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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종려주일 설교
제목 : 종려주일은 다윗처럼!
본문 : 마태복음 21장 8~9절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새번역>
유대인들에게 ‘다윗’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아’와 관련하여 절대적인 지분을 가진 인물입니다. 물론 어린 시절 양치기 다윗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의 행보와 비슷한 메시아가 이 땅에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고, 다윗 왕처럼 다스렸던 왕의 통치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도 그런 다윗 같은 왕이 메시아로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이런 바램과 상황들을 뒷받침해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너의 생애가 다하여서, 네가 너의 조상들과 함께 묻히면, 내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바로 그가 나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토록 튼튼하게 하여 주겠다. <사무엘하 7장 12~13절, 새번역>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이사야 9장 6~7절, 새번역>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예레미야 33장 15절, 새번역>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가 5장 2절, 새번역>
그런데 정작 신기한 것은 다윗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회상과 추억뿐이지 그를 닮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들이 그 다윗처럼 될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다윗 왕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이 8형제 중 막내였던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신 것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 터인데 그냥 ‘다윗 왕’을 그리워만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저 바라기만 할 뿐 닮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또한 그들이 꿈꾸는 다윗은 왕이었던 다윗이지만, 정작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셨을 때는 다윗이 양을 치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윗 왕’에 대해서 말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다윗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묵상과 가르침은 잘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동기를 보시고 유대인들은 결과를 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읽었던 본문처럼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앞에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들이 모두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자신들이 꿈꾸던 그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기에 그들의 기쁨은 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진짜 마음은 여전히 불안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이 조금 많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오셨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 일거라고 애써 불안함을 없앴을 것입니다. 이제 로마를 물리치고,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이스라엘이 다시금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는 입성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 봤던 것처럼 이제 배고플 일이 없을 것이고,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이 날마다 이어져 영생을 꿈꾸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픔도 없고, 그저 행복한 일정이 기다릴 것만 같았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가 왕이 되면 이제 12제자는 주요 요직에 앉을 수 있다는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시는 예수님 옆에서 얼마나 우쭐대며 걸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만으로 온 도시가 들뜨기 시작했고 저마다 예수님의 정체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했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예루살렘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가장 먼저 하신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읽었던 본문 마태복음 21장의 이어지는 본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태복음 21장 12절, 새번역>
이 행동을 시작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길을 조금도 걷지 않으십니다. 완전히 다른, 진짜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었고, 생명의 길이었고, 모든 인류를 죄에서 살리기 위한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한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예수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선동에 넘어가 예수가 거짓 선지자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단 사이비 교주라고 몰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던 군중은 이렇게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마태복음 27장 23절, 새번역>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요?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사실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진짜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종려주일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쳤던 사람들의 진짜 속내에 대해서 다시금 묵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날 그 때 예루살렘 거리에 있던 사람들처럼 모셔 들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진짜 속내를 숨긴 채로 거짓 입술로 고백하는 모습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 순수함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던 다윗 왕이 가졌던 순수함입니다. 어린 시절 다윗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순수함을 오늘 우리 모두도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중심으로부터 오는 순수함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사무엘상 16장 7절, 새번역>
이 말씀은 사무엘이 이새의 첫 번째 아들 엘리압을 보고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앞에 나와 섰구나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오히려 다윗을 더욱 더 빛나게 해 주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제외한 이새의 일곱 아들은 모두 겉과 속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중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 올바르게 서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새가 나머지 일곱 형들을 다 불러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다윗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형들만 불렀다니 서운할 수도 있고, 자신도 그 자리로 가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심의 순수함은 결코 엄청난 그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계산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입니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계산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훗날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자꾸만 하나님을 위한 성을 자신의 손으로 꼭 지으려는 욕심을 드러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순수함을 회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이렇게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사무엘하 7장 8절, 새번역>
하나님은 마음과 행동의 일치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심의 순수함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의 행동, 자발적인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중심의 순수함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동일하게 매듭을 짓는 것을 원하십니다. 처음 마음 그대로 끝까지 잘 마무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중심의 순수함을 가진 이들의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에 작은 일과 큰 일이라는 구분을 하지 않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작은 일에는 관심이 없고, 큰 일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 것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마태복음 25장 21절, 새번역>
가장 중요한 중심의 순수함은 이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다윗이야말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옆으로는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 시절 다윗처럼 중심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종려주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흡족한 우리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혹시 중심이 흐트러져 있으십니까? 지금 내 속과 겉이 너무도 다르십니까? 자발적 행동이 아닌 수동적이고 억지로 하는 행동입니까? 작은 일은 하찮게 보이고, 큰 일만 하고 싶으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대접 받는 것 같은데 나만 왜 이런 홀대를 받는 것 같은지 억울하십니까?
흐트러져 있음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리고 정리해 주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속과 겉이 너무도 다르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수동적이고 억지로 하는 행동을 멈추어야 합니다. 작은 일은 하찮기만 하고 큰 일만 눈에 보일 때는 다시 말씀으로 눈을 돌려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자존감이 하락해 있다면 이 종려주일 당신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를 권면하시면서 우리에게 중심의 순수함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기점으로 다시금 다윗처럼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순수함
그리고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만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 <사무엘하 6장 14절, 새번역>
이번에는 다윗이 왕이었던 시절에도 변함없이 보여주었던 순수함을 배워 볼까 합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주님의 궤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다윗 성’으로 돌아왔을 때, 다윗과 온 이스라엘 가문은 환호성을 질렀고, 온 이스라엘의 축제가 시작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축제 가장 앞에 서서, 그 축제를 이끌며, 전심으로 기뻐했던 인물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왕의 체통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주님의 궤가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 너무도 기뻤고 행복했던 다윗이었습니다. 눈치 볼 필요도 없었고, 신경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모시로 만든 에봇을 입었든, 어떤 옷을 입었든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다윗입니다. 그저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습니다. 온 몸으로, 온 맘으로 주님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사실 매 해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큰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합니다. 어차피 반복적인 절기인대 굳이 지켜야 할 필요가 있을까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빨리, 확실하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존재인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정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절기들을 보내기 시작하면 하나님도 우리 안에서 점점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분들이 이미 경험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종려주일이 아니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 묵상하지도 않고, 고난주간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지 않으면 나를 위한 십자가가 은혜임이 점점 흐릿해지며, 부활주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큰 소망인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매 주마다 돌아오는 예배에 오히려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궤가 다시 돌아온 것으로도 기뻐했지만, 이제 그 주님의 궤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뻤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주님의 궤 앞에서 매일 같이 전심으로 기뻐 춤을 출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에 더욱 기뻤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있으십니까? 정말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너무도 미안하면서도 감사한 일 중에 하나는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그래서 예배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버릴 때도 있지만, 언제든 어디서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가 이 땅에 가득하다는 것은 진짜 축복인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싶어도 드리지 못하고, 찬양하고 싶어도 찬양하지 못하는 그런 환경에 있는 곳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 나라도 이렇게 자유로운 환경이 주어진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분명 훨씬 더 은혜의 환경에 우리가 놓여 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매 순간, 매 주일에 다윗처럼 최선을 다하는 순수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회복이고,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의 회복이고, 일상의 기쁨의 회복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다윗의 이런 전심의 순수함을 비난하는 이가 있고, 매너리즘에 빠져 별로 큰 의미를 두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로 그 대표자가 다윗의 아내, 사울의 딸 ‘미갈’이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맞으러 나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무엘하 6장 20절B, 새번역>
이 말을 듣고 난 후 다윗이 어떻게 대답하신 줄 아십니까? 간절히 바라기는 다윗의 대답이 오늘 순수함을 회복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대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 <사무엘하 6장 21~22절, 새번역>
이런 대답을 하는 다윗이 어찌 하나님의 기쁨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 대답이야말로 하나님을 대하는 다윗의 순수함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더 낮아져도 상관이 없다!” 이것이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종려주일에 순수함을 회복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선포이기를 소망합니다. 누군가 ‘당신은 왜 매 주 똑같은 예배를 그렇게 최선을 다해 기쁨으로 드리는 것입니까?’ 라는 허무함 가득한 질문을 한다면, 오히려 넘치는 기쁨으로 이렇게 다윗처럼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윗처럼’ 순수함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매 해 반복되는 종려주일이지만, 매 해 이 순간만큼은 다시금 세상에 찌들고, 하나님 아닌 것들로 변질된 모든 것을 다시 순수하게 회복시키는 날의 시작점으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시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로 중심의 순수함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순수함으로 나아가는 주일로 보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중심의 순수함을 가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중심으로 이 종려주일을 보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이 예배부터 최선을 다하는 순수함을 가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최선으로 이 종려주일을 보내길 원하십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 가운데로 입성하길 원하십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를 외치는 동시에 ‘다윗처럼’ 순수함으로, 순수함을 회복하며 보내는 종려주일이 되길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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