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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21 2019년 가을호(통권 50호)
기획특집 ‘50인 50색’에 부치는 평설
한국 시단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 이승하, 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수
계간 《시조21》이 지령 50호를 맞아 특집을 마련하였다. 창간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등단한 29명과 2010년부터 지금까지 등단한 21명에게 시조를 2편씩 청탁하였다. 대표작 1편과 최근작 1편을 청탁해 실었으니 너무나도 흥미롭고 멋진 특집이다. 19년 동안 시조시단에 등단한 수백 명 시인 중에서 편집위원들이 추천한 50명으로부터 대표작을 받았으니 근년에 등단한 ‘젊은’시조시인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100편의 시조를 한 달 내내 읽었는데 기분이 흡족하지 않고 많이 답답하였다. 《시조21》에서는 근년에 등단한 뉴리더들의 작품경향을 분석해 달라, 대표시인의 대표작에 대한 해설을 해 달라,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달라고 청탁서에다 세 가지 부탁을 했다.
작품을 되풀이해 읽으면서 필자는 이런 유혹에 시달렸다. 100편 중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이 그래도 10편은 되니 이들 작품에 대한 칭찬의 글을 쓰자. 그럼 10명은 기분이 좋을 테고 나머지 40명은 서운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게재된 시조시인들과 이번 호를 읽을 동료시인들 혹은 독자들에게 내 글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시집 뒤에 들어가는 해설이나 발문이라면 또 모르지만 한국 시조시단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글을 쓰고 싶다. 그러자면 방법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덕담을 하지 않고 개선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편집자님과 시조시인 여러분, 그리고 독자 제위의 양해를 미리 구한다.
여러 해 전부터 시조에 대한 평을 쓰다 보니 시조시인들이 모여 있는 행사장에도 간혹 가게 된다. 다들 의욕이 충천하고 자신감도 충만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시조전문 문예지가 많이 늘었고 시조집이 제법 많이 나오고 있다. 시인 중에 시조를 쓰는 분들이 꽤 되고, 문학평론가 구중서 같은 분도 시조집을 몇
권 냈다. 양적인 확대가 질적인 발전을 담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오늘날, 시조 전문지가 아니더라도 꽤 많이 시조가 발표되고 있지만 예전의 이호우와 이영도, 김상옥과 정완영 시인의 작품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 안 나오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이 나의 기우일까 착각일까. 시조전문 문예지가 많이 발간되다 보니 등단자의 수가 부쩍 늘어났다. 20대, 30대의 젊은이도 시조도 등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혹시 시조작품이 하향평준화된 것은 아닐까. 이 또한 기우이거나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왜 이런 밝지 않은 전망을 하게 되었는지 지금부터 말해보려고 한다. 쓴 시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 다들 수상경력도 시조시단의 경력도 화려하다. 시조집을 여러 권 낸 분도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시조시인도 아니다, 오직 시조시단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몇 마디 고언을 드려야 하니, 용서와 이해를 함께 구하는 바이다. (작품이 몇 수가 되든 행을 다 떼어 쓰는 경우가 있는데 평문이니 편의에 따라 붙이기로 한다. 이 또한 양해를 미리 구한다.)
1. 자유시와 분간이 안 가는 시조가 많다
시조시단에 엇시조와 사설시조 쓰기가 유행병처럼 번지다가 지금은 주춤한 상태다. 시대에 대한 비판과 인간 풍자의 기능을 할 필요가 있어서 창작된 것이니 만큼 엇시조와 사설시조는 그 기능을 이미 조선조 말에 다했는데 지금 이 시대에 부활한 것이 시조의 현대성 제고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잘 못된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에 읽은 100편 작품 중에는 그런 유의 자유시풍이 없어서 다행이다. 조선조 후기에 성행했던 엇시조와 사설시조 중에 우리가 기억할 만한 수작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래 작품은 파격도 실험도 아니라 어색하기만 하다. 특히 운율의 측면에서 시조라고 할 수 있을지.
물들 가지도 없이 죽었으나 살아 있고
살아 있는 것들 사이 죽어있는 거 같은
오 헨리, 저는 진짜인가요? 저는 가짜인가요?
너무 얇은 이 소설 대단원을 바꿔줘요
불운한 주인공의 창문하나 없어도
저는요 일엽편주면서 흘러가지 못해요
해피엔딩은 식상하고 불멸은 비현실적이죠
늙지 않고 피도 없는 모조품은 신물나요
둥그런 묘혈 가득 찬 달의 뒤로 갈래요
-「마지막 잎새」 전문
이 시조는 모조품 잎새의 독배처럼 들린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짜 같은 모조품 하나,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조품들. 그래서 화자는 늙지도 않고 생기도 없는 자신이 싫다는 게 아닐까? 모조품에게는 “불운한 주인공의 창문하나 없”지만, 진짜 마지막 잎새에게는 그 창문이 있었다. 그래서 모조품은 오 헨리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자신을 소재삼아 더 많은 이야기를 꾸며 내고, 대단원도 바꿔 달라고 하는 것 같다.
형식상의 특성을 살펴보자. 첫째수의 종장이 완전 파격이다. 3/5/4/3이 정격인데 이 작품은 3ㅣ7ㅣ7이다. 세 번째 수는 종장의 자수를 3/5/4/3에 맞추었다. 그러나 자수만 맞을 뿐 운이 전혀 맞지 않다, 그리고 각 수의 중장은 초장과 대구를 이루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허리 역할을 하면서 종장으로 배턴을 넘겨주는 역할를 하는데 “늙지 않고 피도 없는 모조품은 신물나요”는 그렇지 않다. 오 헨리의 명작 단편 「마지막 잎새」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시구에 이르러 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게다가 애잔한 슬픔을 지닌 소설을 읽고 난 이후 독후감 조로 쓴 시조인데 “너무 얇은 이 소설”해피엔딩은 식상하고 불멸은 비현실적이죠“, 늙지 않고 피도 없는 ”모조품은 신물나요”등 어투가 시종 비아냥거리는 조다. 형식도 그렇지만 내용도 공감을 주지 않고 불쾌감을 제공한다. “불운한 주인공의 창문 하나 없어도”도 문장이 아주 어색하다, 시조가 시조답지 않으면 자충수를 놓는 격이 된다.
때론, 독기 품은 숨겨 둔 칼날이었다가
세상 다 녹일 듯한 자애의 모습으로
물렁뼈 붉게 자라는, 더 붉게 말 「言」들이 자라는
-「태양의 혀」전문
초장을 보면 ‘칼날’의 수식 어구는 2개, “독기품은”과 “숨겨 둔”이다. 혹시 “ 독기 품고 숨겨둔”을 잘못 쓴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 표현에서 독기는 스스로 품는 것이고 숨겨 둔 것은 누군가 칼날을 숨겨 둔 것이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적절한 표현이 아닌 것이다. “세상 다 녹일 듯한”과 “자애의 모습으로”는 연결이 잘 되는가? 빛의 변모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듯하지만 비유법이 몹시 어색하다. “세상 다 녹일 듯한 자애의 모습으로”라니, 태양 혹은 태양 같은 존재를 아무리 상상해 봐도 이 시구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해양의 혀’라고 하면 홍염(紅焰)을 연상하게 되지만 이 시의 제목이 왜 ‘태양의 혀’여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르겠다. 종장에 가서는 태양의 혀가 물렁뼈를 ‘붉게’자라게 한다고 표현한다. 물렁뼈는 아이의 뼈인가? 태양 같은 어머니가 때로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때로는 엄한 꾸지람으로 아이를 자라게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붉게’ 자라게 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자수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써 넣었을 뿐, 언어를 낭비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더 붉게 말「言」이 자라는’ 이라는 결구도 나로서는 무리수라고만 생각된다 초장 2/4/3/6도 시조의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수 파격이 실험정신일까? “때론”부터 “자라는”까지가 하나의 문장이고 그 문장도 미완이다. 아무리 현대시조가 자유시와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손 치더라고 이런 식의 파격은 실험의 아니라 자충수다.
2. 구태의연한 내용의 시조가 많다
독자가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을 투자해야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다 돈을 투자하기도 한다. 원고료를 안 주고 정기구독으로 대체하는 문예지가 많은데 그렇게 받아 보는 문예지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실리지 않으면 원고료를 빼앗긴 기분이 든다. 독자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 시조를 읽는데 공감, 감동, 충격, 깨달음 중 뭐 하나 제대로 얻을 수 없는 시조를 필자는 ‘구태의연하다’고 표현한다.
딸인 내가 딸을 낳고
딸이 딸을 낳고
도도히 흐르는 물결
은총의 나날이다
꽃햇살 탱글거리며
이 방 저 방 구른다
아기가 웃는다
천사처럼 웃는다
몽실이 우리 강아지
두 손을 내밀면
허술한 내 가슴에 안긴다
두근두근 아찔하다
-「기도가 더 필요해」 전문
이시의 화자는 손녀를 보았다. 너무나도 기뻐 세상 온 천지가 은총의 나날이다. 아기는 천사처럼 웃고(천사가 잘 웃는가?) 화자가 두 손을 내밀면 “허술한 내 가슴”에 안긴다. 이 기쁨의 오래 가기 위해서라면 기도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이리라. 시의 소재도 주제도 나무랄 데가 없다. 따듯하고 밝고 행복하다. 그런데 시조를 읽고 나면 어디선가 많이 봐온 장면을 한 번 더 본 것 같아진다. 그뿐, 곧 잊힐 시조 한 편을 시간 들여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뻔한 이야깃감, 뻔한 표현은 생명력이 없다고 슈클로프스키, 로만 야콥슨 같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 이론이다. 대상에게 지나치게 밀착한 나머지 시인은 새롭게 보는 ‘눈’을 가질 수가 없는 모양이다. 소재-주제-표현 3박자가 잘 맞아야 좋은 작품이 될 터인데 이 가운데 둘은 충족시키되 한 가지가 부족하니 이렇게 구태의연한 시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만 가득하다
그렇다고 설겅설겅 삼키면 체하는
오늘도 꼭곡 씹어서 잘 먹어야 소화되는
-「나이」 전문
이 시조는 ‘나이를 먹는다’에 주목하여 그것으로 초, 중, 종장을 끌고 가고 있다. 이러한 말 유희는 독자를 유쾌하게 하지만 그 이상의 성취는 보여줄 수 없다. 나이를 헛되게 먹으면 안 돼, 나잇값을 해야지, 나이 헛먹었구나 하는 말이 갖고 있는 함의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간 것이 없다. 누가 이 시조를 읽고 ‘이런 새로운 제품 발명을 하다니’, ‘나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야’라고 생각할까?
내 몸이 다 닳아도 세상 모든 때 씻으리
씻고 또 씻어 내도 끝이 없는 잡다한 때,
비비고 문지를수록 거품으로 감싼다
-「비누」 전문
우리 모두가 비누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비누의 기능이 때를 벗겨내는 것임을 누가 모르는가. 비누는 비비고 문지르면 거품이 일어난다. 이 또한 상식이지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시의 대상이 사물일 때는 더더욱 상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데 「비누」 는 독자의 기대지평 아래에 있다. 표현 현상을 관찰하는 데 그친 이 시조의 한계가 몹시 안타깝다.
푹푹 곪은 종기를 짠다 해야 솟아라
붉은 대지를 뚫고 하얀 해야 솟아라
온 밤을 잠 한 숨 못 자고 펄펄 끓는 날 지켜
해처럼 방긋 웃는 날 보자던 엄마처럼
밤새 뜬 눈으로 성난 너를 지켰다
캄캄한 어둠 뚫고 오르는 해처럼 솟아라
날 지킨 엄마는 아니 오고 개만 짖었다
뾰족한 널 달래느라 내 머리 다 희었다
울음을 꾹꾹 눌러 참는다 둥근 해야 솟아라
-「오늘도 해가 뜬다」 전문
누구의 어떤 시와 닮은 데가 있지 않은가, 물론 엄마와 화자의 인연의 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므로 주제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대상 사물이 ‘해’라면 시어 운용을 좀 더 새롭게 해야 ‘후대에 남을 시조’가 되지 않을까. 시인은 심상하게 써 냈지만 독자의 자격으로 이 시조를 읽는 이들은 그 누구의 시를 먼저 떠올릴지언정 이 시조의 독창성을 인정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사한 구절이 많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치열한 싸움의 결과로 시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습에 의해, 습관에 따라 시조를 짓는다면 우리 시조의 앞날이 결코 밝을 수 없다. 한국 시조시단이 이제 봄날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지만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고 시를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시가 마냥 길어지고 난해해지고 산문으로 가고 있어서 그러지 시조를 읽고 시 낭송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시조가 이와 같이 ‘구태의연함’을 벗어나지 못하면 시조의 앞날이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
3. 고색창연한 시조가 많다
시조의 역사가 길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시작하는 시조를 쓴 이조년(1269~1343)의 생몰연대를 보면 시조는 13세게 때부터 이 땅에서 시작된 아주 중요한 시가 형식이다. 지금도 시조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으므로.
‘하이쿠’를 완성시킨 마츠오 바쇼는 1644년에 태어나 1694년에 타계하였다. 400년 정도 역사가 더 긴 것이 우리네 시조다. 그런데 하이쿠는 세계 어디를 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데 시조는 구미 몇 개 나라를 제외하고는 존재감이 없다. 아마도 이 이유 때문에 민병도 시조시인이 사단법인 국제시조협회를 만들고 청도국제시조대회를 개최한 것이 아닐까. 민병도 시인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 시조 자체의 질적 함량이 높아져야 한다.
그와 아울러 이 땅의 선각자들이 왜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했는지 가슴에 새겨 볼 일이다. 프로문학의 거칠음과 난폭함이 시단을 휩쓸자 그에 대한 반발로 시조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동아일보>에 1932년 1월 23일부터 2월 4일까지 연재된 이병기의 논문 「시조는 혁신하자」는 이 땅의 시조시인들의 가슴에 새겨야 할 내용이다. 그는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비교하면서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 하였다. 생활의 실감이 나는 시조를 쓰자. 소재의 범위를 넓히자, 격조에 변화를 주자, 단형시조만 고집하지 말자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런 것을 주장만 했던 것이 아니라 고시조에서 볼 수 없었던 세견된 감각과 현대적 감수성을 그 스스로 시조작품을 통해서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병기의 이 글이 나온 것이 1932년 1월이었으니 근 90년 전이다. 자, 그런데 이병기의 후예인 이 땅의 시조시인들은 가람이 90년 전에 한 말을 새겨 듣기는커녕 시조 혁신의 반대 방향으로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달 위에 다시 반달 물레 위에 올려놓고
엄지로 꾹꾹 눌러 한 몸으로 꿰매는 손
해종일 걸어온 꿈길, 달이 하마 돋는다
비바람도 등을 돌려 눈물 걷힌 하늘가에
천삼백 도 장작 가마 혀가 파란 불춤 속에
서로를 품안에 들여 포개보는 두 어깨
첫새벽 길을 가듯 눈길마다 낯선 시간
저무는 노을 한 장 지도에서 사라지면
빈 하늘 환하게 밝힌다. 조선의 흰 달 하나
-「달항아리」 전문
그다지 흠결이 없는, 완성도 높은 시조다. 시조의 품새를 착실히 익힌 분의 작품이라 그야말로 ‘잘 빚어진 항아리’(클리언드 부룩스)다. 하지만 물레 위에 반달, 꿈길, 하마, 하늘가, 조선의 흰 달 등 이 시조를 이루고 있는 시어는 대단히 낡았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든다. 전통문화, 전통적인 것, 우리 고유의 것 등이 시의 소재가 될 때 오히려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것들에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이 시조를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과연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달항아리가 많이 생산된 것은 사실이지만 달항아리가 “조선의 흰 달 하나”가 됨으로써 21세기의 시조가 아니라 19세기의 시조가 되고 말았다.
오래전 비바람이 들락거린 자국 같은
장독대 뒤쪽으로 금간 벽이 불룩하다
쪽창을 열어젖히면 보일까 그 옛날들
담을 허문 한 뼘 땅 풀씨들이 날아와
개망초, 달개비며 나팔꽃, 엉겅퀴들
활짝 핀 풀꽃 나라가 궁궐 한 채 세웠다
-「풀꽃 나라」 전문
이 시조도 졸작이나 태작은 아니다. 다만 시인이 다루는 시간대가 꼭 이렇게 “그 옛날들”이어야 하는 것인지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장독대, 쪽창, 허문 담, 궁궐로 이루어진 이 시의 공간에 대새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10대와 20대 독자는 공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농촌에서 자란 젊은이라면 이 시의 의미를 납득하겠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라면 시의 전반적인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되 실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재작년인가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기사 이세돌을 완파하였다. 그 알파고의 몸체에는 수많은 데이터(기보)가 입력되어 있어서 이세돌이 여기에 바둑돌을 두면 저기에 둠으로써 이길 수 있었다. 이런 알파고를 이긴 것이 알파고 제로다. 데이터를 입력하지 않고 스스로 대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했더니 알파고는 알파고 제로에게 100전 100패를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이런 시대다. 에이즈라는 신종질병이 우리 귀에 처음 들려온 것이 1981년이었다. 지금까지 에이즈로 몇 천만 명이 중었다. 광우병, 사스, 조류독감, 신종플루, 구제역, 메르스......또 어떤 치명적인 병이 우리를 위협할까? 문명은 지금 가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있는 4대 강국은 줄다리기에 정신이 없고 신종 바이러스가 우리의 목숨을 또 위협할지 모른다. 그런데 시조를 보면 이 세상을 벗어난 무릉도원에서의 음풍농월 같다. 세속의 온갖 갈등과 부조리와 권모술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에서 살고 자연에서 노닌다.
잔칫상 받은 참새 배불리 먹었다고
짹 짹 짹 노래하며 어깨춤 덩실덩실
정 많은 허수아비는 주인 오나 살핀다
-「황금들녘」 전문
초, 중, 종장 어느 한 장도 시적인, 혹은 시다운 표현이 없다. 허수아비를 의인화한 점은 좋다. 정 많은 허수아비는 참새가 아무리 와서 곡식을 쪼아 먹어도 별 상관하지 않더라는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이 시조에서 생명사상을 읽어내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동심의 세계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마음이 순순함, 정경의 아름다움, 세계관의 고결함을 상찬할 수 있을지언정 이 작품을 두고 훌륭한 시조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짧다고 해서 다 촌철살인이고 정문일침은 아닌 것이다.
자, 이 글의 필자는 어떤 시조시인의 작품을 예로 들면서 왜 좋은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않았다. 그 덕담이 그분께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예로 든 시조를 쓴 시인들은 자존감이 많이 추락했을 것이다. 기분은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 같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 뒤에 좋은 시는 태어난다. 누군가가 던져주는 찬사는 시인을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쓴 말은 시인을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좋겠다. 한국 시조시단이 지금 발전을 멈추고 답보상태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조시인 여러분이 새로운 표현기법과 주제의식에 대한 갈망이 깊어져 우리 시조의 질적 함량이 높아지기를 바랄 뿐 다른 마음은 조금도 없음을, 진정 어린 마음으로 고언을 했음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
-이승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당던, 시집「아픔이 너를 꽃 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으로 경기문학대상수상, 시조평론집「향일성의 시조시학」으로 인산시조평론상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하과 교수
첫댓글 나이가 들면 어느 누구도 고언이나 진심어린 바른 말을 해 주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너무나 쉬운 우리의 속담에 '벼는 무거울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뼈 아프게 잘 읽고 저 자신을 잘 다스리겠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보다는 바른 평을 읽게 되어 간만에 바른 세상에 사는 거 같은 기분입니다.
어제 저녁 한 자 한 자 읽어보면서, 좋은 비평을 해 주신 분께 감사드리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도 생각해보고,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조가 더욱 사랑스러워졌습니다. 이렇게 귀한 말씀을 해 주시는 분이 있다는 건 그만큼 소중한 시조이기 때문이겠죠
그렇군요,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밑줄 치며 읽어 봤습니다.
신중한 글쓰기와 더불어 열린 사고와 시선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비평이 나에게 하는 말임을 무섭게 받아들입니다. 더 긴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