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요약]
■이종악(李宗岳)
1726(영조 2) - 1773년(영조 49)
1726년(영조 2)∼1773년(영조 49).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산보(山輔)이고, 호는 허주(虛舟)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이시성(李時成)이고, 조부는 이원봉(李元鳳)이다. 부친 이선경(李善慶)과 모친 사인(士人) 김몽렴(金夢濂)의 딸 문소김씨(聞韶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현령(縣令) 김동준(金東俊)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이고, 둘째 부인은 학봉(鶴峰) 김성일(金成一)의 후손이자 사인 김경한(金經漢)의 딸 문소김씨이다. 역대의 고실(故實)‧도화(圖畵)‧전예(篆隷)‧전병(田兵)‧음률(音律) 등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 저술을 내려고 자료를 모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의수(李宜秀)‧이민수(李民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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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 제48권 / 묘갈명(墓碣銘)
허주 이군 묘갈명 병서(虛舟李君墓碣銘 幷序)
이군 산보(李君山甫)는 휘가 종악(宗岳)이다. 선조는 고성(固城) 사람으로, 중세에 이암(李嵒)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고려 문하시중을 지내고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이며 호가 행촌(杏村)이었다. 손자 이원(李原)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 좌의정을 지냈으며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그 손자인 현감 이명(李洺)이 유수(留守)인 형 이굉(李浤)과 함께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낙수(洛水)의 남북 양쪽 물가에 정자를 짓고 지내며 여생을 마쳤으니, 이분이 군에게 11세조가 된다. 고조 이후영(李後榮)은 문과에 급제하고 군수를 지냈으며, 증조는 이시성(李時成)이고, 조부는 이원봉(李元鳳)이며, 선고는 이선경(李善慶)이다.
선비 문소 김씨(聞韶金氏)는 문충공(文忠公) 학봉(鶴峯) 선생의 후손으로 사인 김몽렴(金夢濂)의 따님인데, 원릉(元陵) 병오년(1726, 영조2) 10월 29일에 군을 낳았다. 군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시원스러운 데다가 기개가 있었다. 8세에 부친을 잃고 효성을 다해 모친을 섬기어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를 힘썼으며 종종 어린아이 같은 장난도 하였다.
자신의 행색은 보잘것없이 해도 제사 받드는 것은 삼갔으며, 이익을 도모하는 데는 서툴렀으나 친족을 대우하는 데는 돈독하였다. 남의 장단점이나 정사(政事)의 득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으며,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면 해학을 섞어 가며 간담을 터놓고 얘기하였다.
성품이 총명하여 본 것을 잘 기억하였으므로 역대의 전고(典故)와 그림, 글씨, 농사, 병법, 음률 같은 것들에 대해 모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종종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글을 읽다가 충효와 절의가 드러난 부분을 만나면 우러러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읽기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병폐로 여겨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편집해 놓았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였다. 집이 상류(上流)에 있어서 주변의 산수가 아름다워 바람 좋고 달 밝은 날이면 작은 배를 불러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따르게 하여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벗어나려는 생각이 있었으니, 이로 인하여 허주(虛舟)라고 자호하였다.
중년에 병이 많아서 스스로 섭생(攝生)에 힘쓰며 모부인에게 근심을 끼칠까 걱정하더니, 계사년(1773, 영조 49) 12월 12일에 졸하였다. 모부인은 나이도 많은 데다 애통함으로 한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아, 참으로 슬퍼할 뿐이다. 모월 모일에 모산 모향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전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현령 김동준(金東俊)의 따님이자 홍문관 교리 김총(金璁)의 증손이다. 후배인 문소 김씨(聞韶金氏)는 사인 김경한(金經漢)의 따님이자 성균관 대사성 김방걸(金邦杰)의 증손이다.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의수(宜秀)는 딸 셋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차남 민수(民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장녀는 권찬도(權纘度)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군은 실로 우리 고모의 외손이었으므로 어려서부터 왕래하며 서로 잘 알고 지냈다. 그가 수를 누리어 종족과 향당에서 후덕한 장로(長老)가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인 의수가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나에게 명문을 부탁하였다. 아, 내가 차마 그대의 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마는 어찌 차마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강에 떠 있는 저 나룻배여 / 有舟在水
그 안이 텅 비어 있구나 / 其中則虛
건드려도 거스르지 않고 / 觸之無忤
둥실거리며 자약(自若)하네 / 汎汎自如
속이 비고 거스름 없으니 / 惟其中虛而無忤
남들과 다투지 않는다오 / 所以與物而不競
아아, 그대가 지은 호가 / 嗚呼君之自號
그대 성정에 잘 맞는구나 / 可以得君之情性
[각주]
[주01] 고모의 외손 : 앞에서 이종악(李宗岳)의 어머니가 김몽렴(金夢濂)의 딸이라고 했는데, 대산의 첫째 고모가 김몽렴에게 시집갔으므
로 고모의 외손이라고 한 것이다. 김몽렴은 또한 대산의 외조부인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생질이기도 하다.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역)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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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虛舟李君墓碣銘 幷序
李君山甫諱宗岳。其先固城人。中世有諱嵒。高麗門下侍中諡文貞號杏村。至孫諱原。入本朝左議政鐵城府院君。孫諱洺縣監。與兄留守浤。俱棄官歸休。構亭于洛之南北厓以終老焉。是於君間十一世。高祖諱後榮文科郡守。曾祖諱時成。祖諱元鳳。考諱善慶。妣聞韶金氏。文忠公鶴峯先生之后。士人夢濂之女。以元陵丙午十月二十九日生君。幼儁爽有氣槩。八歲而孤。事母盡孝 。務順適其意。往往爲嬰兒戲。薄於自奉而謹於奉祭。疎於營利而篤於遇族。不喜言人長短官政得失。遇會心人。披露肝膈。間以雅謔。性聰穎善記覽。歷代故實圖畫篆隷田兵音律之類。無不留心玩思。往往造妙。讀書遇忠孝節義處。俯仰感欷。或至流涕 。病世人不喜看東史。分類彙編。未及脫藳。所居據上游。山水明媚。每風和月朗。呼小艇以琴酒自隨。悠然有出塵之想。因自號虛舟。中歲多病。善自攝養。恐貽母夫人憂。癸巳十二月十二日卒。母夫人年高以哀。不一月下世。嗚呼其可悲也已。某月日 。葬于某山某向之原。前配光山金氏。縣令東俊之女。弘文校理璁之曾孫。後娶聞韶金氏。士人經漢之女。成均大司成邦杰之曾孫。有二男二女。長宜秀。生三女幼。次民秀。生二子幼。女長適權纘度。季未笄。君實爲我姑氏外孫。自幼少來往相熟。意其享有多壽。爲宗族鄕里耆德而奄然不少須矣。其孤宜秀將表其墓。以顯詩爲託。噫。吾尙忍銘吾君。又安忍無一言。銘曰。
有舟在水。其中則虛。觸之無忤。汎汎自如。惟其中虛而無忤。所以與物而不競。嗚呼。君之自號。可以得君之情性。<끝>
한국문집총간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