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읽는 인문학
‘그와 나 사이를 걷다’
필자가 서울에 처음 올라온 건 1963년. 당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린 나이에 유학을 와서 그대로 이곳에 머문지도 어언 60년이나 되었다. 서울 사람이 된지 반백이 넘었지만 아직도 난 서울을 잘 모른다. 서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뒷골목은 얼마나 깊은지, 그 속에 살다간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그들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살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늘 겉모습 만 봐온 셈이다.
그런데 근년 들어 점점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이 탓인가? 정릉 비탈길을 힘겹게 오르는 허리굽은 할머니 모습이 보이고, 깜깜한 새벽 서울을 빗질하는 환경미화원 아저씨의 모습도 보인다. 틈날 때마다 박물관, 미술관을 가보고싶고 전쟁기념관에서 우리 민족의 아픔도 깊이 느껴보곤 한다.
지난 7월 8일(토), 필자는 고등학교 동기 15명과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다녀왔다. 이곳은 8년 전에도 우연히 문학모임 멤버 몇명과 돌아본 적 있는데 그때 정리한 내 글을 보고 고교 동기들 등산모임에서도 꼭 가보고싶다고 한다. 망우리? 아, 그렇구나. 서울에서 산지 60년이 넘었는데 8년 전에 겨우 한번 밖에 다녀오지못했구나. 난 등산을 즐겨하는 편이어서 아차산, 용마산은 여러번 다녀왔지만 바로 옆에 있는 망우산은 늘 피해왔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묘지공원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가보고싶은 마음이 적었던 게 사실이다. 그 망우리공원을 돌아보자는 고교동기들의 제안에 필자도 크게 반겼던 건 이 역시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철들면 조상 묘역을 자주 찾아가 본다던데 나도 이제 철이 좀 드는 걸까? 이번엔 필자가 직접 안내하는 대신 중랑구청의 협조를 얻어 문화해설사의 전문적인 안내를 받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가 다시 돌아본 망우리공원은 묘지들 만 모여있는 혐오지역이 결코 아니었다. 시인, 화가, 소설가,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 정치인, 의학자, 가수, 체육인, 작곡가, 교육자, 변호사, 종교인, 언론인, 사회주의운동가 등 우리 근현대 격동기의 주역들이 잠들어 있는 역사박물관이었다. 깊은 숲 속에 4.7km에 이르는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 어느 공원 못지않은 아늑함과 멋진 경관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사색의 길'이며, 걸으면서 생명의 귀중함을 느끼는 삶의 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다수가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정치인 조봉암과 장덕수, 서화가 오세창, 사학자 문일평, 대구 출신의 천재 화가 이인성, 근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 등 유명인 외에도, 가수 차중락, 연극 및 영화「동승」의 원작자인 극작가 함세덕, 「탈출기」의 소설가 최학송,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지만 친일 행적으로 그 이름이 생소한 박희도, 해방 후 좌우익의 투쟁 속에 희생된 삼학병, 반민특위의 선봉장이었던 국회의원 이병홍, 몰락한 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명온공주와 부마 김현근, 한국의 산과 민예를 자기목숨처럼 사랑하고 결국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도입한 총독부 초대 산림과장 사이토 오토사쿠, 뒤늦게 서훈을 받은 사회주의계 독립지사 오기만과 박원희, 안창호의 조카사위 김봉성과 안창호의 비서 유상규 등 수많은 선열과 조상들이 잠들어 있어 한편의 대하소설을 읽는 듯한 곳이기도 했다.
총독부 관료 등도 잠들어 있어 이념적으로는 친일파와 좌파까지 마치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이곳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고 친일파도 반일파도 없었다. 모두 같은 땅에 묻혀 조선의 흙을 이루고 있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8년 전에 비해 찾아가는 길, 진입로 및 표지판, 산책코스 등도 많이 정비되어 있었다. 2022년 4월에는 공원관리사무소 위치에 ‘중랑망우공간’이라는 현대식 2층 건물과 주차장을 신축, 카페 및 전시공간 등을 마련하여 방문객들에게 안내 및 쉼터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또, 2023년 6월 1일부터는 양원역 2번 출구 인근에서 매 20-30분 마다 중랑망우공간까지 왕복하는 셔틀버스도 운행하고 있다.
중랑망우공간 바로 위 산책로 출발지점에 ‘인물가벽’을 마련, 이곳 망우공원에 잠들어 계신 50여 명의 유명 인사들 얼굴, 생존기간 및 주요이력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소개한 것도 새로웠다.
필자 일행은 이번 방문에서는 곽호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유관순 열사 합장묘-지석영 묘- 아사카와 다쿠미 묘-방정환 묘- 한용훈 묘- 조봉암 묘-중랑전망대-최학송 묘-이중섭 묘-박인환 묘 순으로 돌아봤다. 문화해설사의 자세한 인물소개 및 점심시간 포함 약 4시간 30분 소요.
첫 번째 찾아간 묘소는 유관순 열사 묘.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여 일제의 삼엄한 경비 하에 이태원공동묘지에 매장되어 묘비도 없이 지내다가 이태원묘지가 없어지면서 아무도 흔적을 찾지못했다. 일제는 이태원공동묘지의 무연고묘 28,000여기를 화장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합장 후 이곳에 위령비를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 합장비는 유관순 열사를 가장 가깝게 추모할 수 있는 일종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유관순 열사 합장묘를 지나 사잇길로 다시 들어서자 마자 문화해설사는 좌측 멀리 숲속을 가리키면서 저 곳에 강소천 아동문학가의 묘가 있다고 알려준다. 일제강점기에 ‘어린이의 벗’이 된 분은 방정환 선생이 대표적이었고 전쟁 후 고난의 시기에는 강소천(1915-1963) 선생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금강산’, ‘스승의 은혜’, ‘유관순’, ‘코키리아저씨’, ‘태극기‘, ’눈사람‘ 등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동요의 작사자이며 ’어린이헌장‘을 만든 분이 강소천 선생이다.
지석영 선생은 최초의 서양의학(종두법) 도입자로 우리나라 천연두 종식에 공헌한 분이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1899년 관립의학교(서울의대)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망우리공원에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잠든 일본인 묘도 두기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 와 총독부 산림과장 사이토 오토사쿠 묘가 그것이다. 이들 두 분은 조선의 산림녹화에 크게 기여한 분들이다.
다쿠미 씨는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 임업시험장(현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조선의 산림녹화에 힘썼고, 개인적으로는 조선의 민예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단지 그것 뿐이라면 그가 여기 묻힌 이유가 부족하다. 당시 이 땅에서 그들 만의 사회 속에서 살다 돌아간 대다수의 일본인과는 달리, 그는 조선말을 하고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의 이웃으로 살면서 진정으로 조선의 마음에 접한 사람이었기에 죽어서도 이 땅의 흙이 됐다. 그의 묘 오른 쪽에는 항아리 모양의 조각품이 보이는 데 이는 다쿠미 씨가 생전에 좋아한 ‘청화백자추초문각호’로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 씨가 다쿠미 타계 1주기 때 세운 것이라 한다. 그의 형 역시 조선 도자기의 역사를 정립한 최고의 조선 도자기 전문가였다.
방정환 선생은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 선생의 사위로서 3·1운동 준비에 협력하였으며, 1923년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 선포하는 등 어린이를 위한 발자취를 찬연하게 남기신 분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바위 속에 묻혔으며 그의 묘 위에는 ‘童心如仙’이라는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어린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뜻이다.
방정환 선생 묘 인접 위치에는 이영준 박사 묘가 있다. 이영준 박사는 의학박사로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분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재였다. 1942년에 세브란스의전 3대 교장을 역임했으며, 제 4-5대 민의원에 당선됐고, 1950년에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분이다. 원만한 성격과 지도력으로 오긍선의 수제자가 되었다. 1968년 사망하여 오긍선 묘역 아래쪽으로 들어왔다. 비석의 글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지었고 서예가 정필선이 썼다.
다음은 한용운의 묘. 한용운 스님은 3·1독립선언을 주도하였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옥중에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지어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셨고, ‘불교유신론’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여 일제의 조선 불교 침탈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또, ‘님’, ‘당신’ 등의 상징을 통해 민족정신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현한 서정시 90여 편을 묶어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하였다.
정치가 조봉암은 1948년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고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분이다. 제2대 및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2위를 차지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고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다. 박헌영과 한때 교류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1959년 7월 사형 당하고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2011년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부활하고 있다. 그의 비석 뒷면을 보면 그의 이력이나 공적 등 일체 비문이 없다. 비문이 없는 묘비가 지금도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탈출기' 등 명작을 남긴 최학송 소설가는 유족의 행방도 모르고 미아리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31세의 짧은 생애에 너무 가난하고 외로워서 서러웠던 문인, 함북 성진 태생인 최학송 소설가는 일제하 만주와 한반도를 전전하며 곤궁하게 살다 서울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침 필자 일행이 방문한 날 최학송 작가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 분이 돌아가신 날이 7월 9일이었기 때문이다. 묘지 옆에는 중랑구청장이 보낸 추모현수막이 세워져 있다.
이중섭 화가의 묘 가는 길은 100계단 쯤 내려가야 했다. 그의 고된 삶처럼 멀고 숨가빴다. 그의 불우한 삶은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생각케 한다.
그의 대표작인 ‘황소’(1953)를 보면 석양의 붉은 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큰 눈을 하고 우짖는 듯 하다. 이중섭은 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방치되어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 김병기 화가에게 발견됐다. 유해는 서울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반은 망우리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의 가족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처가인 야마모토가(山本家)의 묘에 합장됐다.
그의 망우리 무덤 앞 상석은 먼 훗날에 세워진 것으로 오른 편에 아들 태현과 태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망 1년 후 친구 한묵이 ‘대향이중섭화백묘비’라고 쓰고 후배 차근호가 아이 둘의 모습을 새긴 조작품을 세웠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박인환의 묘소. 박인환 시인의 묘는 북한산,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네"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이 노래가 되어 흘러나왔다. 1956년 3월 20일, 시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은 불과 31세의 나이에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
이 이외에도 묘소가 주순환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60년대 가요계의 우상이요, ‘오빠’의 원조 차중락(1942-1968)도 우리들 뇌리에 늘 살아있는 분이다. 그는 멋진 남성적 외모에 대중의 감성을 흔드는 음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얻었으나 27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이곳 망우리에 잠들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얼굴을 스치면/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후략)’로 유명한 그의 노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생생하게 귀에 들리는 듯 하다.
8년 전 처음 망우리공원을 다녀온 후 우연히 문학모임에서 가까이 지내는 지인이 책 한 권을 소개시켜 주었다. 필자가 망우리공원 얘기를 했더니 마침 망우리공원에 묻힌 유명인물들 이야기를 풀어낸 귀중한 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반가웠다.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서점에 들러 그 책을 사봤다.
망우리공원에 잠들고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주역들을 처음으로 발굴 및 정리하여 소개한 이 책은 김영식 작가의 『그와 나 사이를 걷다 - 망우리비명으로 읽는 근현대인물사』(2009년 4월, 골든에이지)로, 출간 그 해에 문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는 등 망우리공원의 인문학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관심 있는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그동안 저자는 지속적인 현장답사 안내 및 실내 강연을 통해 망우리공원의 인문학적 가치와 인물들의 스토리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하였고, 그 결과 2012년에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로부터 산림청장상(‘꼭 지키고 싶은 우리 문화유산’ 부문)을, 2013년에는 서울연구원으로부터 서울스토리텔러 대상 등을 받았으며, 2014년에는 서울시의 ‘망우리공원의 가치제고’ 및 ‘인문학길 조성’ 용역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곳을 찾는 답사객들을 위해 초판 내용의 전반적인 수정 및 보완을 거쳐 최근에는 4차 개정판까지 펴냈다. 기존 소개 인물에 대해서는 그동안에 새로 밝혀진 사실 및 연구 결과를 덧붙이고, 자료 부족으로 미처 소개하지 못했거나 출간 후에 새로 발견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추가하였다. 이제 망우리공원에서 근현대사를 들려주는 주요인물은 그의 책에서 무려 101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단지 사료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어 독자에게 읽는 재미까지 안겨준다는 점이다. 이 책은 망우리공원이라는 문화자산을 넓이 뿐 아니라 깊이와 재미까지 더해주었다. 단순히 그곳에 묘가 있다는 지리 정보의 차원을 벗어나, 구한말 개화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의 우리 역사를 고인의 비석을 통해 말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비화도 꽤 많이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소파 방정환의 묘 바로 아래에는 방정환의 숭배자요 후배인 최신복의 가족 3대가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 화가 이인성과 방정환의 인연, 가수 차중락의 숨겨진 애인 미국 여대생 알린의 사진과 편지, 이중섭의 묘에 소나무가 서 있는 사연, 동아일보 편집국장 설의식과 배우 김보성과의 관계, 야구선수 이영민과 미야다케가 벌인 숙명의 한일 라이벌전의 기록, 도산 안창호가 비서 유상규 옆에 잠들었던 사연, 소설가 김말봉의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 유관순 열사와 이태원무연분묘합장비와의 관계, 그리고 망우리의 독립지사들과 악연이 깊어 막간 인물로 등장시킨 미와 경부 관련의 최초 발굴 사료 등이 그것이다.
저자 김영식 작가는 “망우리공원은 일제에 의해 40년간(1933~1973) 시립공동묘지로 사용되며 아무도 찾고 싶지 않은 근심의 장소(‘忘憂’할 수 없는)였으나, 폐장 후 40년이 지난 지금은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인 우리 근현대사의 박물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사이, 고인과 나 사이의 ‘사잇길’을 걸어가며 ‘즐거이 깨달음을 얻어 근심을 잊는(樂而忘憂 낙이망우, 『논어』)’ 최고의 인문학공원이 되었다”고 말한다.
전 문화재청장인 명지대 유홍준 교수는 “이제는 더없이 중요한 역사 공간이 된 망우리공원을 우리는 하나의 문화재로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청순한 산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 망우리공원을 거닐다 보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아들임을 떠올리며 멀리 한강을 처연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몇 차례 학생들과 여기를 답사 다녀왔고, 또 어느 해 봄엔 여기를 찾아갈 것이다”라고 말한다.(글,사진/임윤식)
첫댓글 이태원 경리단길에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이태원에 묻혀있던 유관순 열사의 유골이 망우공원에 진토로 합장되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자세한 안내 고맙네.
이태원에도 추모비가 있군. 이태원공동묘지에 합장되셨으니 그게 당연하지. 중요한 정보 고맙네. 산사랑회에서 다녀왔네. 친구도 왔으면 좋았을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