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이 시험이 끝나고 우리도 해방을 맞았습니다. 시험기간동안 딱히 해 준 것은 없는데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했지요. 조금이라도 더위를 덜 느끼라고 방방마다 문 열어 두고 있어 가능한 작은 소리로 말하고, 텔레비전을 켜지 않으려 한 정도. 우리가 아이를 위해 해 준 것은 이정도인데 스트레스였나 봅니다. 시험 마지막 날 아빠가 "해방이다!" 외치더군요. 그리고 저녁에 온가족이 모여 영화를 봤습니다. 오래 전 느림선생님 중에 한 분이 '꼭 봐야 할 영화'라며 추천해 주신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가족이 함께 하기에 딱!인 영화.
영화는 1900년대 초, 20세기 초반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 또는 여행가는 사람들을 실은 유람선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하네요. 유람선에서 버려진 백인 남자아이, 이 아이를 흑인 남자가 발견해 키우게 됩니다. 아이의 아빠가 되는 흑인 남자는 화차에 석탄을 넣는 일을 하지요. 갓난 아이를 키우기엔 열악한 환경이지만 아이에 대한 사랑만은 극진합니다. 함께 일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자란 아이가 8살 되던 해, 사고로 아빠가 돌아가시게 되고....... 늘 배의 맨 아랫층에서 생활하며 바다만 바라보고 자라던 아이가 객실과 무도회장이 있는 곳에 올라오게 됩니다. 그리고 유리 너머로 보이는 무도회장 안의 풍경은 경이롭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발견한 피아노, 피아니스트의 몸놀림. 아이는 타고났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들은 곡을 그대로 연주합니다. 이후, 아이는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 유람선과 함께 늙어가고, 유람선의 폭파와 함께 생을 마감합니다.
배에서 태어나 한 번도 땅을 밟아 보지 않고 배에서 생을 마감한 피아니스트. 절대음감을 가진 피아니스트는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음반을 내 많은 돈을 벌 기회도 있었고, 어여쁜 아가씨와 결혼할 기회도 있었지요. 그러나 모든 걸 포기합니다. 단 한번 배에서 내릴 결심을 하게 되는데, 바닷가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뉴욕시티의 빌딩들을 보는 순간 돌아섭니다. 다시 배에 오릅니다. 빌딩 숲 사이로 나 있는 정해진 길을 보는 순간 자신의 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야 하는 삶은 이 피아니스트에겐 맞지 않은 삶이었죠. 피아니스트의 연주 특징은 정해진 곡을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연주를 하지요. 그래서 합주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죠.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삶을 산 그에게 산처럼 다가온 빌딩숲은 '죽음' 그 자체였겠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다간 피아니스트! 아름답습니다. 마지막 유람선 폭파 장면은 꼿꼿한 피아니스트의 삶이 산화되어 빛을 발하는 듯 했습니다. 내가 사는 삶! 힘든 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신들린 사람처럼 피아노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피아니스트. 속 시원해 집니다.
첫댓글 같은 영화를 보고서도 그 감흥은 이렇게 남다르다니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신기하군요! 정해진 것을 하지 않고, 합주도 불가능한 피아니스트, 도전과 창의는 좋은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피아니스트가 우리에게 어떤 화두를 던지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