼--->11세 주영(珠永)--->12세광존(光存)--->13세 대린(大鱗)
           --->14세 련(璉) ♠양간공파 시조♠ --->15세 사원(士元) --->
                 14세 규(珪) ♠랑장공파 시조
16세 진(稹)
      --->17세 영(英) ♠사온직장공파 시조♠

광산 김씨는 이른바 3대파라 하여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등으로 나뉘어 왔다. 그러다가 1939년 전남에서 이른바 장성대동보(長城大同譜)를 간행하였는데, 그 때 낭장동정 규(珪)를 파조(派祖)로 하여 파보(派譜)를 따로 간행하던 일파(一派)가 새로이 대동보(大同譜)에 들게 되었다. 이후 1985년 광산 김씨 대종중에서 시조(始祖) 이후 17세(世) 사온직장 영(英)을 파조(派祖)로 결의하여 5대파가 되었다.

김장생은 양간공파 16세 김진(金稹)의 다섯 아들 가운데 둘째 영리(英利)의 후손인데, 김련→김사원→김진으로 이어지는 3대는 고려 당대의 대표적인 세족(世族)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고려말까지 번영을 누렸으나, 조선왕조로의 교체와 함께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진의 둘째 아들 영리의 후손은 기호지방에 자리잡고, 다섯째 천리(天利)의 후손은 안동지방으로 낙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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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04.17 16:44

    첫댓글 이글은 허주공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글이며 저의 블로그에서 스크랩해서 1회~18회까지 연재 게시할 예정이며 우리 할아버지의 학문과 사상을 깊이 새겨 일가님들의 마음의 양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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