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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제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놓고 저에게 유대인이냐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명확히 말하거니와, 이 세상의 아무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구원얻은 다음에 성화되는 과정도 율법을 좇아서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도가 율법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살다보면 성령께서는 율법중 도덕법을 위반하시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인도하심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분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시며(롬 8:4) 율법을 세웁니다(롬 3:31) . 뿐만 아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 있습니다(히 10:16) 그리하여 속사람은 그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롬 7:22) 이것이 틀렸습니까?
이것을 안믿는 사람들이 따라가는 지침은 양심의 법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양심보다 훨씬 체계화 되어 있고, 훨씬 더 빠르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다른 사람들과 공통된 해석에 빨리 이르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제사법은 이미 십자가에서 보다 강력하고 완벽하게 성취되었지만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요한 웨슬레, 스펄젼, 무디, 캠벨 모간, 마르틴 루터의 해석이었고 아래의 존 칼빈의 해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공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침례교 신앙고백, 등의 여러 교단들이 율법이 여전히 성도들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유명 기독교인들이 한결같이 율법을 도덕법과 의식법으로 구분하고 도덕법이 영원히 유효함을 증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칼빈의 여러 교리들에 반대해왔기 때문에 이 글을 올리지 않았습니다만 그의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므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유아세례, 성직자 제도, 침례중생주의, 예정론 등에대해 저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의 다음과 같은 해석은 들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다음의 칼빈 주장을 읽어보십시오.
존 칼빈
율법에 관한 기독교 강요와 금언집 글
John Calvin
John Calvin wrote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Book 2, Chapter 7
6. That the whole matter may be made clearer, let us take a succinct view of the office and use of the Moral Law. Now this office and use seems to me to consist of three parts.
7. Thus the Law is a kind of mirror. As in a mirror we discover any stains upon our face, so in the Law we behold, first, our impotence; then, in consequence of it, our iniquity; and, finally, the curse, as the consequence of both. He who has no power of following righteousness is necessarily plunged in the mire of iniquity, and this iniquity is immediately followed by the curse. Accordingly, the greater the transgression of which the Law convicts us, the severer the judgment to which we are exposed. To this effect is the Apostle’s declaration, that “by the law is the knowledge of sin,” (Rom. 3:20). By these words, he only points out the first office of the Law as experienced by sinners not yet regenerated.... that divesting themselves of an absurd opinion of their own virtue, they may perceive how they are wholly dependent on the hand of God; that feeling how naked and destitute they are, they may take refuge in his mercy, rely upon it, and cover themselves up entirely with it; renouncing all righteousness and merit, and clinging to mercy alone, as offered in Christ to all who long and look for it in true faith.
6. 모든 문제는 보다 명백하게 될 수 있습니다. 도덕법의 역할과 용도를 살펴봅니다. 이제 이 역할과 용도는 세부분으로 자에게는 보입니다. 7. 그리하여 율법은 일종의 거울입니다. 거울안에서처럼 우리는 우리 얼굴에 묻은 때를 발견하며 우리가 보는 율법으로 먼저 우리는 무능, 그리고는 그것의 결과로서 불의, 끝으로 그 둘의 결과로서의 저주를 봅니다
의를 좇을 능력이 없는 자는 필연적으로 불의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이 불의에는 즉시 저주가 따르게 됩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범법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당하게될 심판은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여 사도는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 이라고 (롬 3:20)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에 의해 그는 단지 율법의 첫번째 역할만 지적하는데,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에 의해 경험되는 바이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의 미덕에 대한 비합리적 견해를 벗어버리도록 함이며 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존하도록 함이며, 그들이 얼마나 벌거벗었으며, 얼마나 결핍되었는지를 느끼고, 그분의 자비에 도피하게 하고 그것에 의존하게 하며 그들 스스로를 그것으로 완전히 덮을 수 있도록 함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의와 장점을 버리고 오직 자비에만 달라붙게 하는데 진정한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찾는 모든 자에게 그리스도안에서 제공된 바와 같습니다.
10. The second office of the Law is, by means of its fearful denunciations and the consequent dread of punishment, to curb those who, unless forced, have no regard for rectitude and justice.
12. The third use of the Law (being also the principal use, and more closely connected with its proper end) has respect to believers in whose hearts the Spirit of God already flourishes and reigns. For although the Law is written and engraven on their hearts by the finger of God, that is, although they are so influenced and actuated by the Spirit, that they desire to obey God, there are two ways in which they still profit in the Law. For it is the best instrument for enabling them daily to learn with greater truth and certainty what that will of the Lord is which they aspire to follow, and to confirm! them in this knowledge; just as a servant who desires with all his soul to approve himself to his master, must still observe, and be careful to ascertain his master’s dispositions, that he may comport himself in accommodation to them. Let none of us deem ourselves exempt from this necessity, for none have as yet attained to such a degree of wisdom, as that they may not, by the daily instruction of the Law, advance to a purer knowledge of the Divine will.
10. 율법의 우선적 역할은 그것의 무서운 배척과 형벌에 수반되는 공포를 통해 강제없이는 바르게함과 정의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자들을 재갈물리는 것입니다.
12. 율법의 세번째 용도는 기본 용도이기도 하며 그것의 본질적 목적과 보다 관련되기도 하였는데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이 이미 번성하고 통치하고 있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율법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그들의 마음에 쓰여졌고 새겨졌지만,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을 순종하기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그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상의 방법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매일 보다 큰 진리와 확신으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게 해주고 그것들을 이 지식으로 확인하게 해줍니다. 사환이 그의 주인에게 자신을 인정받게 하려고 자신의 온 영혼으로 힘쓰면서 사환이 그의 주인의 명령들을 준수하고 관심을 가져야하는것처럼, 그도 그것들에 익숙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아직 그러한 정도의 지혜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율법의 매일의 지도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순전히 깨닫는데에 나아가야 합니다.
13. Some unskilful persons, from not attending to this, boldly discard the whole law of Moses, and do away with both its Tables, imagining it unchristian to adhere to a doctrine which contains the ministration of death. Far from our thoughts be this profane notion.
13. 어떤 능숙하지(잘 알지) 못한 사람들은 이점에 주목하지 못하고 담대히 모쉐의 율법 자체를 무시, 폐기하며 그것의 두 돌판들을 없이합니다. 사망을 섬기는 것이 포함된 교훈에 집착하는 것은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들이 이러한 패역한 인식들을 가져서는 안되겠습니다.
14. let us distinguish accurately between what has been abrogated in the Law, and what still remains in force. When the Lord declares, that he came not to destroy the Law, but to fulfil (Mt. 5:17); that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one jot or little shall remain unfulfilled; he shows that his advent was not to derogate, in any degree, from the observance of the Law. And justly, since the very end of his coming was to remedy the transgression of the Law. Therefore, the doctrine of the Law has not been infringed by Christ, but remains, that, by teaching, admonishing, rebuking, and correcting, it may fit and prepare us for every good work.
14. 율법에서 철회된 것과 여전히 남아 유효한 것을 정확히 구분해봅시다.
주께서 선언하셨을 때, 그분은 율법을 폐기하러 오시지 않았고 대신 그것을 성취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하늘과 땅이 없어질때까지 일점 일획도 성취되지 않은 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분이 보이신 바는 그분의 강림이 어떤 정도도, 조금도, 율법의 준수로부터 물러서게 하도록 오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당하게도 그분의 오심의 목적 자체가 율법의 범법함을 시정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교훈은 그리스도에 의해 손상당하지 않았으며 가르치고 권면하며 책망하고 바로 잡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적합하게하며 준비되게 해줍니다.
From ONE HUNDRED APHORISMS, book two: #22. Christ is exhibited to men by the Law and by the Gospel.
#23. The Law is threefold:
Ceremonial,
Judicial,
Moral.
The use of the Ceremonial Law is repealed, its effect is perpetual.
The Judicial or Political Law was peculiar to the Jews, and has been set aside,
while that universal justice which is described in the Moral Law remains. The latter, or Moral Law, the object of which is to cherish and maintain godliness and righteousness, is perpetual, and is incumbent on all.
일백 금언들, 2권 22항에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나타내졌다.
율법은 삼중적이다.
의식법
사법정의의 법
도덕법
의식법은 폐기되었으나 그것(그것을 대신한 십자가 희생)의 효력은 영원하다.
사법 행정법, 정치법은 유대인들에 독특했던 것으로 그것은 (이방인시대에) 제쳐졌다.
도덕법에 기술된 보편적 (우주적) 정의는 여전히 남아있다.
후자 곧 도덕법은 그것의 목적이 경건, 의로움의 성취와 유지인데,
그것은 영속적이며, 모든 사람에게 기속력을 갖습니다.(의무 지워집니다)
24. The use of the Moral Law is threefold. The first use shows our weakness, unrighteousness, and condemnation; not that we may despair, but that we may flee to Christ. The second is, that those who are not moved by promises, may be urged by the terror of threatenings. The third is, that we may know what is the will of God;
"We must not imagine that the coming of Christ has freed us from the authority of the law: for it is the eternal rule of a devout and holy life, and must, therefore, be as unchangeable, as the justice of God, which it embraced, is constant and uniform."
http://dedication.www3.50megs.com/greatmen.html
도덕법의 용도는 삼중적입니다.
첫번째 용도는 우리의 연약함, 불의, 정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하도록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우리가 피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의 용도는 약속들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위협에 의해 자극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셋째 용도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율법의 권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상상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건(독실)하고 거룩한 삶의 영원한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법정의가 항상 일정하고 일관성있는 것처럼 불가변해야 합니다.”
(번역 하토브)
첫댓글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그 보상으로서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의 문제 곧 우리가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지와
그 공로로 확실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율법의 무력함이 나타난다.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우리는 약속된 생명을 받을 수 없고 다시 순전한 저주로 떨어진다.”
위 말은 '칼빈'이 한 말입니다. ◀ 하토브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덕법에서도 자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덕법으로 정죄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도덕법을 범했다고 우리의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취소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칼빈은 [기독교강요 2부] 7장 15절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율법은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 하토브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번 명확히 말하거니와, 이 세상의 아무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구원얻은 다음에 성화되는 과정도 율법을 좇아서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토브-
도덕법의 용도는 삼중적입니다.
첫번째 용도는 우리의 연약함, 불의, 정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하도록 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우리가 피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의 용도는 약속들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위협에 의해 자극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셋째 용도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율법의 권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상상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건(독실)하고 거룩한 삶의 영원한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법정의가 항상 일정하고 일관성있는 것처럼 불가변해야 합니다.”
(번역 하토브)
하트브님께서 직접 등록한 게시물 160번 글[경계해야 할 양대전선] 중에서 .. 사랑님 참고바랍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며,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 하토브님의 말입니다.
내이름 거론하지마십시오 율법버리고 편하게 사세요~
님은 노년이 엄청 외로울 겁니다 인터넷상에서 사람이 직접 보이지 않은다고 해서 싫다는사람끝없이 이름들먹이며
스토커 하지만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결국은 님곁에 아무도 남지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하기에 일방적인 댓글 태러를 자행하는겁니다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간섭 쟁이로 유명해질겁니다 님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님~ 잘 생각해보세요 ^^
성령께서 지켜주심을 목도하는 것이지요. 그분이 지켜 나가심을 보고 찬양하며 안식하는 것입니다.
하토브님~ 저 위에 있는 두개의 질문에 답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토브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독네티즌님은 끝없이 실시간말을바꾸는 자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관해서 수백번 똑같은 질문하고 답을해주면 한글자도 안보고 또다시 율법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하고 앵무새 작렬발언을 합니다
그리고 양심도마비가되어서 상대방이 싫다는행위를 끝없이하는 양심불량자입니다
율법을 버린자의현주소입니다
디모데전서 1:5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 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도덕법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이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도덕법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 저주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독네티즌 법이겠지요~님이 만들어낸 기독네티즌법 해서 끝없이 율법을 버리는행위를 하지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지요 그들도 님처럼 성경구절을 도배를 하고다녔지요 하지만 그들은 말따로 행동 따로였지요
전혀 성경말씀을 지키지않았지요 입으로는 성경구절외치고 행동은 자기법=자기율법으로 살았지요
해서 1초간격으로 말이 바뀌고 거짓말하고 자기를 알아주지않는다고 땡깡부리고 귀찮게해서 사람을 질려버리게 하지요 각오하세요 네티즌 님처럼 그런행위가 차곡차곡쌓이면 혈육들도 님을 떠나는 날이옵니다
<< 그러므로 율법의 교훈은 그리스도에 의해 손상당하지 않았으며 가르치고 권면하며 책망하고 바로 잡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적합하게하며 준비되게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말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바로 거울이요, 책망과 바르게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 또한 칼빈은 [기독교강요 2부] 7장 15절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율법은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 이런 말이 어디에있습니까? 기독네티즌님이 제조해낸 말로 들리는데요?
이 번역이 잘못된 사실은 이미 제가 쓴글 칼빈과 율법에서 비교 설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증거인데 바로 율법 폐기론자들은 남이 반박한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말만 앵무새처럼 계속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미 제가 로마서 8장 1절의 번역상의 차이를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마태 13장 13절을 들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라고 설묭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라도 칼빈과 율법이라는 글로 다시 돌아가서 그 번역이 엉터리임을 확인해오시기 바랍니다.
<<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덕법에서도 자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덕법으로 정죄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도덕법을 범했다고 우리의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취소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
크게 오해하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도덕법을 안지키면 구원을 못얻는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여김을 받으리라 하신 말씀은 바로 그들이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며 믿는 자들인데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로 여김을 받는다고 말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지키는 무법주의란 말입니다요! 은혜 무법주의라 하지요!
<<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덕법에서도 자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덕법으로 정죄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이것이 바로 은혜무법주의라는 것입니다. 양심에 철판깔고 다니는 것이지요. 이러하니 간통을 해도 정죄되지 않는 양심에 철판 깐 사람들을 양성해내는 무법주의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며 오히려 의롭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으면서 동시에 복음 아래 있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율법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복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은 율법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곧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는 의미와 이제는 율법에 의해서 정죄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할례와 각종 절기,그리고 제사와 여러 민법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지킨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율법 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며
그는 율법의 저주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나 신앙적인 유익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단순히 율법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참조 갈 5:4)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주의(갈라디안주의 포함)와 방종주의(무법주의)는 경계대상이 맞습니다.
율법주의란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각종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이며
넓은 의미로는 자기 행위로 구원을 비롯한 각종 복을 얻으려거나
하나님 앞에 공로를 쌓아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는 사상입니다.
또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행위로 구원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이 부류에 넣을 수 있습니다.
<<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그 보상으로서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의 문제 곧 우리가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지와
그 공로로 확실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율법의 무력함이 나타난다.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우리는 약속된 생명을 받을 수 없고 다시 순전한 저주로 떨어진다.”
위 말은 '칼빈'이 한 말입니다 >> 칼빈이 어디에서 그런 말을 했지요?
이 글에 대한 근거를 못 가져오십니다. 칼빈은 그런 말을 한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답은 못하고서 이 다음에 또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앵무새 반복입니다.
사실 우리는 허물투성입니다. 날마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심으로, 우리는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정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허물이 많지만, 날마다 우리를 용납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 기쁨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고 충성으로 승화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로마서 7장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아멘.
<< 율법은 죄인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며 오히려 의롭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으면서 동시에 복음 아래 있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율법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복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은 율법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 계속하여 죄를 즐기기 위해 율법이 거추장 스럽게 보인다는 말로 들립니다. 성령님께서는 율법이 요구 조건을 항상 충족시키십니다. 그것이 싫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사랑 방탕주의올시다! 디한 박사의 율법이냐 은혜냐를 언제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님이 기저귀 차고 엄마 쭈쭈 먹을 때 읽었지요!
우선 칼빈 번역이나 똑바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그런 심오한 번역을 발견하셨습니까?
<< 우리는 도덕법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이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도덕법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 저주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이 말은 서로 모순되는 말들을 포함하고 잇습니다.
도덕법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가 도덕법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율법의 정죄로 저주가운데 처해있을 것입니다- 이말은 서로 다른 말들로 정신 분열 증세가 있을 때 나오는 모순된 말들입니다.
<< “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율법의 권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상상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건(독실)하고 거룩한 삶의 영원한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법정의가 항상 일정하고 일관성있는 것처럼 불가변해야 합니다.” >>
이 말에 반대하십니까?
율법 폐기론자들은 왜 이렇게 말을 바꾸거나 칼빈이 하지도 않은 말을 가져옵니까? 이것을 저는 엎어치기와 뒤집어 씌우기라는 유도로 웃어버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혈기밖에 더 나겠습니까? 칼빈이 쓴 말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직까지 꽥 꽥 소리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글들을 분석하여 잘못을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버린자는 마음대로 죄를짓습니다 그리고는 율법의 정죄함에서 벗어났다고 스스로 거짓위안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영혼은 안식을 얻지못한채 항상 불안하기만 할뿐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을 하지말아야 하는지 분별력이 없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염치도 없고
수많은 사람쫓아다니며 자기가 거듭난사람이라고 땡깡을부리고 상대방입에서 그래요 당신은 거듭난사람이맞군요
하는소리를들어야 잠시 위안을 받는자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자입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은 절대로 이런 글에 반박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저에게는 꽥꽥 꽥꽥 소리하는데, 여기에는 꽥 소리 못하는 것입니다. 이 글에 자신있게 반박할 수 있는 분은 위의 글을 분석하여 반박해보십시오! 요한 웨슬레, 스펄젼의 글도 대기중입니다!
로마서 7장 6절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
율법에 대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하여 벗어난 새생명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새생명은 율법을 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좋습니다. 한국 시민권자로 한국에서 살다가 한국인으로서는 죽었든지 이민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살기는 한국에서 삽니다. 그렇다고 한국법 무시합니까? 물론 혹시 무시하여 범법해도 미국으로 돌아가는데는 지장없습니다. 그래도 한국법은 지킵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은 스스로를 무법주의자라고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주장할 때 다음 구절을 근거로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말을 강조합니다.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
그러면 신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요?
반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간다면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지 못했네요?
로마서 8장 4절을 이루어가면, 로마서 3장 31절 처럼 율법을 세우면, 율법에서 자유하게 된 것이 아니지요?
바울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 한다고 롬 7장 22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는 율법 아래 있습니까?
<< 즉 할례와 각종 절기,그리고 제사와 여러 민법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지킨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할례, 의식법이 폐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법이 성령의 법 안에 수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논점이라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