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의 쾌락 이론
헤겔의 쾌락과 필연성 이론은 난해하다.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철학사적인 지식이 많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간단한 것 하나만 소개한다. 그것은 피히테의 지식학 이론이다. 지식학의 근본은 자아(自我)와 비아(非我)이다. 자아의 존재는 확실하다. 비아(非我)는 자아 외의 모든 것이다. 타자를 말한다. 자아를 통해서 비아를 정립하는 것이 지식학의 목적이다. 이런
피히테의 철학을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성의 영역이라고 한다.
이성보다 한 단계 높은 영역을 헤겔은 정신이라고 한다.
피히테의 자아를 헤겔은 대자존재 혹은 자기의식이라고도 한다.
이는 자아만이 스스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라는 뜻을 내포한다.
헤겔의 특징은 대자존재와 타자의 연결을 행동으로 본다는 것이다. 쾌락과 필연성 장에서는 성욕과 성 행위 등을 그런 연결 행동으로 본다는 것이다.
성욕이나 관능적인 쾌락 현상을 헤겔은 자아와 비아의 관련성 안에서 관찰한다. 쾌락은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현상이다. 그런 면에서 이성은 정신의 도구이자 전단계이다. 이성이 어린이라면 정신은 어른이다. 그래서 헤겔은 이성을 정신의
추상.(abstraction)이라고도 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이 정신의 추상이란 말은 쉽게 말하면 동물이나 인간들은 성욕과 본능에 따라 성교를 하지만 이는 결국 2세를 생산하게 되고 종적인 번식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쾌락과 필연성 장의 핵심적 논리이다.
이런 이성과 정신의 관계를 헤겔은 쾨테의 파우스트 속의 한 구절을 통해서 나타낸다. 위에서 말한
메피스토펠레스. 여보게, 이론이란 모두 회색일세. 푸른 건 인생의 황금나무지. 구절이다.
이를 헤겔은 자기의식이 정신적 실체를 모르고 순수한 대자존재로만 볼 때 지식이나 이론은 회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즉 이성은 자신의 본능적 욕구에만 매달려 여자를 탐내지만 가정이나 공동체 혹은 민족과 국가 등을 도외시할 때를 말한다. 이를 헤겔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기와 자기의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굴레였던 학문.법칙.원리와 같은 그림자는 그 본모습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정신현상학 379쪽)
헤겔은 파우스트 박사가 지식과 학문을 포기하는 과정을 이렇게 해석을 한다. 즉 그는 정신이 높은 본질임을 모르고 맹목적인 쾌락의 욕망에 떨어졌다. 즉 파우스트는 개별적인 대자존재로 타락한 상태라는 것이다. 학문과 법칙 같은 이성적인 부분은 이제는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주변에서도 많이 경험된다. 예를 들어 그 어려운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된 사람도 술집 같은데 가서 욕구를 마음껏 향락하다가 도가 지나쳐서 불법적인 일을 벌리고 구속 경우이다.
또 헤겔은 학문.법칙.원리 등을 자기와 현실을 연결하는 고리로 설명했다. 이는 당연한 말이다. 그런 것들은 또한 사람이 밥먹는데 필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파우스트의 타락은 인간이 가진 본성 중의 하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욕구는 드디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고 향락을 즐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목적의 달성은 그 다음 순간에 다른 상태를 가져온다. 즉 애인이 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결혼까지 해야 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플레이보이나 순수한 쾌락주의자라고 하면 이런 지속적인 관련성은 싫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렇듯 자기의식이 그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면 바로 그 한 가운데서 참으로 목적이란 무엇인지가 분명히 밝혀진다. 자기의식은 자기를 개별적인 독자존재로 파악하고 있지만, 목적을 실현한다는 것은 바로 개별자로서의 독자성을 파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더 이상 이 개별자로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와 다른 자기의식과의 통일이나 또는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로서의 자기가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381쪽)
이 부분을 해석할 때 우리는 헤겔 개인적인 삶도 참조해야 한다.
알다시피 학문으로 출세를 하지 못한 청년기의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출판할 1807년도에도 무렵 아직도 교수가 되지 못하였고 심지어 나폴레옹의 바이마르 공국에 대한 침략으로 말미암아 시간강사의 직업도 뺏기게 되었다.
또 그는 하숙집 여주인과 연애를 하여 아이를 낳고 그래서 또 그녀와 결혼 약속까지 하였다. 이런 자신의 경험 역시 쾌락과 필연성을 낳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공부를 엄청나게 하고 온갖 철학 논문을 쓴 노총각이 경제적으로도 빈곤한 상태에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하숙집 아주머니와 이성적 관계를 벌인 것이다. 파우스트 역시 욕망을 추구하다가 여자를 임신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를 감옥에 가게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위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더 나아가서 관능적 쾌락이나 사랑은 모순을 초래한다. 아니 사랑 그 자체가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다. 사르트르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혹은 사랑은 실패한다 라고 한다. 거의 헤겔과 같은 방식이다. 즉 나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주체적으로 여자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 여자로부터 사람받기도 원한다. 이는 내가 그녀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서 나의 주체성을 상실한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타인의 주체성을 존중할 때 ‘우리는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사랑이란 내 주체성을 버리고 타인의 세계로 전락하게 된다. 그때의 감정을 증오라고 한다. 그래서 사랑은 실패하고 만다.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에서 )
사랑은 이런 내부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는 결국 헤겔의 사상과 상통한다. 이런 쾌락과 사랑의 모순을 헤겔은 사람의 긍적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구분한다.
쾌락을 향유한다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이 자기의식으로서 대상화된다는 긍정적인 의미와 함께 자기 자신을 파기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기의식이 쾌락을 통한 자기실현을 오직 긍정적인 의미로만 보려고 하더라도 그의 경험은 의식에게 모순된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니. 개별자로서 현실성을 획득한 자기는 현실성을 결여한 채. 그의 개별성과 비현실의 장에서 공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서도. 이 개별성을 병탄해버릴 만한 힘을 지닌 부정적인 상황의 출현으로 인하여 해체되어버린다. 이 부정적인 국면이야말로 개인에게 본원적으로 갖춰져 있는 본질이다. (정신현상학 380쪽)
위의 어려운 문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욕을 가진 인간.(=자기의식)은 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사정을 하게 된다. 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이 바로 대상화된 자기의식이다. 쾌락의 욕구는 철저히 주관적인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사정된 정액은 다시 물질화된다. 즉 객관적인 사물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긍정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射精)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요즘처럼 피임이 없었던 19세기에는 성교는 질 속이나 다른 곳으로의 사정 밖에 없었다. 이게 헤겔이 말하는 도달된 현실성의 의미이다. 이를 또한 모순이라고 표현했다. 사정은 임신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원래의 욕구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향유된 쾌락에 숨어 있는 모순이다. 이런 경험을 많은 사람들은 하게 된다.
요즘 TV에서 유행하는 “고딩엄빠” 같은 방송이 이런 경우이다.
파우스트 역시 이런 일을 경험했다.
헤겔 자신도 이런 경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식으로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야합하는 경우 이런 문제는 반드시 발생한다. 이를 헤겔은 “개별성을 병탄해버릴 만한 힘을 지닌 부정적인 상황의 출현”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너무 많았다.
이런 상황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러나 이때 개인은 더없이 빈약한 정도의 자기 실현을 이룬 정신일 뿐이므로 아직 추상적인 이성. (die Abstraktion der Vernunft.)으로서 또는 자기 안의 자기와 타자 안의 자기가 직접적인 통일을 이룬 상태로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본질은 추상적인 범주로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 그리하여 사물의 세계는 단순한 본질존재가 순수한 관계를 전개해나가는 원환으로서 나타난다. 개체성이 이러한 모습으로 실현된다는 것은 개별자가 단일한 자기의식 내에 유폐되어 있던 상태를 벗어나 자기와 맞서면서 자기를 대상 세계에 펼쳐나가려는 추상적인 원환운동. (Kreis von Abstraktion.)을 전개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신현상학 380~381쪽)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식의 탄생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확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추상적이란 말은 아직 태어난 아기를 기쁨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억지로 받아 들이는 것과 같다. 즉 아이를 기대하고 성교나 임신을 시킨 것이 아니라 뜻밖에 아이가 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출산이 나와 인류의 영속을 취하여 필요한 것인데 향락만 추구한 자기의식은 이를 알지 못한 것이다. 이를 헤겔은 추상적인 범주라고 한 것이다. 이를 헤겔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존재의 형식이라고도 말했다. 이런 추상적인 전개를 헤겔은 필연성이라고 불렀다. 혹은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추상성이 전개되는 것이 바로 필연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필연성이나 운명이라는 등의 것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그의 일정한 법칙이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순수한 관념, 즉 단순하고 공허한 가운데 한치의 흔들림 없이 관철시켜나가는 관계야말로 운명의 본모습으로서, 개인으로서는 여기에 생겨나는 사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3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