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봉은사칠성도[─奉恩寺七星圖]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 북극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19세기 칠성도.
개설
2007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55㎝, 가로 229.8㎝. 봉은사 칠성도는 1886년 4월 후불탱화(비로자나불도), 산신도와 함께 조성되어 판전에 봉안되었다가 1942년에 북극보전으로 이안된 불화이다. 이 불화의 증명은 호봉 응규(帍夆 應奎), 한은 정준(漢隱 正俊), 환은 윤정(幻隱 允定)이 참여하였으며 금어 경선 응석(慶船 應釋), 동호 진철(東昊 震徹), 현조(賢調), 혜조(慧照)가 함께 그렸다. 흰 소가 끄는 마차[白牛車]를 타고 있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의 권속인 칠성과 일광, 월광보살, 칠원성군, 이십팔수 등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구성과 백우거(白牛車)를 타고 앉아 있는 치성광여래 도상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칠성도의 특징이다. 등운 수은(騰雲 修隱)이 화주이고 청신녀 경인생 오청정월(淸信女 庚寅生 吳淸淨月)이 인권대시주(引勸大施主)가 되어 조성하였다. 오청정월은 1892년 대웅전의 삼세불화와 삼장보살도, 감로도 제작 때 인권대시주를 맡았으며, 1912년 대웅전 삼존불상의 개금 때도 인권화주(引勸化主)를 맡은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 봉은사의 중요한 단월(檀越: 절에 물건을 베풀어 주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치성광여래는 흰 소가 끄는 마차 위에 앉아 있다. 백우거에 앉아있는 치성광여래의 도상은 힌두교에서 태양을 타고 우주를 1회 돌면 1년이 된다는 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일찍부터 성립되어 유행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치성광여래가 대부분 수미단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전통적인 도상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도상은 청룡사 칠성도(1868년)를 비롯하여 서울 미타사 극락전 칠성도(1887년), 동학사 칠성도(19세기 후반), 서울 안양암 칠성도(1930년) 등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경에 조성된 서울·경기 지역의 칠성도에서 주로 보여, 이 지역을 중심으로 칠성도의 전통적인 도상을 계승하고자 한 흐름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치성광여래 아래에는 해와 달을 신격화한 일광보살[日光遍照逍災菩薩]과 월광보살[月光遍照逍災菩薩]이 몸을 구부린 채 각각 붉은 해와 흰 달이 그려진 보관을 쓰고 본존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그 옆에선 두 명의 동자가 향로와 과일을 공양하고 있다. 치성광여래의 두광과 신광 옆에는 머리에 별이 그려진 관을 쓴 이십팔수가 좌우 14구씩 묘사되었는데, 그 크기가 유난히 작다. 반면 그 옆으로 향우측에 4구, 오른쪽에 3구 등 칠성여래가 큼직하게 묘사되어 있어 화면의 전체적인 구도가 삼각형을 이루며 치성광여래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칠성여래 아래에는 붉은 관복과 별이 그려진 관을 쓴 문신 모습의 칠원성군(七元星君)이 시립하였는데, 왼쪽의 한 성군은 면류관을 쓰고 있어 아마도 시왕 중 면류관을 쓴 다섯 번째 염라대왕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옆으로는 좌우 각 2명의 동자가 높게 번을 쳐들고 있다. 칠성여래의 위쪽으로는 태상노군(太上老君)과 필성(弼星), 그리고 화면 상단 좌우에는 각각 삼태(三台)와 육성(六星)이 배치되어 있다. 태상노군의 정수리가 유난히 높은 것이 눈에 띈다. 채색은 붉은색을 주로 하면서 녹색, 청색, 황색 등을 활용하였는데, 의복 등에 청색의 사용이 두드러져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다.
특징
봉은사 칠성도는 전체적으로 인물 묘사가 섬세하고 곧은 철선을 사용하여 유려한 필치를 보여 준다. 많은 인물들을 표현하면서도 위로 올라갈수록 인물의 크기를 작게 그리고, 치성광여래를 향하여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상단의 본존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특히 백우거에 앉아있는 치성광여래의 도상은 다른 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도상이지만 서울 미타사 삼성각 칠성도(1874년), 정수사 칠성도(1878년) 등에서 볼 수 있어, 이 불화가 19세기 후반 서울·경기 지역 칠성도상을 충실하게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황
봉은사 칠성도는 현재 북극보전에 산신도와 독성도와 함께 봉안되어 있다. 불화 화면 상단의 채색이 검게 변색되어 있고 칠성의 얼굴과 육신부에 채색된 호분이 약간 탈락되어 있으나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봉은사 칠성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칠성도의 대표적인 형태로 경상도 지역에서도 보인다. 칠성도 제작에 참여한 동호 진철(東昊 震徹)이 경상도 화승이기 때문에 초본이 전래된 것인데, 고운사 칠성도(1892년)과 봉정사 칠성도(1893년)가 그 예이다. 동호 진철과 같은 시기에 경상도에서 활동한 상휴(尙休), 창근(唱昕)이 그린 직지사 칠성도(1911년)도 이를 모본으로 하였다. 이 불화는 서울·경기 지역의 불화와 경상도 지역 불화의 도상적 유사성과 초본 공유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불화』36 조계사 직할사암편(중)(성보문화재연구원, 2005)
신광희, 「서울 奉恩寺 板殿의 佛畵 연구」, 『동악미술사학』, 2020
김정희, 「서울 奉恩寺 佛畵考」, 『강좌미술사』, 2007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봉은사괘불도 [─奉恩寺掛佛圖]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에 소장되어 있는 19세기 괘불도.
개설
2007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면 바탕에 채색. 세로 686㎝, 가로 394.5㎝. 1886년 당시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던 수도산 봉은사의 야외 의식용 괘불도이다. 봉은사 괘불도는 연꽃을 든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했으며 하단에는 동자형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승물(乘物)을 탄 모습으로 도해되었다. 이러한 석가오존도는 19세기 말부터 유행하는데, 봉은사 괘불도는 이른 시기의 석가오존도 작례에 해당된다. 이 불화 제작에 경기 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인 영명 천기(影明 天機)와 대허 체훈(大虛 體訓)이 함께 참여한 사례로도 중요하다. 화기에는 괘불도의 제작에 소요된 일시를 기입했는데, 즉 1886년 5월 26일에 시작하여 6월 5일에 점안(點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연꽃을 든 석가모니불과 가섭존자·아난존자가 협시하는 삼존의 구성에, 하단에는 황색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동자형으로 나타난다. 화면 상부의 도상이나 구성은 1879년 개운사 괘불도와 유사한데, 화염문과 능형으로 장식된 두광과 신광, 채운의 표현에서도 일치하는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문수·보현보살을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동자형에 승물에 탄 모습으로 나타낸 점은 19세기 전반부터 유행한 구성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도상은 괘불도의 경우 1832년 서울 흥천사 괘불도에서부터 확인되며 1882년 안양암 괘불도, 1901년 지장사 괘불도, 1902년 흥국사 괘불도 등 20세기에 초에 이르기까지 서울·경기 지역의 괘불도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문수·보현보살은 황색의 배경에 주홍색조의 구름을 배경으로 나타나는데 승물 위에 반가자세로 앉아 있다. 연꽃을 든 문수보살은 청색, 적색, 녹색조로 영기(靈氣)를 표현한 황색 사자 위에 앉아 있다. 보현보살은 연꽃이 아닌 모란꽃을 들고 있으며 코를 높이 든 흰색 코끼리 위에 앉아 있다. 봉은사 괘불도는 석가모니불과 두 제자의 표현이 특징적인데, 즉 얼굴에 비해 몸체의 비율이 과장되게 커지고 부피감이 강조되어 어색한 인상이다.
특징
봉은사 괘불도에 사용된 군청색은 넓은 면적에 시문된 짙은 적색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법의를 비롯한 넓은 면에 군청과 적색, 녹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고 금니 원문을 옷주름의 굴곡을 따라 표현했다. 본존의 육신부는 황색조로 강조하고 신광에는 금니로 채색하였다. 가섭존자를 표현할 때는 먹을 더하여 얼굴과 목의 주름을 나타내고 입체감을 부여했다. 수화승인 영명 천기와 밑그림을 그린 대허 체훈, 만파 돈조(萬波 頓照)는 경선당 응석이 수화승을 맡은 개운사 괘불도 제작에도 참여했었다. 대허 체훈이 밑그림을 그리는데 개운사 괘불도에서의 작업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봉은사 괘불도는 19세기 말 유행했던 오존도의 구성으로 인물의 신체를 거대하게 괴체감 있게 표현한 점이 특징적이다. 대시주자로 기록된 이는 순화궁 김씨(順和宮 金氏, 1831~1907)로 그녀는 조선의 제24대 왕 헌종(憲宗)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金氏)이다. 또한 시주자를 모으는 인권(引勸)의 역할도 상궁(尙宮)이 위주가 되었는데, 19세기 새로운 후원 세력으로 대두된 비빈과 상궁 발원의 불화로 주목되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한국역대서화가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한국의 불화 화기집』(성보문화재연구원, 2011)
『조선후기승장인명사전』불교회화(안귀숙·최선일, 양사재, 2008)
「조계사 직할사암의 불화Ⅱ」(이용윤, 『한국의 불화』조계사 직할사암편(중), 성보문화재연구원, 20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6-2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