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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이해. 행 17;10-34. 2014. 6. 4/11
* 각자가 보고 체험한 일본과 일본인 이해
*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2차 전도 여행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바울이 안디옥을 출발하여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을 거쳐 아테네에 이르렀을 때의 사건과 바울의 설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사역 이후 바울은 고린도와 겐그리아와 에베소를 거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1.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배경(17:16-21)이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선교를 하다 봉변을 당하고 베뢰아에서는 환대를 받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베뢰아까지 와서 바울을 괴롭게 하자 바울은 아테네로 먼저 피신합니다. 그런데 동행자였던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을 좋아 뒤에 거기에 당도하는 동안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아테네) 시내를 이리 저리 구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온 아테네 시내가 우상 천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이 온 도시에 가득한 것을 본 바울은 마음 속에 의분이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에게, 시장 거리에 나가서는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에피큐로스 학파(쾌락주의자들)와 스토익 학파(금욕주의자들) 사람들과도 쟁론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로써 바울을 지식이 없는, 그저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섣부른 조각 지식이나 주서 모은 사람이란 뜻의 “말장이”라고 부르면서 조종했습니다. 혹은 바울이 이상한 종교를 퍼뜨리는 사람인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인데 그들은 남성신인 예수와 여성신인 부활(아나스타시아)을 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고대 아테네는 민주주의와 철학이 탄생한 곳입니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했고 사실상 현대 서구의 정신 세계를 이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정치적으로는 남 유럽과 소 아시아를 다 지배했지만 문화는 그리스도, 특히 아테네의 고급 문화를 자기들의 것으로 받아들여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했을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큰 도시는 상업적으로 번성했던 고린도였지만 문화와 철학의 도시로서의 아테네의 명성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테네가 바로 얼마 전 올림픽이 열렸던 현재의 그리스도의 수도 아테네입니다. 당시 이들은 지식욕이 대단해서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 욕구가 얼마나 컸던지 누가는 이들은 아테네 사람과 그곳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까지 가장 새로운 것을 듣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일에도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이들에게 이끌려 아레오바고에 도착하게 됩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테네 시에 있는 지역 이름인데 본래는 아레오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명한 법정이 있었습니다. 소크리테스도 오래전 여기에서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을 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인사동하면 옛 골동품 거리를 연상하듯이, 아레오바고 하면 법정이 연상되는 곳이었습니다. 350년 전 그 자리에 소크라테스가 섰던 바로 그 자리에 바울이 서서 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연설하는 것이 오는 본문 내용입니다.
2. 아레오바고 설교의 내용(17:22-31) 바울은 먼저, “아테네 시민 여러분!”(문자적으로는 아테네 사람들이여!)이라고 서두를 꺼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이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에 분노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것을 우회적으로, 또 가치중립적으로 “여러분들은 모든 일에 종교성이 많으시군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종교에 관심이 많은 것을 그렇게 나쁜 뜻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이 돌아다니면서 이들이 섬기는 제단과 성전을 보니 거기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쓴 제단도 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종교성이 많으면 수많은 기명의 신도 모자라 혹시 모르는 신이 있을까봐 이런 글을 제단에 새기어 넣었겠습니까? 바울은 상황을 기회로 삼는 일에 명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쓴 제단의 글씨를 보고 “그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서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약 성서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의 창조자요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을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른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연히 땅과 하늘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장 1절 말씀의 해설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바로 기본의식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만든 우상 앞에 절하는 모든 사람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던 주안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2000년 전에 설교한 그 내용을 바로 우리 이웃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천지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당시의 일반 종교와는 특별히 전통적인 유대교와도 다른 특별한 개념으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이런 개념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신약입니다. 요한복음에도 이제는 성전이 아니라 진실과 성령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데반도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 7:48)이라고 합니다. 바울도 바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손을 만든 각종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 진짜 신은 그런 곳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성전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냈고, 많은 타락한 이방 신전에는 창녀들이 사제를 하면서 성전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전중심의 성직자 중심 교회는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탈북자 신자는 어느 한국 교회에 와서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섬기는 것과 교회에서 목사를 섬기는 것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성전, 성직자 중심의 교회는 교직자, 교회 혹은 교회 건물이 우상화되기 쉽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점을 갈파하고 주님은 사람이 만든 장소에 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가지 더 바울은 하나님은 용왕님이 예쁜 처녀를 탐내서 처녀를 바치면 노를 풀듯이 사람이 의해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하등 종교는 하나님의 개념이 용왕님 개념입니다. 신께 정성을 다해 빌고, 아부를 하고, 재물을 갖다 바치면 신이 감동해서 사람에게 복과 재물을 준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신께 정성을 다하지 않고 좋은 것을 가져다 바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난과 저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신관은 이방 종교가 많이 가지고 있고, 기독교 이단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신관입니다. 이단들은 교리에 대부분 저주의 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잘못 보이면 큰 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런 신은 사람에게 정성과 사랑을 받아서 그것을 먹고 사는 신입니다. 신도 외롭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것까지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아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시고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입니다(25절). 하나님은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시지 사람의 정성을 먹고 사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가 믿는 신관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시고, 자발적으로 주시고, 사랑을 되돌려 받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또 다시 이웃에게 전달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바울은 몇 가지를 더 말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절기]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26절) 이 하나님은 한 사람(아담)에게서 모든 사람을 근원케 하셨고, 온 땅에 거하게 하신 분도 이분이고, 절기와 거주 지역을 정해주신 분도 이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주의 경계를 정해주셨다는 것은 구약에 있는 사상입니다(신 32:8). 곧 일상 생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을 따라 보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더듬어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20, 즉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와는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하지만 로마서는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뜻에서 말한 것이고,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연설을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데 하나님의 존재가 그렇게 먼 것이 아니고 우리 생활을 주관하는 분이며 그것을 인정하면 곧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28절) 바울은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일상 생활 속에서 오늘도 하나님으로 인해 내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이것을 안다면 그리스도인이고, 이것을 삶 속에서 자주 느낀다면 좋은 그리스도인이고, 매 순간마다 느낀다면 고도의 영성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로마 우리가 신의 소생이고 그를 힘입어 산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 시인들이 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신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그리스인의 개념에도 신이 사람을 만들었고, 신에 의해서 사람이 산다는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절)라고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크리스천의 관점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시대를 구분합니다. 무지의 시대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이후의 시대인데, 무지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지만, 이제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선포된 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라는 말을 강조하여 말합니다. 이제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회개하라!”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와서 첫 번째로 말한 말입니다. 이제는 회개해야 할 시대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증거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증거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해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회개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소개하다가 마지막에는 부활의 예수를 증거함으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행한 바울의 설교입니다. 여러분 예수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예수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과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역사한 하나님의 사역을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방신의 개념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고, 예수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도에 대해서 배울 바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관심사로부터 하나님과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상담도 내담자 중심으로 하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전도도 피 전도자 중심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피전도자의 관심사로 하는 것이지 피 전도자의 욕심과 사욕을 그대로 인정해주면 안됩니다. 최종적으로는 바울이 회개를 촉구했듯이 우리도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이것이 다른 종교가 믿는 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을 지금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서 홀로 만족하시고 베푸시지, 어떤 인간의 정성에 의해서 삶을 사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도 만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분이 주시는 사랑을 받아 누리고, 은혜에 감격하여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다는 평범하지만 놀라운 진리입니다. 은혜에 대한 깨달음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 생애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순간 순간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또 한 가지 우리가 여기서 깨닫는 중요한 진리는 이제 성전, 성직, 성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이 만든 어떤 건물이나, 의식에 따라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 하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선교현장에 대한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선교사역을 감당해야될 이 일본의 이해가 무엇 보다도 중요합니다.
1. 일본의 지리적 환경, 지리적 환경과 기후는 문화에 필연적인 영향을 주며, 인간은 환경과 시대에 순응하여 합리적인 생활 방식을 취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풍토는 몬순지대에 속하여 더운 열기와 높은 습도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수용적이면서 또한 폭발적이고 전투적이다. 남북이 길게 뻗어 적도 같은 열대 기후와 시베리아 이상으로 눈이 쌓이기도 하는 나라다. 또한 장마와 태풍과 지진 등의 천재지변도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다. 이런 계절적인 환경과 변화에서 게으름뱅이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근면하고 성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일본인의 의식구조, 일본인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짓는 도덕 원리라는 것은 신 앞에서의 양심이라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치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사상적 잡거성, 무한 포용성, 무한의 관용등의 사상적으로 무절조를 볼 수 있다.성격상 대립되는 양면이 아무런 모순도 갈등도 없이 사람들 속에 잠재하고 있으며 이것을 사람들은 지구의 씨줄, 날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인은 집단주의다. 개인의 존재목적을 집단을 위한 것처럼 집단속에 개인을 소속시키고 남을 의식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타인과 다르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바로 이런 성향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 집단의식은 타문화나 타 집단에 대해서는 매우 배타적이다.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결단까지도 자연발생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어떻게 된거야?” 하고 물으면 “그렇게 되고 말았어‘, 이것이 일본민족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서 소극적 태도요 자연존재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면 후스마(장지문)은 일본만의 독특한 자폐물이다(자물쇠).후스마 자체는 장벽으로서의 기능이 거의 없고 특히 소리는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나 후스마는 그 자체로서 장벽인 것을 서로 간에 인정하기 때문에 후스마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를 엿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후스마가 닫혀 있을 때 이것이 입실 거부인지, 신호를 하고 들어오라는 것인지, 단순히 바람을 막으려고 닫아 놓았는지 이런 것을 그 상황에서 본인이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비밀이 없으면서도 비밀이 있는 것이 일본 사회이다. 이런 것이 서구 사람들에게는 적응하기 어려운 문화의 장벽인 셈이다.
3. 일본인 성격, 일본을 이해할 때 친절하고 근성이 있고 예의가 바른 것을 장점으로 지적하고, 잔인하고 기회주의적이며 간사한 것을 단점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루스 베네딕토의 "국화와 칼"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국화를 재배하는 예술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칼을 쓰는 무사를 존경하는 것을 통해 이중적인 성격이 아무런 문제없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국화와 칼" 에서 국화는 일본인의 성격이 온순하고 심미적이고 예의가 바르며 순응을 잘하고, 칼은 호전적이고 군국주의적이며 오만하고 완고하며 보수적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런 양면적인 요소가 일본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전통적인 봉건윤리가 유지되면서 국가의 통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일본인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는가에 놀랄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에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서 외국인들은 일본에 살면서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4. 가정과 교육, 7살까지의 어린아이 속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성선설의 사고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나쁜 것은 어릴 때부터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유아시절에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한 번 싸우면 인간관계는 영원히 끝내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남보다 우월해도 안되고 대인관계에서 손해를 봐도 해를 끼치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가정의 대표는 부친이기 때문에 독단적이고 심하게 행동해도 식구들은 반대를 할 수 없으며, 부부관계도 한 번 심하게 싸우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 부친이 사망하면 그 권한은 장자에게 돌아가며 다른 형제들은 장자에게 반항할 수 없다. 이것은 가족 단위를 개인에 두지 않고 가족전체의 체면유지에 더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1947년에 남녀평등에 관한 법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제약이나 편견, 차별이 현저하다.
5. 사회관계, 한국인은 개개인을 콩알에 비유한다면 일본은 밥알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사회구조가 개인적이기 보다는 집단적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래서 늘 남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다. 일본인은 남들과 다르기보다는 동일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고, 남들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여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이같이 집단을 앞세우며 의사를 표현할 때에도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집단 우선주의에 의한 것 보다는 개성있는 내면성의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보여진다.
6. 배타적인 민족성, 일본인은 타문화나 타민족, 국가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다. 직장의 상하 관계는 형제적인 친근감을 느끼지만(윗 사람을 아니끼, 더 윗 사람을 오야붕), 일단 그 집단 바깥에 대해서는 늘 경계적이고 배타적이고 자폐적이고 획일적이다.
그래서 외국 종교나 어떤 사관이 일본에 토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외국 여자가 일본인과 결혼을 해서 일본에 오래 살아도 일본 사람들은 늘 이 사람을 외국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 일본인으로 귀화를 해도 3대까지 차별을 받는다.
일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할 때 처음부터 외국인으로 자신을 드러내면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감추거나 속이면 일본 사람들은 분노하고 집요하게 괴롭힌다. 강상중 처럼 한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7. 모방과 배타성, 그러나 반대 현상으로 일본인들은 모방을 잘하는 민족이다. 외국의 문물에는 유연하게 대응하되 그것을 소화하기까지는 매우 경계하며, 나중에는 외국형의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민족이다. 이런 현상을 에다유지(会田雄次)는 일본꿀벌과 유럽꿀벌로 표현하고 있다. 유럽의 꿀벌은 일본꿀벌의 집에 들어가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잘 적응하지만, 일본의 꿀벌이 유럽 꿀벌 집에 들어가면 그 집을 허물고 새로운 자기의 집을 만든다고 했다.
일본은 현대화 과정에 교육에 힘을 쏟아 99%의 사람들이 교육수준을 획일화 하고, 창조적인 능력을 배양시켜 이것을 대중생산에 초점을 맞추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성격을 보면 공산주의와 비슷한 mass activism 사회상황이 존재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또한 베네딕토는 일본문화를 수치문화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 사람들의 옛말에 “돌 위에서라도 3년”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차가운 돌이라도 그 위에 3년을 앉아 있으면 그 자리가 따뜻하게 된다는 의미다.
* 종교적인 이해
1. 신 인식, 일본의 종교성은 우주 만물에는 생명이 있든지 없든지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며 그래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조직이나 예배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을 표현하는 단어가 처음에는 “높다” 혹은 “보다 높다” 라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리고 그 위에 “더 높은 존재들” 이 존재하며 그곳에는 이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유일신 사상은 없으며 신들을 “가미가미”로 복수형으로 부르는 경향이 강하다. “가미” 라는 존재는 나보다 조금 높은 “上” 에 불과한 존재이며 이것이 인간관계의 주종에서 “오까미御上” 로 불리운다.
2. 종교관, 일본종교는 일괄적인 인식이나 계통이 없다. 이렇게 종교에 대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사상의 혼잡과 무한한 포용성 때문이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도의식에 참여하고 기독교 진리를 수용하는데 일본 사회에서는 이것이 전연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배교나 개종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모든 생물, 무생물에는 영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조직적인 예배의 형태는 없다.
이사야 벤다산은 말하기를, 일본인에게는 종교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며 일본인은 일본이라는 종교가 있고, 그들은 그 종교의 신도들이다. 일본교란 불교(유교, 도교 포함)+신도+기독교를 혼합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장례식은 불교에서, 초지와 7,5,3은 신사에서, 결혼은 기독교서 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인간학은 있어도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 종교이다. 이러한 불명확한 신개념의 결과는 죄의식이 결여 되어 있고 무책임한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이 사람들의 믿음과 행동, 생활양식은 다양하며 예배의 대상이 매일 바뀌어도 거부감이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신을 섬긴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며 간절한 회개의 개념을 심어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에는 신학이 없고 인간학이 있을 뿐이다.
3. 천황에 대해서, 일본국 헌법 제1조에는 “대 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고 되어 있다. 천황이라는 존재는 일본인에게는 신화적이고 전설적 기원을 가진 종교적인 존재로 신앙이 대상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첫 천황인 진무텐노는 아마데라스 오오미 가미의 후손으로 일본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지만 사실은 꾸며진 이야기이고 그 계보도 가짜인 것이 오래 전에 밝혀졌다.
실제 계보는 대략 10대, 혹은 15-6대 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천황을 신으로 보며, 이등박문은 천황신앙이란 감정체계를 이용하여 국가신도를 통해 국민의 모든 사상을 흡수 통일시켰다. 그러나 2차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그 책임을 추궁하던 중, 천황은 절대 신이 아니고 인간으로 변모된 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사에 책임을 질 일이 없다고 함으로 천황 절대주의는 추락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신앙중심에는 절대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일본인의 신은 인간의 정서를 만족시켜주는 자연신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인간이 피조물이 아니라 신이야말로 인간이 만든 피조물일 뿐이다.
4.신도, 신도는 조상신을 숭배하는 원시적인 종교로 5세기 말경에 유교의 영향으로 일본에 들어와 자리잡았고, 실제적인 신학이 없기 때문에 그 중심에 강조되는 것은
인간을 정결케 하는 것도 도덕적임 면에 두기 보다는 의식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신도는 경전도 없고 교리도 없이 토속신앙으로 내려오다가 12-18세기 경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약화되었지만, 불교를 모방하면서 점점 체계를 갖추고 신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일본의 기독교
1. 기독교의 출발, 포르투칼의 예수스회 소속의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1542년에 인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일본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이름은 야지로 이며 1548년 세례교인이 되었다. 1549년 8월 15일 야지로와 함께 가고시마에 상륙하고 영주의 환영을 받아 포교를 시작했다. 13개월을 머물면서 1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오다 노부나가의 허락을 얻어 1576년에는 교오토의 남반지南蛮寺와 1580년에 安土에 신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30년 후에는 1582년에 15만 여명의 신자에 200여개의 교회당이 세워졌고, 선교사 수는 59명에 달했다. 계속된 성장으로 1590년대에는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30만 신자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열심도 있었지만, 그들이 가져다주는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제후들의 생각과 외국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수용성이 기성종교를 멀리하고 기독교에 매력을 느끼도록 만든 것이다.
2. 박해의 시대, 그러나 1614년부터 1865년까지는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일본은 암흑시대였다. 기독교 금지령과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1619년에는 교토에서 50여명이 화형을 당했고, 각 지역에서 기독교를 탄압하는 작업이 노골화되었다. 도꾸가와 이에미츠는 기독교를 더욱 탄압하는 수단으로
①상소인(賞訴人)- 고발하는 자에게 현상금을 주는 제도,
②5인조연좌제 – 5명을 한 조로 묶에 그 중에 누가 기독교인인가를 감시하며
그 가운데 한 명이라도 기독교인이 나오면 연대책임을 지는 제도,
③후미에(踏み絵) - 예수님 상이나 마리아 상을 새긴 목판, 동판을 밟게 하는 것,
④종문인별개(宗門人別改) - 기독교인이 아님을 신고하고 일 년에 두 차례씩 심문을 받는 제도.
기독교인을 처형하는 방법으로 십자가형에 매달기, 화형 하는 것, 구멍에 매달기, 옥사, 익사, 열탕을 붓거나 그곳에 빠뜨리는 것, 창으로 찌르거나 톱으로 켜는 것, 머리를 쳐서 죽이는 것, 온 몸의 가죽을 벗기는 것 등의 고문과 사형을 행하였다.
1637년, 시마바라 반도의 영주인 마츠구라 시게지(松倉重次)의 지나친 착취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로 인해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고, 12만 명의 대군이 동원되었고 진압하는데 100여일 가까운 세월이 걸렸으며, 수만 명이 관군에 학살당했다. 이 일로 전국에 기독교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렸고 교인들과 선교사들을 무차별하게 처형하였다. 이때부터 나타난 것이 가꾸레 기리시단이다.
겉으로는 불교나 신도 신자로 가장하면서 은밀하게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였다. 1859년에 이루어진 일불 통상조약을 통해 다시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었고, 6년 후에는 나가사키 오우라 천주교 성당이 세워지고 나가사키 부근에는 약 2만 여명의 가꾸레 기리시단(隠れキリシタン)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도꾸가와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초기에 다시 기독교의 박해가 있었는데, 이유는 천황제도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박해는 1874년까지 계속되었다.
3. 개신교의 역사, 1837년으로 모리슨이라는 배를 타고 미국인 선교사 피터 파커와 새뮤얼 윌리엄스가 1831년 태평양 해상에서 난파당해 구조된 일본인들을 데리고 에도에 입항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다시 가고시마로 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돌아갔고 크게 실망한 일본 사람들 중에 일부는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2명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차후에 이 사건은 일본 국내에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고, 1842년에 외국선이라도 일단 입항하도록 허가를 내렸고,
11년 후인 1853년 7월에 미국군함이 우라가(浦賀)항에 입항하고 3일 후에 주일 예배를 선상에서 드렸다. 1854년 3월31일에 일본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고, 이것이 선교활동의 자유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용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개신교의 첫 발은 1859년, 일본에 있는 자국민의 신앙생활을 돕는다는 명문으로 6명의 선교사들이 입국함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도 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사형이 곳곳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숨어서 하거나,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사업으로 교육, 성경번역, 의료 활동을 하면서 자립, 자치, 자전을 위해 일본인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 때 선교사들의 활동은 지나친 개인주의적 신앙과 청교도적인 엄격함이었고, 교회관이 빈약하고 일본 전통문화를 지나치게 무시한 것, 그리고 천주교에 매우 비판적인 것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1865년 11월 4일에 요꼬하마(横浜)에서 일본인 첫 세례신자가 탄생했고, 1872년에는 126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이 해에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등 11명의 신자에 의해 첫 일본인 교회가 탄생하였다.
* 일본의 선교적 현황. 인구 1억2천7백만 정도. 신도 인구 1억 600만. 불교 인구 9천200만. 기독 인구 260만명이나 실제적인 크리스챤 인구는 55만명 정도이다. 미국 갤럽 여론조사는 일본 기독교 인구를 6%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세례와 관계없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생각(통계의 5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각 지역의 교회 형편은, 20-50명 정도 예배드리는 곳이 대부분이고 10명 미만도 적지 않다. 기독교인에 대한 확실한 통계가 어려운 이유. 신도, 불교는 예배하면 신자가 되지만, 기독교(천주교 포함)는 세례를 받아야 신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일본 기독교 연감은 2009년에 109만 2천여 명, 0.9%정도로 규정.
*일본선교의 전망
1. 선교의 대상, 한국 선교사들에게 있어서의 선교현장의 특이성
첫째는 전통적인 선교형태는 지배국가에서 피지배 국가로, 잘사는 나라에게 못사는 나라로, 문명국에서 미개국으로 선교했지만, 한국인에게서 일본선교는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 아픈 역사가 있는 원수의 나라에서 사역하고 있다.
둘째는 단일 국가나 단일 민족에게 주로 복음을 전하는 비해(물론 소수민족이 섞여 있지만), 우리는 두 종류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복수 민족이 아니라, 복잡한 감정과 역사를 지닌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다.
셋째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차별과 박해의 고통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일본인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 재일동포는 아직도 일본인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에서 새롭게 건너온 사람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하고 있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물론 요나가 원수의 나라 니느웨로 소명을 받아 갔지만, 요나의 대상은 이방인이었다.
넷째는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 역사인식, 신사참배 등은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통이 되고 있다.
2. 고립된 선교사들, 한국 선교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이다.
10-20년을 살아도 일본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없는 것. 재일교포와의 정신적 문화적 갭이 너무 깊다는 것. 그리고 선교사들끼리 연합이 안되는 것. 그래서 우리는 고립된 사람들이며, 요나처럼 박넝쿨 밑에 혼자 웅크리고 있는 존재. 교단 다르고 신학교 다르고, 출신지가 다르고, 이웃에 교회가 있어 경쟁 상대가 되고, 한인사역이나 일본인 사역이냐로 우월의식을 가지고 ------.그러나 우리는 특별한 선교사들, 특별한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지금은 앞만 보고 나가지만 한국인으로서 일본 선교사라는 존재는 언젠가는 선교역사에서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3. 선교의 문, 일본에서 선교하려면 반드시 알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존재들이 있다. 그 사역의 대상이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재일 교포이든지. 그것은 재일동포의 존재를 아는 것이다. 왜냐면 그들의 존재는 일본 선교 역사의 시작과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과거가 어떤 것이며, 왜 그들이 일본 사람들 가운데 살게 되었는지, 그들 가운데 살면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알아야 선교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온갖 방법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4. 재일동포라는 의미, 흔히 일본에 사는 한국인, 조선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로는 해방 이전의 시점에서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과 그 자손들이다. 여기에는 특별 영주권자와 귀화인까지 포함이 된다. 일본인으로 부터는 조센진, 한국 사람들로 부터는 반쪽바리로 취급당하던 사람들. 재일동포의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5. 재일동포의 역사,
1> 갑오경장으로부터 시작해서 1923년 관동 대지진까지의 역사.
1876년 조선, 일본의 수호조약 이후 유학생들이 들어옴.
1880년에는 망명자들이 건너옴.
1884년 갑신정변.
1894‐1894 갑오경장
1897년부터 매년 수백 명씩 증가함.
1945년 9월까지의 역사.
2> 1952년까지의 미군통치 7년간의 역사. 미군정은 조선인들의 참정권을 정지시키고, 외국인 등록령을 내렸다.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한 자도 박탈했다. 미군정 당국의 지령에 의하면 조선인을 자유민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하였다. 필요하다면 적국국민으로 취급하라고 하였다. 일본도 조선인이 힘을 합하면 중의원 10명은 나온다. 그래서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
3>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까지의 역사. 그리고 현재까지.
2010년 조사에 의하면 578,495명(연속 90일 이상 체류하는 자 포함). 특별 영주권자 405,571명 유학의 자유가 주어진 1980년부터 기준해서 그 이전에 온 사람들을 올드 커머로 부르고, 그 이후에 온 사람들을 뉴 커머(한국에서는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65을 기점으로)라고 부른다. 2009년 조사에 의하면 일본 국적을 취득자 296,168명이고. 2005년의 조사에 의하면, 598,687명 중에 경남출신 172,343, 경북 출신이 125,392명으로 전체 49.73%. 제주도 출신이 99,421명으로 16.61%. 부산 사람이 25,213명으로 4.21%로 나타났다.
6. 관서지역의 한국, 조선인 분포의 변화(최근 10년간의 변화)
오사카 158,702명 129,992명
효고껜 65,140명 53,14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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