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의 건국과정에 등장하는 여걸 소서노(召西奴)다.
소서노가 큰 아들 비루와 작은 아들 온조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망명해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북부여를 탈출한 주몽은 나라를 세울만한 세력이 없었다.
주몽은 왕실의 말을 훔쳐 타고 북부여에서 망명하여 도망쳐 비류수(沸流水)에 이르렀다.
주몽의 뒤에서는 추격군이 쫓고있었다.
“나는 황천(皇天·천제) 아들이며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다.”
주몽이 다급하게 외첬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추격병을 피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주몽은 이렇게 해서 졸본부여를 찾았다. 오이·마리·협보라는 세 부하만 데리고 부여에서 도망친 그였다.
그 주몽을 달갑게 보는 졸본의 토착세력은 없었다. 처음에 졸본의 토착세력들은 주몽을 무시했다.
다만 토착세력의 대표적인 인물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달랐다. 그녀는 주몽과 손을 잡았고 그와 결혼까지 했다.
그녀는 주몽을 내세워 졸본의 토착세력들을 통합해 나갔다.
주몽이라는 이름 자체가 명사수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뛰어난 무예와 탁월한 지혜가 있었다.
"사냥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한 마리를 잡을 때 화살 하나로 제한 했는데 비록 화살이 적었어도 죽인 짐승은 많았다."
위나라의 <위서(魏書)> <고구려 열전>은 주몽의 지혜와 무예를 격찬하고 있다.
소서노는 전 남편 우태와의 사이에 이미 비루와 온조 두 아들을 둔 과부였다.
그때 주몽은 20~21살의 청년이었다. 소서노는 8~15년 연상이었다.
소서노는 적극적으로 연하의 남편 주몽을 지원하여 끝내 고구려를 창건케 한다.
소서노가 없었다면 스물 한 살의 망명객이 토착세력의 텃세를 극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하기는 불가능했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많았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별한 사랑으로 후대(厚待)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
삼국사기는 백제건국기사에서 고구려 창업에 소서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를 창업한 소서노는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가 찾아오면서 흔들렸다.
고구려는 해씨와 유리가 세운 나라가 아니였다.
분명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온조와 함께 세운 나라였다. 그럼에도 주몽의 후계자는 유리가 된 것이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셨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가진 재산과 노력을 모두 기울여 나라를 세우도록 도왔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여기에서 불필요한 혹처럼 우울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 지방으로 가서 좋은 땅을 선택해 나라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
장남 비류가 어머니 소서노의 뜻을 읽고 동생 온조를 설득하는 대목이다.
소서노는 결국 큰 아들 비류와 작은 아들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망명키로 했다.
‘삼국사기’는 이때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소서노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땅을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주장하자 10명의 신하가 간(諫)하여 말하였다.
"생각하건대 이곳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가 띠를 둘렀고 동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혔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좋은 땅이야말로
얻기 어려운 것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류가 듣지 않고 따르는 백성들을 나누어가지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게 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기사는 소서노가 두 아들과 함께 부아악(오늘의 인수봉)에 올라
백제의 도읍지 하남위례성을 정하는 장면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소서노와 비류, 온조 일행이 마한에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왕은 기준(箕準)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100리의 땅 미추홀(지금의 인천)과 하북위례홀(지금 서울) 등을 얻어
소서노가 왕호를 칭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그는 큰아들 비류를 쫓아가지 않았다. 둘째 아들 온조와 함께 하남위례성에 도착하여 새 나라 백제를 건국했다.
소서노가 고구려에 이어 두 번째로 창업한 백제는 한반도는 물론 만주의 요서지방 일본까지 영향을 끼치는
해양국가로 당당하게 위세를 떨친다. 한강 유역을 도읍지로 정한 그녀의 선택은 미추홀을 선택한 비류가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후회했다는 점에서도 탁월함이 입증되었다.
온조왕조 13년(서기전 6년) 소서노가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에서 소서노의 사망관련 기사를 살피기로 한다.
13년 봄 2월 왕도(王都 서울)에서 노파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마리가 성에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예순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일렀다.
"우리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자주 변경을 침범해서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지금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나라의 어머니(國母)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형세가 편하지 못하니
반드시 장차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지난날 한수 남쪽을 순회하면서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해서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 성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옮겼다.
소서노는 두 왕국을 창업한 여걸이다.
그것도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던 고대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두 왕국을 건국한 여걸 소서노다.
세계에서 한 왕국을 건국한 여성은 오직 소서노뿐이다.
그녀가 창업한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7백년동안 동남아를 호령한 강국이었다.
그많은 중국의 국가 가운데 3백년 이상 간 나라는 한곳도 없다는 지적이다.
"만일 소서노가 영국이나 중국에서 두 왕국을 건국하였다면 비록 한반도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이지만
그 사실을 꼭 외워야만 원하는 대학이나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두 왕국을 창업하였기에 다행입니다."
역사적으로 걸출한 인물 소서노가 정작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가끔 답사에서 만나는 학생들과 자주 주고 받는, 소서노를 사실 그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그 역사의 '유감'이다.
첫댓글 소서노 이야기 재미있네요*^^* 잘 읽고 갑니다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