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는 남녀 노소와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정서생활이며, 요즘말로는 생활스포츠라고도 말한다. 낚시는 원시시대부터 생존의 수단으로 행해졌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낚시를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우리나라에도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고기뼈로 만든 낚시바늘이 패총조사에서 발굴된 바 있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에도 낚시를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나라에서 2000년 전에 낚시를 한 사람으로 이름이 밝혀진 낚시꾼은 신라 제 4대 왕인 석탈해왕(昔脫解王 : 서기57년)이라고 한다. 석탈해는 영일 사람으로 10살 때부터 낚시로 고기를 잡는 어부생활을 하다가 23살 때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대보(大輔)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석탈해가 영일에서 바다낚시를 했는지 아니면 영산강이나 낙동강에서 잉어, 붕어, 메기 따위의 민물낚시를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낚시로 물고기를 잡는 업으로 양어머니를 봉양했다고 기록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낚시 솜씨가 대단했던 것 같다.
석탈해는 74세 때 유리왕이 승하하면서 신라 제 4대왕에 즉위했으며 99세에 승하한, 장수했던 왕이기도 하다.
6·25 아침 낚시했던 이승만 박사
1948년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 박사는 완고하고 고집이 센 대통령으로 유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요일이었던 한국전쟁 발발 당시 아침 경회루(慶會樓) 연못에서 혼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가 남침 기별을 듣고 서둘러 경무대로 돌아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 별장과 거진, 화진포호 등의 별장에 자주 간 것은 낚시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낚시광이었기 때문에 당시 정부 고관대작들과 정치인들 또한 일본에 가는 인편에 일본 낚싯대와 낚시용품을 사오도록 부탁을 해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필자가 부산에서 피난 생활 중인 1954년 경 공휴일이면 통대나무를 세 토막으로 잘라 함석으로 연결한 낚싯대를 들고 버스를 타고 부산시 사하에 있는 낙동강 샛강 수로에 가서 낚시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외제 세단 차를 타고 온 신사복 차림의 50대 신사와 낚시를 같이 하게 됐다.
그는 낚시 초보였는데 일제 바늘과 낚싯줄을 꺼내주며 필자에게 채비를 묶어달라고 했다. 그의 낚싯대는 손잡이에 동작(東作)이라고 각인이 찍힌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일제 낚싯대였다.
낚시를 마치고 부산 시내 당시 우리 집이 있던 동네까지 그 사람의 세단 차를 같이 타고 왔는데, 운전기사가 그 사람을 '국장님'이라고 굽신대는 것으로 미루어 정부 고관으로 짐작되었다.
1956년 5.15 총선 후 국회의장에 이기붕, 부의장에 조경규, 황성수가 당선됐다. 국회 시계 밀수 사건으로 황성수 부의장이 사표를 내면서 그해 12월에 이재학씨가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이재학 부의장은 우리 낚시계에서는 너무도 잘 알려진 낚시광이었다.
이 부의장은 바쁜 의정생활 속에서도 쉬는 날이면 낚시를 다녔으며, 일반인들이 잘 찾지 않는 조용하고 조그마한 낚시터만 골라 다녔다.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에 있는 화이트교 건너 임진강 샛강은 이재학씨가 자주 낚시를 다녔던 곳이라 해서 이재학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질 정도였다.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 위치한 3,000평 남짓한 저수지도 이재학씨가 자주 찾았다고 해서 이재학못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동해안 정동진 남쪽에 있는 옥계해수욕장 옆 광포늪(낙풍천 하류)도 조용하면서 경치가 좋고 월척도 낚여 이재학씨가 자주 찾던 곳이어서 이재학 못이라고 했는 등 당시 전국 여러 곳에 이재학못이 있었다.
이재학 선생은 정계를 떠난 후에도 계속 낚시를 다니다가 노년에 낚시터에서 귀가하는 길에 별세했다.
문인이 많았던 한양낚시회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은 낚시를 즐기면서 낚시를 시와 서화에 담았으며 보석 같은 많은 작품들을 후세에 남겨놓았다.
이조 선조 때의 명신이며 문인인 송강 정철은 당화(黨禍)로 거의 평생을 귀양 다녔지만 풍류낚시를 하면서 관동별곡, 선산별곡, 사미인곡 등 수많은 가사시조를 후세에 남겼다.
낚시를 좋아하는 어느 문인은 수필집에서 '나는 물가에 자리를 잡으면 그 순간부터 낚시공간이라는 독특한 세계로 들어간다'고 했다. 낚시의 공간은 일종의 진공이므로 낚시 이외의 아무 것도 머리 속에 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문인 예술인들이 낚시를 좋아하는 것은 낚시의 공간에서 자아를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붕어낚시 중흥기는 1955년 환도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환도 그해에 명동, 남대문, 종로, 을지로에 낚시점이 생기면서부터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낚시점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동네마다 낚시점이 늘어나면서 낚시꾼들은 집에서 가까운 낚시회를 찾게되고 같은 직업인들이 모이는 낚시회도 생기게 되었다.
필자는 종로3가에 있는 한양낚시회에 나갔는데, 당시 한양낚시회에는 문단 원로급인 소설가 오영수씨가 부회장이었다. 이 때문인지 당시 한양낚시회에는 문인들이 많이 모였다.
주말이면 만나던 문인은 소설가 곽학송, 허윤석, 원응서, 곽하신 외 몇 사람이 더 있었다. 당시에는 낚시회 버스를 이용해야만 낚시를 갈 수 있었으므로 부지런하지 못한 문인들은 집에서 가까운 낚시회를 다녔다.
문인들은 1년에 한두 번 문인낚시대회를 열었는데, 2∼3년 전까지는 소설가협회 단위로 소설가 홍성유씨가 주관해서 매년 봄에 대회를 열었다. 그러다가 홍성유씨가 건강이 나빠져 요즘에는 문인낚시대회가 자주 열리지 못하고 있다.
낚시를 좋아하는 문인들은 많지만 최근에는 이미 작고했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많다.
낚시를 가장 열심히 다닌 문인으로는 소설가 오영수씨를 필두로 박연희, 허윤석, 원응서, 곽학송, 곽하신, 황명, 홍성유, 성춘복, 서기원, 김시철, 임진수, 정벽봉, 김봉호, 장일백, 박범승, 주동후씨, 그리고 여류시인 안정순씨 등이며 여기에 이름을 적지 않은 낚시꾼들이 있다.
낚시터에서 드라마를 쓴 곽학송씨
연도는 불확실하지만 1964년 무렵 필자가 경기도 용인의 신갈지에 낚시를 갔을 때다.
상류에 있는 민가 밥집에 저녁식사를 부탁하려고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랑방에 서울에서 온 작가가 묵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봤더니 소설가 곽학송씨가 글을 쓰고 있었다. 그동안 꽤 오랫동안 낚시회에 나타나지 않아 궁금했었는데 '별당아씨'인지 하는 드라마를 쓰기 위해 신갈지에 왔다고 한다. 한 칸 남짓한 사랑방 벽에는 날짜별로 하루치씩 각본을 써서 길게 벽에 붙여 놓았는데 방 전체가 원고지로 도배가 되어있고 읽고, 쓰고, 고치고,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밤에는 낚시를 하고 낮에는 각본을 쓰는데, 밤낚시 재미 때문에 살맛이 난다며 드라마가 끝나야 집에 가서 쉬겠지만 어젯밤에도 월척 2마리를 낚아 아침에 고아 먹었다며 신바람이 나 있었다.
배 놓치고 파출소에서 잔 오영수씨
1960년대 후반에는 강화도의 구리포수로, 쪽실방죽, 강전수로 등에서는 붕어가 줄입질을 하여 서울 낚시회의 강화도 출조가 잦았다.
당시에는 강화도와 연결하는 연륙교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때이므로 낚시회 버스들이 선착장에 길게 줄을 서서 두 척이 왕복하는 도선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만 해도 강화도를 취약지라고 해서 사계절 가리지 않고 일몰만 되면 도선은 운항중지가 된다. 그래서 도선장에서는 낚시꾼, 관광객 등 외래인들에게 일몰이면 배가 끊긴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었다. 필자가 속해있던 한양낚시회에서도 강화 쪽실로 낚시를 갔었는데, 당시 가을이었으므로 일몰시간은 저녁 7시쯤이었다.
오영수씨도 강화도가 한두 번 출조가 아니었으므로 도선 시간을 잘 알고 있었는데, 쪽실방죽의 조황이 안 좋다며 근처에 있는 길상수로로 혼자 자리를 옮겼다.
총무가 낚시 종료시간을 알리고 낚시터에서 모두 철수를 했는데, 오영수씨가 보이지 않았다. 총무는 기다리다 못해 길상수로까지 뛰어가서 낚시터를 돌아봤으나 키보다 큰 갈대밭에서 도무지 오영수씨를 찾을 길이 없다. 총무가 오선생의 이름을 부르며 찾았으나 결국 그날 오영수씨를 찾지 못했다.
도선 시간에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영수씨를 강화도에 남겨둔 채 낚시버스는 막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회원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새벽, 총무가 첫 버스로 강화도를 들어갔는데, 요행히 선착장에서 방황하고 있는 오영수씨를 만날 수 있었다. 오영수씨는 길상수로에서 손목시계가 고장이 난 것을 모르고 있다가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서야 시계가 멎어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일. 서둘러 낚시터를 벗어났지만 온수리를 4km를 걸어서 도착한 시간은 이미 캄캄한 밤이다. 오영수씨는 파출소를 찾아가 소설가 오영수라는 신분을 밝히고 서울까지 갈 수 있는 차편을 주선해 줄 것을 사정했다. 하지만 막배가 끝나면 강화도는 고립되는 섬이 된다는 사정에 어쩔 수 없이 오영수씨는 그날 온수리에 머물러야만 했다.
오영수씨는 수중에 겨우 서울 가는 버스비 정도의 여비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관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파출소 숙직실에 묵게 되었는데, 다행히 주임이 오영수씨가 유명한 소설가임을 알고, 순경들과 저녁식사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다음날 아침 주임이 강화 선착장까지 가는 버스에 오영수씨를 태워주고, 그때 선착장까지 걱정이 되어 마중 나온 총무와 만났던 것이다.
오영수씨는 당시 총무에게 '욕봤다'라고 한마디를 던졌는데, 그 말이 총무에게 한 말인지 오영수씨 자신에게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내가 낚은 고기가 아니다"
오영수씨는 억양이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낚시는 정도낚시로 철저했다. 짧은 낚싯대로 떡밥낚시만 고집하는데 옆에 누가 와서 떠들면 "낚시터에 와서 와 시끄럽게 구노!"하고, 그래도 조용히 하지 않으면 아예 낚시가방을 걷어 메고 자리를 옮긴다. 낚시터에서 젊은 사람과의 시비를 아예 피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철저한 것은 낚은 붕어에 걸린 바늘이 붕어의 윗입술에 걸려 있으면 그 붕어는 살림망에 넣지만 입 옆이나 아랫입술에 걸려있으면 그 붕어는 살림망에 넣지 않고 방생한다. 내가 낚은 붕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한양낚시회에서 1년 낚시를 청산하는 납회를 할 때 오영수씨가 27cm, 즉 여덟 치가 넘는 붕어를 낚았다. 옆에 앉아 있던 회원들이 오선생이 장원을 했다며 모두 부러워 하는 눈치였는데, 오영수씨는 그 대어가 낚시바늘을 삼켜 목에 걸려 있었다며 살림망에 넣지 않고 바로 방생을 했다. 그날 납회대회에는 여덟 치가 조금 모자라는 붕어를 낚은 꾼이 1등을 해서 그라스로드 낚싯대를 상품으로 받았다.
오영수씨가 낚은 붕어를 놓아주지 않았다면 필경 대어 1등의 장원은 오영수씨의 몫이었을 거라고 모두들 한마디씩 말했다. 오영수씨는 평소에도 경상도 억양 치고는 비교적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낚시를 할 때는 거의 말이 없었다.
조각가 반찬식·김창희 교수도 낚시광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의 반찬식 교수와 서울시립대학의 김창희 교수는 우리나라 조각미술의 거목이다.
환도 직후부터 한양낚시회 회원이었던 반찬식 교수는 조각처럼 섬세한 낚시를 하며 대어보다는 마릿수 낚시를 즐기는 기교파 낚시꾼이다. 후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 조각공원을 만들었는데, 공원 안에 연못을 만들어 놓고 낚시로 낚은 붕어와 잉어를 계속 연못에 갖다 넣어 연못이 붕어, 잉어로 우글우글 했다.
작품 제작 때문에 낚시를 가지 못할 때는 연못에서 잠깐 낚시를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가깝게 지내는 낚시친구를 조각공원에 초청해서 낚시를 하고 술도 같이 마셨다.
시립대 교수인 김창희씨는 박찬식 교수보다 더 열심히 낚시를 다녔다.
박찬식 교수가 섬세하고 조용한 낚시를 즐기는데 반해 김창희 교수는 약간 거세게 낚시를 한다. 김창희 교수와 낚시를 같이 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옆에 앉아 있었는데, 얼마 후 보면 저 건너편에 가서 앉아있다. 김교수는 밤낚시를 할 때도 자리를 자주 옮기는 적극적인 낚시를 많이 한다. 김창희 교수는 살림망에 준척급 이상의 씨알이 들어가 있어야 붕어를 낚았다고 말한다.
충주호가 한참 호황이었던 시절, 김교수는 작품 일로 낚시회 출조에 자주 동행하지 못했다. 작품 작업을 하다가 낚시생각에 손이 무디게 되면 충주호로 달린다. 그리고 밤낚시로 꼬박 밤을 새고 집에 돌아와서는 목욕을 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는 다시 작품 작업을 한다. 그리고 또 낚시생각으로 작업이 힘들어지면 다시 충주호를 달려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날 충주호에서 돌아오는 길에 졸음으로 깜박하고 앞차를 들이받았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으나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지금도 거센 낚시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으나 바쁜 일 때문에 예전만큼 낚시를 많이 다니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