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짜집기하고 어느 부분은 통째로 잘라 먹었던 예전의 교양도서 '안네의 일기'가
아닌 무삭제 완전판이라는 14살 소녀의 2년여에 걸친 방대한 일기를 읽었다.
섬세한 감성과 강한 주관을 지닌 마냥 어리지도 성숙하지도 않은 안네.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매일매일 고백하듯 편지를 쓰는 이 소녀에게서
인종과 국가, 나이를 뛰어넘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됐든 나 역시도
열네살의 소녀시절을 겪었기 때문일거다.
활발하고 재치있으며 늘 사람들사이에 둘러쌓여 있으면서도 가족에게서도 친구에게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기댈 마음의 통로를 찾아낼 수 없었던 소녀에게는
그야말로 이 일기장이 그녀의 위안이자 친구였다.
그녀의 솔직함이 뭍어나는 일기장을 보면서 나 역시도 일기를 쓰지만 완전히 솔직해지지
못했던 적이 많았던 것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 일기장이 100% 비밀이 보장되지 않으리라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는 이런 불안감 때문에 '키티'와 같은 마음의 친구를 놓쳤던 게 아닐까..
꿈많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던 소녀가 어둡고 열악한 다락방 은둔생활 속에서도
이토록 솔직하고 사랑스럽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게 정말 감탄스러웠다.
그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결국은 시대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은둔생활 2년여 만에 독일 비밀 경찰에게 발각되어 아우슈비츠에 수용된지 일곱달만에
안네는 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고, 안네가 죽은지 불과 한달이 조금 넘어 아우슈비츠는
해방의 날을 맞는다. 함께 숨어 생활했던 8명의 유대인 중 생존자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 단 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딸의 소망대로 일기를 모아 책을
내었지만 이는 검열을 거친 소위 저항문학으로서 반쪽자리 일기였다.
오토 프랑크 사후, 무삭제 완전판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아진 이 책 역시 그 전부에 대해
진정성을 100프로 신뢰할 순 없더라도, 시대가 파괴한 안네의 문학적 재능, 감수성 예민한
자아를 안타까워 하기에는 모자라지 않다.
그 시대가 집어삼킨 수많은 안네들에 대해 가슴이 아파지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 어이없었던 것은 이 일기에 여성문학이니, 페미니즘의 꽃이라느니 쓸데없는
수식어구를 갖다붙이지 못해 안달인 이해불능의 이분법자들.
안네 역시 여자였기에 가졌던 여성으로서의 생각, 시선들을 왜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분류에 끼워넣어 억지춘향을 만들려는 것인지 그런 인간들의 속이 궁금하다.
시대적 배경도 배경이지만, 그 또래 소녀들과는 남다르게 표현력이 뛰어나고
자아가 뚜렸했던 안네이기에 그녀의 일기는 전세계적인 애독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뿐,
안네가 살아있었더라면 자신의 일기에 이런저런 꼬리말을 달아내는 이러한 작자들을 100% 못 견뎌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가족이나 친구들한테보다는 그래도 일기장에서 더 솔직해진다.
부디 앞으로 쓰여질 일기에서는 쓰고 싶었으나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안네의 일기장을
생각하면서 더 솔직하게, 더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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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너의 쓰여지지 않은 일기들이 더 아쉬운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네게 전해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카페 게시글
글쟁이 비평방。
[기타]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아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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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26 01:5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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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네의 일기를 여지껏 세번 읽었는데 읽을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더라구요. 처음엔 초딩때, 두번짼 고딩때 세번짼 25살때... 내용에서 벗어나 좀쌩뚱맞긴 하지만 안네의 일기를 읽은 후부터 저도 지금까지 일기를쓰고 있답니다. 초등학교때부터 썼던 일기들을 들춰보면 정말 여러가지 추억들이 새록새록 합니다.
나도 안네의 일기를 2 번 읽었는데 한 번은 사춘기 때 한 번은 네델란드의 주말 농장의 작은 방구석에서 예요. 어려서 읽었던 때의 기억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네델란드에서 읽었을 때는 남의 귀한 삶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그리고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는 것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