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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메시스 효과Hormesis Effect”는 해롭지 않은 수준의 가벼운 스트레스로 자극을 주거나 미량微量의 독소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이며, 생물학적인 방법으로 생명체에 투여하여 면역 기능 증진, 질병 감소, 수명 연장 등으로 나타나게 하는 긍정적인 생리 현상을 가리킵니다. 소량의 병원균에 미리 노출시키는 예방 주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약死藥의 주재료가 되는 부자附子는 적당한 양을 사용하면 관절염과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됩니다. 보톡스Botox에 사용하는 독소Botulinum Toxin는 신경 독성 물질입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 독소들 가운데 가장 강합니다.
지극힌 적은 양만 먹어도 죽음에 이를 정도로 맹독성 화학 물질인 청산가리의 1조 배나 됩니다. 양 조절을 통해서 전립성비대증, 다한증, 통증, 요실금, 만성두통, 편두통 등 다양한 영역에서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업을 할 때 눈과 목과 손과 팔 등에 생기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근 골격 질환 Visual Display Terminal Syndrome의 치료제로도 사용됩니다. 주름 제거 용도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벌레들은 익숙한 섭씨 20도를 넘는 섭씨 35도의 환경에 두 시간 정도 노출되었을 때 약 25% 가량 더 오래 살았습니다.
높은 온도에서 살아남을 가능성도 노출되지 않은 벌레들보다 25% 가량 더 높았습니다.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 동안 원심분리기에 돌려진 초파리는 그렇지 않은 초파리보다 더 높이 날았습니다. 더 오래 날았습니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더 날렵했습니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단식을 하고 칼로리를 제한적으로 공급받은 설치류齧齒類와 원숭이는 혈압이 낮아졌습니다. 수명이 늘어났습니다. 노화와 질병에 대한 저항의 정도도 높아졌습니다. 복어의 독Tetrodotoxin은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보다 약 삼천 배의 진통효과를 나타냈습니다.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진통제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맹독성 물질들은 양만 잘 조절하게 되면 얼마든지 탁월한 효과를 나타내는 치료제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한편, 인류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젊은 세대의 평균 수명이 전 세대(곧 고령층)보다 더 낮아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언뜻 들으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릅니다. 젊은 세대는 어렵지 않은 환경 곧 이미 풍요로워진 환경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온갖 종류의 과일과 다양한 식품으로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며 성장했습니다. 넉넉한 유급 휴가를 사용합니다.
편안한 가전제품과 가구를 사용합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최적화된 진료와 최첨단 장비까지 갖춘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한 자녀 가정이 보편화면서 지나치게 과잉보호를 받는 측면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바람과 폭풍우가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야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랍니다. 지극히 미세한 자극 곧 고난에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취약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반면 이미 고령이 된 세대는 하루하루 살아갈 걱정을 해야 하는 가난에 찌든 환경 곧 생존 자체가 어려운 환경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고난이 일상이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분단과 이별의 아픔과 고통을 주고 있는 참혹한 전쟁까지 치러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면서 누리고 있는 온갖 혜택들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고난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은 물론 유무형의 자극과 충격으로 무장했다고 해도 지나친 주장이 아닙니다. 이는 정신은 물론 인체에도 지극히 좋은 자극을 줍니다. 쉽게 지치지 않는 생명 활동을 촉진시킵니다. 미세한 자극 곧 고난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는 정신적인 맷집을 갖추게 만들어줍니다.
육체적인 맷집도 마찬가지입니다. 평균 수명 또는 기대 수명이 지극히 작은 자극에도 너무나 취약한 젊은 세대들보다 훨씬 높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실제로, 주변을 조금만 살펴보면 100세 가까운 어르신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일부 인류학자들의 주장이 허구虛構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a)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신앙생활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난 곧 자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조건 유익이 됩니다. 고난이 비록 쉽지 않을지라도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기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물질은 독을 가지고 있다. 독을 가지지 않은 물질은 없다. 독이냐 약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오직 양에 달려 있다.”는 그Paracelsus의 주장대로, 하나님께서 일부러 허락해 주신 적당한 고난은 저와 여러분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가장 탁월한 효과는 나타내는 명약名藥 중의 명약이기 때문입니다. 그Job는 완전했습니다. 진실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했습니다.
악한 일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쌍,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있었습니다. 종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동방에서 부자들 가운데 단연斷然 으뜸이었습니다. 슬하에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모자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들은 번갈아 가면서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차렸습니다. 누이들도 불러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겼습니다. 이런 잔치가 한차례 다 돌아가고 나면 그는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자녀들을 한 자리로 불러 모았습니다.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구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열 명의 자녀들 한 명 한 명을 대속하기 위한 희생양을 준비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했습니다. 하나님께 번제로 올려드렸습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은밀한 죄를 짓거나 여호와의 영광을 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또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방들이 객들로 넘쳐날 정도로 나그네를 영접했습니다.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언제든지 용도가 다하게 되면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 정도에 불과한 종들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처사는 매사에 이랬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도 그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 줄 정도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함께 존경도 받았습니다. 여호와로부터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이 땅 어디에도 없다.”(욥1:8b)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영적으로는 물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잊지 말아야할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본서의 궁극적인 기록 목적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여호와에 대한 개념 타파입니다.
여호와는 그가 갖추고 있었던 해박한 지식과 출중한 신학과 온갖 경험을 통해 터득한 탁월한 지혜로도 완벽하게 다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다 설명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다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공동체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그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에 대한 자신만의 개념槪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개념 안에 온 우주에 편만한 여호와를 가뒀습니다. 여호와를 제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던 당시의 타락한 종교 장사꾼들이 하나님을 성전에 가뒀던 것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차이가 있습니다. 욥은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탐욕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어 있던 타락한 종교 장사꾼들은 다분히 의도적이었습니다. 욥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자리에 앉았습니다. 반면, 타락한 종교 장사꾼들은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의도적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모르는 일이었다 할지라도 반드시 새로워져야했습니다. 그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야 했습니다. 하나 뿐인 생명을 제외한 소유 전부를 빠짐없이 거둬들이는 고난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비로소 여호와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그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완벽하게 무너뜨리고 또 당신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만들려는 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사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니 구경조차도 해 보지 않았던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고, 당신으로부터 완벽하게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당신의 의도대로 정금 같은 거룩한 존재로 거듭날 것이고, 마침내 사탄의 손아귀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전 예고도 없이 소유 전부를 하나도 빠짐없이 순식간에 다 빼앗기듯 잃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났으니 또한 벌거벗고 돌아가리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어 가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리라.”(욥1:21)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출생과 죽음의 법칙에 대한 고백이 아닙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밀어닥친 고난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죽음에의 갈망도 아닙니다. 세속적인 허무주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철저히 순복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최악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은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지키겠노라는 고백입니다. 무엇보다 세상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여호와의 절대 주권에 대한 겸손한 고백입니다. 동시에 누구나 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여호와의 절대 섭리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모든 일들의 1차적 원인 곧 궁극적인 동인動因이 여호와라는 전제와 확신 없이는 절대로 내놓을 수 없는 고백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단순한 자연 현상이나 우연의 결과로 보지 않았습니다. 종들의 부주의로 인한 인재人災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약탈자들의 습격을 사전에 감시하지 못한 종들을 질책하지 않은 것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성질환이 생겼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섰습니다. 아내는 이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서) 요지부동이군요? (남은 인생을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콱) 죽어버리시오.”(욥2:9b)라고 외쳤습니다.
“당신이 이제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수해 왔지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결과 당신은 도리어 현재와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지 않은가? 그러한 하나님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배반하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절망과 좌절이 밀려들었습니다.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해 보였습니다. 불의해 보였습니다. 불신앙은 물론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었습니다. 발생하는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은 물론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들 전체를 통해서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하나님을 욕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사탄의 가증스러운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유 전부를 남김없이 다 잃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인생의 유일한 동반자였던 아내로부터 버림까지 받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던 친구들과 선을 베풀어주었던 사람들로부터의 배반과 비웃음과 조롱까지 더하지 않더라도 당장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순간,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욥2:10a)라고 고백했습니다.
축복과 재앙의 수여와 철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고유한 권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연단이라고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말씀을 무려 4장 걸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마침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고백했습니다.
종교적 전통과 믿음의 선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갖게 된 자신의 믿음은 대단히 불완전하고, 지극히 관념적觀念的이며, 가상적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비로소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지으신 세계를 치밀하게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 역시 치밀하게 다스려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엇보다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을 자신의 지식과 신학과 지혜로 제한하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죄 없다는 자신의 주장이 씻을 수 없는 죄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지껄였던 무수히 많은 말들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거둬드렸습니다. 티끌과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자신이 무無, 공空, 허무虛無를 가리키는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하나님 자리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비로소 여호와께서 의도하셨던 바로 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허락해 주시는 고난은 결단코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극렬하게 타오르고 있던 풀무 속으로 던져지고, 오랫동안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지고, 심지어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던 바다 한 가운데서 고래에게 삼켜지는 사건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그 누구도 당하지 않았던 엄청난 고난과 핍박과 조롱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인생에게 가장 큰 절망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이 아주 삼킬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토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로잡고 있던 인류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는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왕과 주권자로 삼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놀라운 은혜가 항상, 언제나, 영원히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 속으로 던져졌던 포로들이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굶주린 사자들이 우굴 거리는 굴에 던져졌던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고래에게 삼켜졌던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농부들은 하나님께 딱 일 년만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날씨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딱 일 년만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후, 날씨는 농부들이 원하는 대로 변했습니다. 농부들이 비를 원하면 비가 내렸습니다. 해를 원하면 해가 비추었습니다. 바람을 원하면 바람이 불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가을이 되었습니다. 곡식이 너무나 잘 되었습니다. 농부들은 환호했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탈곡을 하려는데 알맹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농부들은 하나님께 왜 알맹이가 하나도 없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들의 항의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비를 원할 때는 비를 주었다. 해를 원할 때는 해를 주었다. 바람을 원할 때는 바람을 주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알맹이를 달라고 구하지는 않았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농부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지극히 이기적이고 또 제한적인 지식으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탁월한 능력과 지혜로 당신이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리려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적당한 고난 곧 자극 없이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빙점의 저자인 그녀三浦綾子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했습니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물네 살에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무려 십삼 년 동안이나 누워서만 지냈습니다. 거기다 결핵균이 척추로 침투해서 발생하는 질환脊椎caries에 시달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후에도 직장암과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말 한마디로 무수히 많은 환자를 고쳤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 왜 그런 흉악한 질병에 걸려서 고생하느냐는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 하지 못할 성소가 있고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그 분이 계신다.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수 조차 없다.
고통과 불행의 조건들을 제거하여 주심도
하나님의 기적이며 큰 은혜이지만
이보다 더 크고 값진 은혜는
고통과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감사하며
주님을 동일하게 신뢰하는 것이다.
고난 자체가 축복은 아니다.
고난을 통하여 만나는 은혜가 있기에
고난은 유익이며 축복이다.
“나에게 지금의 고난이 없었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러기에,
고난 있음에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 할 수가 없다.
이것이 고난을 통하여 만난
하나님의 거절할 수 없는 은혜이다.
자신은 고난을 통해서 기도가 깊어지고, 인생의 의미가 깊어졌다고 노래했습니다. 자신이 평생 달고 살았던 각종 질병은 고난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노래했습니다. 무엇보다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다고 노래했습니다. 그水野源三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산과 들을 뛰어 다닐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해 여름 유행했던 홍역에 걸렸습니다. 고열이 내리고 겨우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머리만 커질 뿐, 몸은 자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흐느적거리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에 한 목사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가게로 나갈 때마다 성경을 펴두었습니다. 스스로 책장을 넘길 수 없는 그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a)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함께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시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괴롭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도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그렇습니다. 그가 만일 괴로운 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괴로운 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실 정도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괴롭지 않았더라면, 모진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더라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인 동시에 심리학자인 그Karl A. Menninger는 “소유보다 삶의 자세가 (훨씬)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람과 파도가 항해를 도와주었습니다. 깊고 광활한 바다를 무사히 잘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풍성한 화물을 싣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많은 재물이 주어졌습니다. 날씨가 도와주었습니다. 땅이 풍성한 산물을 냈습니다. 많은 작물을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성공이 이어졌습니다. 하는 일마다 결과가 좋았습니다. 성공한 사업가라는 이름까지 얻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항상 건강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항상 행복했습니다. 항상 기뻤습니다. 찬양이 끊이지 않고 흘러넘쳤습니다. 이제까지 살았던 가장 훌륭한 성도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칭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시30:6)라는 외침에 따르면,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하게 되자 교만했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형통하게 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현재의 형통을 흔들림 없이 유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지금보다 큰 형통을 이룰 수도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했던 자신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모든 일들이 어떤 문제도 없이 순탄하게 돌아갈 때 조심해야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형통보다 위험한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하게 긴장할 수밖에 없는 고난을 의도적으로 허락해 주시는 이유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은혜입니다. 긍휼입니다. 사랑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결단코 잊지 못할 가장 풍요로웠던 자리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친 모리아산이었습니다. 요셉에게는 한기가 올라올 정도로 싸늘한 지하 감옥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생사의 고비를 넘긴 나일 강이었습니다.
룻에게는 허리가 부러질 듯 아프게 이삭을 줍던 밭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겟세마네 동산의 차가운 바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당신이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위대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고난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고난이 역사상 단 한 명뿐인 그들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에게 있어서 고난은 자업자득입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받아도 싼 고난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정쩡하게 당하는 고난은 없습니다.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은 없습니다. 온당치 않게 당하는 고난은 없습니다. 부당하게 받는 고난은 없습니다.
오늘의 저와 여러분 역시 알게 모르게 당해야만 했었던 크고 작은 고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꼭 필요하고 또 적당했던 고난들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고난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와 여러분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는 적당한 고난이 진짜 축복입니다. 고난에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공의로우십니다. 전지全知하십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죄도 없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다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는지 아느냐고 묻곤 합니다.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만 보상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영원한 나라에서도 쉬지 않습니다. 의로운 자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십니다. 불의한 자들은 영원한 저주와 죽음과 지옥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리십니다. 심신을 견디기 힘든 한계로 몰아가는 혹독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기보다는 오히려 전심全心으로 환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더 없는 축복으로 이어질 고난의 한 복판으로 거침없이 뛰어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던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적당한 고난을 당해내고 보니 저주라기보다는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더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삶, 고난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영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일으켜 세워주는 복된 삶, 고난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없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복된, 무엇보다 허락하신 고난의 배후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야말로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