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3대 명품 그룹 PPR |
|
2000년대 초반 명품 업계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를 차지하기 위한 프랑스 거물 사업가들의 쩐의 전쟁으로 달아올랐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과 당시 쁘렝땅백화점 등을 갖고 있던 프랑스 유통거인 피노-쁘렝땅-흐두뜨(현재 PPR)의 프랑소와 앙리 피노 회장이 대결의 당사자다. 1999년 아르노 회장이 구찌 지분을 매집하며 인수합병을 시도하자, 구찌그룹 경영진은 명품업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던 피노 회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2년에 걸친 인수전에서 50억달러 이상을 쏟아 부은 피노에게 아르노 회장은 무릎을 꿇었고, 피노 회장은 2004년에는 지분을 99.4%까지 확대, 구찌 경영권을 완전히 차지했다. 또 구찌 뿐 아니라 입생로랑 · 보테가 베네타 · 부쉐론 · 세르지오 로씨 · 발렌시아가 · 알렉산더 맥퀸 · 스텔라 메카트니 등의 브랜드를 거느리며, 단숨에 명품업계에서 베르나르 아르노에 대적하는 최대 라이벌로 떠올랐다.
◆ 프랑소와 피노 명예회장
|
막대한 대기업 자본이 들어가면서 명품업계에도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프랑소와 피노 PPR그룹 명예회장이 럭셔리 업계에 진출한 지는 불과 10년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은 묵직하다.
피노 회장의 성공은 LVMH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같이 끊임없는 기업 인수합병에 있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제재소에서 일을 돕던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키웠다. 27세에 소시에테피노라는 이름으로 세운 목재 유통회사가 PPR그룹의 모태가 됐다.
기업가로서의 명성은 90년대 들어 유통거인으로, 그리고 명품업계의 거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수록 높아졌다. 그 과정에는 어김없이 기업 인수가 등장했는데 경영이 악화된 기업들을 헐값에 사들여 정상화시켰다. 91년 가구가전 유통업체 콩포라마 인수를 시작으로 유통업에 진출한 그는 프랑스 1위 백화점 쁘렝땅(2006년에는 다시 이탈리아의 보르레티 가문에 매각)과 통신판매회사 라흐두뜨를 잇따라 손에 넣어 피노-쁘렝땅-흐두뜨그룹을 갖췄다. 1993년에는 영국 피어슨그룹으로 넘어갔던 와이너리 샤토 라투르의 소유권을 프랑스로 되찾아왔다.
PPR이라는 이름은 구찌를 인수한 뒤 바뀌었다. 2007년 PPR그룹은 아이다스와 나이키 사이에서 죽어가던 독일의 스포츠용품 브랜드 푸마도 손에 넣었다.
구찌 |
그가 럭셔리 업계로 눈을 돌린 이유는 간단하다. 피노 회장의 오른팔로 2005년 은퇴 때까지 15년간 PPR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세르주 웽베르는 “유통업으로는 국제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명품 브랜드는 투자를 하지 않고도 아프리카부터 아시아를 가로질러 사업을 뻗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구찌 인수도 철저히 사업적 마인드에서 시작됐던 셈이다.
피노 회장은 미술업계에서 세계 최고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20세기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하다. 파블로 피카소, 피에 몬드리안, 제프 쿤스 등의 작품이 포함된 2천점 이상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고, 98년에는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를 인수했다.
크리스티 홍콩 |
크리스티는 오늘날 미국, 유럽, 홍콩 등 39개국에 15개 경매장과 85개 사무소를 두고 전세계 3천여개 경매사 중 정상을 달리며 예술계를 주름잡고 있다. 작년 한해 경매성사금액이 52억 달러로 전년 대비 53% 증가하며 245년 역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피노 명예회장은 2007년 영국의 저명한 미술잡지 아트리뷰가 선정한 ‘세계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 1위에 꼽혔다. 2009년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자신의 컬렉션을 보여주는 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을 열어 화제를 모았다.
2003년 피노 회장은 40년에 걸쳐 쌓은 PPR그룹의 경영권을 아들 프랑소와 앙리 피노에게 넘겨줬다. 피노 회장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최근에는 젊은 피노 PPR 회장이 구찌그룹의 CEO를 겸임하겠다며 오너 경영을 선언했다. 프랑소와 피노 PPL그룹 명예회장은 2011 세계 억만장자 리스트에서 115억 달러의 재산으로 67위에 이름을 올렸다.
◆ 부쉐론
부쉐론 |
거대 명품 그룹 PPR은 드비어스와 불가리, 프레드, 쇼메, 태그 호이어 등을 거느리고 있는 LVMH나 까르띠에, 반클리프아펠, 피아제, IWC 등을 거느리고 있는 리치몬트에 비해 보석 및 시계 브랜드가 지극히 적다. PPR그룹의 유일한 주얼리·시계 브랜드는 ‘부쉐론(Boucheron)’이다. 부쉐론은 세계적 토털브랜드로 육성시킨다는 장기전략 하에 2000년 7월 PPR그룹에 합병됐다. 부쉐론은 1858년 보석 세공가였던 프레데릭 부쉐론이 상점을 열면서 시작된 이래 15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부쉐론의 보석디자인은 혁신 그 자체이다. 크리스찬 디올이 뉴룩(New Look)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1940년대에 부쉐론은 꽃과 털에서 영감을 딴 새로운 디자인으로 유행을 선도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소피아 로렌, 그레이스 켈리 등이 목걸이와 브로치, 귀걸이를 부쉐론으로 치장했다면, 18~19세기에는 잠자리와 나비 · 새 · 뱀 · 딱정벌레처럼 자연적인 소재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에 보석을 새겨 넣었다. 당시 유명한 댄서였던 라벨 오트로는 조끼의 전체를 보석으로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했을 정도이다.
독특한 부쉐론 보석은 왕실에서 먼저 알아봤다. 1925년 파티알라의 마하라자가 왕실의 보물인 6케이스 보석과 진주를 부쉐론에게만 세공을 의뢰했다. 또 1930년 이란의 샤르 라이자가 페르시아 왕국의 보물 전체에 대한 감정을 부쉐론에게만 의탁한 적도 있다.
이후 인도, 러시아, 이집트, 미국, 영국 등 프랑스를 찾는 전세계 왕족과 억만장자, 영화배우, 유명 인사들의 주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고객의 취향에 맞는 세상에 하나뿐인 주얼리를 만들었다. 루이 부쉐론은 이란왕가의 페르시아산 보물을 관리하는 공식감정사로 임명받아 보석세공사의 지위를 넘어 프랑스 주얼리 명가의 대표주자라는 자존심을 세웠다.
60~70년대에 부쉐론은 보석뿐 아니라 시계로 사업영역을 확대했으며, 88년에는 부쉐론 향수를 선보이며 보석같은 향수라는 이미지를 탄생시켰다. 1893년 부쉐론은 방돔광장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일개 보석상점에서 벗어나 프랑스 최초의 보석회사로 면모를 갖추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