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수(壽) 81세
설씨(偰氏)는 멀리 내력이 있으니 돈욕곡(暾欲谷) 이상은 당사(唐史)에 상세하고, 그 이후로는 원(元) 학사(學士) 구향현(歐陽玄)이 지은 가전(家傳)에 아주 자세하다. 사문(史文)은 명산(名山)의 석실(石室)이 지켜주고 구양현이 지은 가전은 설씨 중에서 중국 땅에 머물러 사는 자들이 서로 지키고 있으니, 굳이 우리나라의 설씨 일가(一家)가 전술하기를 기다릴 것은 없다. 그런데 지금 족보를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의 일가이니 이른바 경주보(慶州譜)가 이것이다.
아, 설씨가 성을 얻어 처음으로 기반을 세운 땅은 고창(高昌)의 설연하(偰輦河)이다. 지금은 경주(慶州)라고 함은 어찌된 것인가. 동국으로 와서 또 동국에 거주하니 마땅히 본국(本國)에서 하사한 관향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동국으로 온 설씨는 마땅히 부원후(富原侯)를 초조(初祖)로 하는데 상계(上系)를 곧바로 돈욕곡까지 미치게 한 것은 어째서인가.
돈욕곡에 미치지 않으면 중국과 일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족보가 이미 통하지 않는데 여전히 중국과 일가가 되려함은 무엇 때문인가. 족보가 통하지 않는 것은 인사(人事)이지만 여전히 일가이기를 바라는 것은 천리이다. 인사로 천리를 폐하면 되겠는가. 설씨가 보규(譜規)에 대해서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한토(漢土)에 들어가서 사는 번성(蕃姓)은 헤아릴 수가 있는데 대저 그 거칠고 싸움질하는 풍습을 벗어 버리지 못하였다. 설씨는 사막의 변경에서 나서 중국 땅으로 들어와 궁마(弓馬)를 버리고 시서(詩書) 공부를 독실하게 하여 과거에 급제해서 현달하기를 지푸라기 줍듯이 하였고, 충효의 미덕을 행함도 다반사처럼 하였으니, 이는 천지가 있은 이래로 전혀 없거나 근근이 있는 정도였다.
재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와서는 작은 나라에서 물을 마시고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비록 유감스러울 듯도 하였지만, 동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어 마침 우리 성조(聖朝)께서 흥기할 때를 만나 좋은 시운을 타고 떨쳐 공을 이루어서 몸은 관각의 선비가 되고, 도는 문물의 다스림을 수식한 것이 대를 이었으니 이것으로도 참으로 기특하다. 하물며 지금은 온 세계가 육침(陸沈) 되고 존비가 도치된 시절임에랴.
부사(父師 기자(箕子))가 동으로 나왔던 나라이며, 선니(宣尼 공자(孔子))께서 살고 싶어 했던 땅에서 청정한 곳을 대략 얻어 여기에 종족을 의탁하였으니 어찌 설씨 선조가 후손을 복되게 하려는 마음이 보통 사람보다 아주 뛰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설씨는 중간에 쇠미해진 것을 한탄하지 말고 힘써야 할 바를 더욱 힘쓰라.
나는 그대 집안의 적경(積慶)과 누인(累仁)이 결코 여기에만 그치지 않을 줄을 안다. 설씨 집안의 두 선비인 병진(秉鎭)과 병수(秉洙)가 책의 서문을 노부(老夫)에게 청하였다. 병수는 바로 옛날 족보를 만들었던 이덕(履德)의 증손이다.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변변찮은 글을 썼다.
다만 한 가지 말하자면, 상계(上系)에 극직(克直)을 바로 돈욕곡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연대로 비추어 보아 의심스럽다. 아마도 이는 구양현의 글에서 이 한 글자가 잘못 적어져 이렇게 된 듯하니, 수보(修譜)를 하는 자가 의심스러운 점을 그대로 전하는 조목에 두는 것이 옳을 듯하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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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慶州偰氏族譜序
惟偰氏遠有來歷。暾欲谷以上。唐史詳焉。以下元學士歐陽玄爲作家傳甚悉。史文名山石室守之。歐傳偰氏之留居中土者相與守之。皆無竢於左海一家矣。今之所譜者。左海一家。所謂慶州譜者是也。噫。偰氏得姓肇基之地。高昌之偰輦河是也。今云慶州奚。東來又東居。宜遵本國賜貫也。東來之偰。宜以富原侯爲初祖。而上系之直及暾欲谷奚。不及暾欲谷。則無以一家於中州也。譜旣不通。而猶欲其一家於中州奚。譜不通人也。猶欲一家天也。以人而廢天可乎。偰氏之於譜規。其得矣乎。自古蕃姓入居漢土者可數。大抵未脫其粗厲金革之習。偰氏出沙塞而入中土。棄弓馬而敦詩書。科第之顯名而取如拾芥。忠孝之美德而行若茶飯。此有天地以來。絶無而僅有。及其避地東來。飮水食土於褊邦。雖若可憾。東來未幾。適値我聖朝龍興。乘運奮庸。身爲館閣之彥。道賁文物之治者連世。斯已奇矣。况今大界陸沉。冠裳倒置。父師東出之邦。宣尼欲居之地。粗得淸淨。托種於玆。豈非偰氏先祖裕後之謨。出尋常萬萬乎。偰氏莫歎中衰。益勉其所可勉者。吾知君家積慶累仁。决不止於此但已也。偰氏二彥秉鎭,秉洙。問弁卷於老夫。秉洙卽舊修譜履德之曾孫也。辭不獲。塵涴如此。而第有一事可言。上系之以克直。直爲暾欲谷之子。年代涉於可疑。恐是歐文訛此一字致此。修譜者。置之傳疑之科可也。<끝>
노사집 제19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