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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연구자 ; 김 주 안
1.작가 연보
유몽인(1559(명종)-1623(인조)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외교가로서 또 설화문학가였다. 본관은 고흥이고 자는 응문, 호는 어우당, 간재, 묵호자이다. 사간 충관의 손자로 진사 탱의 아들이었고 서울 명례방에서 태어났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성리서(性理書)를 배우고 신호(申護)에게 고문을 배우는 한편 틈틈이 서예를 익혔다. 전서. 예서. 해서. 초서에 모두 뛰어났고 이미 서른살에 天下萬卷書를 독파하여 구류(九流). 백가(百家). 천문(天文). 지지(地志). 상서(象胥). 언어(言語) 등에 통달하였다. 그는 문장에서 남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뛰어났으나, 경박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스승인 성혼의 책망을 받고 절교당하기도 하였다. 선조 15년에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중북(中北)의 영수(領袖)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연류되어 그의 아들과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 12권과 『어우야담』5권을 남겼다.
2. 어우야담이란?
야담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된 비교적 짤막한 길이의 잡다한 이야기들의 총칭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내용, 성격의 이야기들이 뒤섞이어 매우 방만한 군집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야담의 특징이다. 서사시 요소가 강하여 ‘한문단편’이라 하기도 하고 한두가지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어 길이가 짧으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근거한 구전적인 것이 많아 ‘문헌설화’라고 하기도 한다. 교훈적인 요소와 흥미성이 함께 결부되어 있으며 사회 윤리적 가치가 중시되기도 한다.
야담의 기원이나 발생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고려 후기 『역옹패설』같은 시화, 잡록류 문학에서 일화.기담 요소들이 발달하여 서거정의 『태평화화골계전 』같은 일화집이 이루어지면서 야담의 초기 형태가 성립하고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이르러 본격화 된 것이라고 본다. 이후에 『계서야담(溪西野談)』『청구야담(靑邱野談)』『동야휘집(東野彙集)』조선조 후기의 삼대 야담집의 결실을 보았다.
『어우야담』은 유몽인이 벼슬에서 물러나 서호에서 비교적 한가한 세월을 보내던 예순 세 살 때 문집(80여권)을 묶으며 함께 모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수백년동안 필사본으로 전하여 오다가 혹 권이 줄기도 하고 내용에도 적지 않은 이동이 생기게 되었다. 1964년 유몽인의 12대 종손인 유제한이 여러 필사본을 참고하여 부문별로 유취(類聚), 정리하여 5권 1책의 신식활자본을 간행하였다.
『어우야담』의 문체는 역어체, 산문체, 문어체로 씌여졌으며 임진왜란 전.후에 걸친 유명. 무영 인사들의 일화와 민간의 야담 등 야사와 가담항설(街談巷說)을 모은 야담집이다. 전대의 설화집에 올랐던 ‘기이(奇異)’ ‘희화적인 성(性)’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과는 달리 실제적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의 제시한 후 평결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학적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조선 사회, 경제적 현실은 물론 급격히 변모한 당대인의 가치관, 신분의식, 정신적 풍토까지도 사실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또한 유몽인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들이 기술되고 있어 작가적 특성이 짙게 묻어 있는 독특한 품격을 지닌 이야기들이다. 필치는 장자에 비유하고 있다는 평이 있으며 유몽인 자신은 이규보의 문장을 체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유몽인의 작가적 개성은 기발하고 자유분방한 상대주의적 사고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개성은 『어우야담』 소재의 이야기들에서도 개방적인 성격이 그대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3. 『어우야담』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들
작품의 내용이 다채롭고도 재미있어 오늘날 읽기에도 흥미진진하다. 역대 인물들과 관련된 일화가 많고 저자가 문인이었던 만큼 문인취향의 시문에 얽힌 시화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특정 시인의 시에 대한 구체적 품평, 시론, 작시에 얽힌 이야기등이 상당수이다. 그리고 독서에 바탕을 둔 해박한 식견을 보여주는 기록들, 삶의 교훈을 삼을만한 풍자와 해학이 담긴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매의 생태를 이용해 새끼 매를 잡는 방법이나 한국과 중국 풍속의차이점, 기독교와 마르코폴로의 천주실의에 대한 소개와 분석도 실려있다. 큰 소나무를 죽이지 않고 옮겨 심는 방법, 각종 지명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다. 초서를 잘 썼던 황기로와 성수침, 서예가 최홍효와 화가 안견, 임꺽정에게 붙잡히고도 피리를 잘 불어 풀려났던 종실 단산현감 이야기등 당대 예인(藝人)들의 이야기도 다수다. 김시습이 5세 때 이야기, 홍유손이나 장응두, 박지화와 정희량등 체제 밖의 방외로 떠돌았던 은사(隱士)와 도류(道流)들에 관한 기록도 풍부하다. 꿈에 얽힌 이야기,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수 십 항목에 달 할 만큼 많다. 그리고 단순한 흥미거리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대한 풍자나 교훈을 깃들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사들의 창작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고 시화의 구실로도 손색이 없다. 박충원과 신숙의 글쓰기에 대한 소개 끝에 ‘무릇 글을 지음에 어려운 점은 뜻을 세우는 것(命意)이지 문자는 단지 붓 끝에 달린 것일 뿐이다.“라고 한 말은 오늘 글 쓰는 사람들이 한 번쯤 유의해 볼 만한 말이다. 또 제목이 나오기도 전에 외워 써간 답안지를 베껴 쓰기 바쁜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풍자한 이야기들도 오늘의 입시 풍경과 비교해 볼 만 하다. 일상적인 사건에서부터 특수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에 관련된 사건 등 각양각색의 사건들이 다루어 지고 있다.
등장인물도 왕후장상으로부터 역관, 상인, 천민, 기녀, 무당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층의 인물군상들이 총 망라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5권에 모두 수록이 되어 있는데 상세하게 그 분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1은 인륜편(孝烈, 忠義,등) 권2는 종교편(僧侶. 西敎. 巫覡. 夢등), 권3은 학예편 (學藝 識鑑등) 권4는 사회편(科學, 求官.등) 권5는 만물편(天地 草木등)이다.
4. 작품감상
(11) 한명회의 위천조어도(渭川釣魚圖)와 김시습의 제시
한명회(韓明澮)가 위천조어도(渭川釣魚圖)를 얻었는데 지극히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가 명인의 시를 구하니 모두 다 “오세(五歲)의 시만이 이 그림과 걸맞을 걸세”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오세에게 방문해주기를 청하였더니 매월(梅月)이 송경(宋京)에서부터 와서 붓을 잡더니 즉시 썼다.
비바람 쓸쓸히 낚시터 휩쓰니
위천의 고기와 새 또한 세사를 잊도다.
어찌하여 노인은 응양한 장수 되어
백이와 숙제로 하여금 고사리 캐다 굶어죽게 하는가.
이 시는 품격이 맑고 시원하며 구절구절마다 풍자를 머금고 있는지라. 음송하면 아지 못하는 사이에 창연해지고 만다. (김시습은 5세에 이미 문장에 능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오세(五歲)라고 이름하였다.)
(18) 송강(松岡)의 시회(詩會)
조사수의 집에서 여러 문인들이 모여 시를 짓는 과정과 그 내영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 생각으로는’ 하면서 평을 곁들이고 있어 시화로서의 구실도 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종직의 시, 최경창 과 이달, 홍유손, 은사 장응두,등등 체제 변방에 있던 시인들의 시에 대한 시화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23) 김시습의 오세 시의 일화
김시습이 세조가 즉위하자 항거하는 마음에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두어 수염만 남겨 두고 머리털을 깎았다. 그래서 김시습이 5세때부터 능히 글을 지어 오세(五歲)라고 호를 지었는데 이를 오세(傲世) 즉 세상을 오만히 본다는 뜻을 담았다고 해석하였다. 시류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두고 있다. 그답게 재치있는 관찰이다.
(34) 이지번의 풍류
이지번(李之蕃)은 고매한 선비다. 공헌대왕(恭憲大王)조에 사평(司評)이 되었다. 그 때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제마음대로 부리면서 비리(非理)로 송사를 관결하려고 하자 이지번은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왔다. 단양강(丹陽江) 기슭에 초려(草廬)를 짓고 정신을 수양하니 기거하는 방에 밝은 빛이 생겨 나왔다. 여러 고을에서 그에게 양식을 제공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이를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집에 푸른 빛을 띤 소가 있었는데, 두 뿔 사이가 여덟・아홉 마디나 되었고 항상 이 소를 타고 강 위로 놀러 나갔다. 하루는 눈이 온산 가득히 쌓여 있었다. 푸른 빛 소를 타고 산기슭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였는데 그를 따라와 구경하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다만 어린아이 하나가 소를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이지번이 청아한 감흥을 이기지 못하고 어린아이를 돌아보며 “이 즐거움을 너 또한 아느냐”고 묻자 동자는 “소인은 추워서 즐거움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지번의 아들 산해(山海)는 그 당시 명망있던 부류였는데, 그와 사이가 좋았던 사람이 이지번을 기용하여 단양수령(丹陽守令)으로 삼았다. 그는 단양의 양 언덕 사이에 두 개의 봉우리가 대치하여 있는 것을 보고서 하늘을 날아 다니는 선인 놀이를 해보려 하였다. 그래서 관청에 송사하러 온 백성에게 칡으로 된 새끼줄을 구하여 두 개의 봉우리 사이에 걸쳐 놓고 날아 다니는 학의 모양을 만들어 사람이 그 위에 앉아 그것에 고리를 부착하여 새끼줄에 매달라 놓고 왕래하는데, 마치 공중을 나는 것 같았다. 백성들은 그 광경을 보고 그를 마치 신선과 같이 여겼다. -중략-
(100)말을 외방에서 자식은 서울에서 길러야
오성(鰲城) 부원군(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준마는 서울에서 낳으면 마땅히 외방으로 보내어 키워야 하고, 선비가 아들을 외방에서 낳으면 마땅히 서울로 보내어 키워야 한다.”
라고 했는데, 이는 진실로 격언(格言)이다.
근래에 서울은 궁핍하여 비록 준마가 있을지라도 먹여 기를 수 없으니, 준마의 제목됨을 이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외방에서 길러야 하는 것이다.
외방의 선비들은 힘써 공부할 수 없다. 비록 재능이 있어도 성취할 수 없으므로 아들을 성취시키고자 한다면 마땅히 서울에서 길러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조정 반열 중에 금대(金帶)・은대(銀帶)의 고위 품관자는 모두 서울 사람인데, 이는 조정의 사람 씀이 편벽된 것으로 말미암은 현상이 아니다. 근래 서울에서 유학(遊學)하는 자가 겪는 고초는, 옛날 외방에서 근무하던 조정의 선비가 겪는 고초보다 심하여 서울에서 오랫동안 벼슬살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슬프도다! 도성(都城) 십리에 인재가 얼마나 존재하길래 조정 가득한 청자(靑紫)들이 모두 그 가운데서 나온단 말인가? 지금, 용렬하면서도 좋은 관직을 꿈꾸는 자들이 서울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다면 외방의 선비들은 서울의 말새끼에 비유될 것이다.
(138) 논개와 관기의 절사(節死)
구전되어 오던 논개의 순국사실이 1620년 어우야담에서 문자화되었다. 이 야담에 채록되면서 순국한 바위를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는 것도 이 무렵이었다.
(142) 이임의 집안에 덕을 베푼 익명인
가정(嘉靖) 을사년에 사화(士禍)가 일어나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는데 반역으로 논의된 자들은 비록 골육지간이라도 돌보아주지 않았으니 그 나머지인들 어찌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어깨를 움추리며 낙담한 채 화를 피하기만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임(李瀮)은 그 사화에서 죽었는지라 처자들이 얼어 굶어 죽게 되었어도 알릴 곳이 없었다. 그런데 사맹(四孟)날, 즉 녹(祿)을 나누어주는 날이면 매번 이임 집안의 담장 안에 녹미(祿米) 다섯 말, 김치 한 그릇, 장 한 그릇을 한밤중에 몰래 두고 가는 자가 있었다. 주인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고, 그 사람 또한 자신이 아무개라고 밝히지 않았다. 이같이 하기를 오랫동안 하였어도 변함없이 하였다. 사화가 평정된 뒤에도 양쪽 집안에서는 여전히 알지 못했고 말해주지도 않았다.
옛 사람이 말한 바, ‘덕을 갚지 못할 자에게 내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리라. 이 일을 한 자는 아마 그 후대에 자손이 크게 번창했을 것이다.
(236) 김인복의 입담
시골 선비의 수정 갓끈을 탐낸 김인복이라는 사람이 수정 갓끈을 거금을 들여 사겠다고 하여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나서 쌀밥에 구운 밴댕이를 얹고 기름 장에 상추를 싸 먹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시골 선비의 입을 크게 벌리게 하여 수정 갓끈을 떨어뜨리게 하고는 집으로 돌려 보낸다. 구변이 좋고 해학을 잘 하는 김인복의 구수한 입담과 멍청한 시골 선비를 대비시킨 한편의 꽁트라고 할 수 있다.
(268) 주인의 원수를 갚은 유인숙의 계집종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기록이 되어 있고 명종때 탐욕스럽고 비루했던 대신 정순봉의 말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조판서 유인숙이 그의 사사로 인해 억울하게 사형에 처해지자 그의 노비들은 공신의 집에 하사된다. 정순봉의 집에도 많은 노비들이 귀속되었는데 그중 예쁜 한 계집종이 그의 눈에 들게 되었다. 그를 가까이 한 이후에 귀신이 나타나는 꿈을 번번히 꾸게 되고 마침내는 고질병을 앓아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 계집종이 먼저 주인님의 원수를 갚기위해 베갯속에 해골을 넣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절개와 의리를 기특하게 여기게 되었다.
(271)목란수
공주(公主) 관아 뜰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향이 강렬하고 잎이 넓었으며 꽃 색은 연한 자주빛이었고 가지와 줄기가 모두 아름다웠다. 관리들이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며 북돋아 증식시키면서도 옛부터 꽃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만력 무오년(戊午年 1618)에 명나라에서 표류해온 사람들이 공주를 지나가자,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나무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으니 그들 모두 ‘목란수(木蘭樹)’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 나무를 재배하여 심는 방법을 물으니 “가지만 잘라 심어도 모두 산다”고 대답하였다. 이로부터공주 사람들이 비로소 그 나무가 목란(木蘭)임을 알게 되었다.
아! 목란은 중국의 아름다운 나무이다. 처음부터 이 곳에서 자생한 것인지, 다른 곳에서 옮겨 심은 것인지, 아니면 전조(前朝)에서 배로 중국과 통행할 때 강남에서 옮겨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 나무는 뜰 가운데 서서 몇 년의 세월을 지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익히 보았는데도 목란임을 깨닫지 못하였다. 세상에 보기 드문 저리도 아름다운 나무가 뜰에 서있었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한탄스럽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은 고깃덩어리인가 아니면 밀랍인가! 오직 중국 사람들만이 그 나무를 알아볼 수 있는가!
(297) 장원 잣나무
강정대왕(康靖大王)이 성균관(成均館)에서 선비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밤에 용(龍)이 한 마리가 성균관 서쪽 뜰에 있는 잣나무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대왕은 이상하게 여기고 대궐의 종을 시켜 가만히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한 선비가 잣나무 아래에서 행랑을 베고 누워 발을 나무 위에 걸쳐 놓고 잠을 자고 있는지라 그의 모습을 익히 보고 기억해 두었다.
선비를 뽑고 보니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사람은 바로 최항(崔恒)이었는데 그의 모습을 본 즉 바로 예전의 그 사람이었다. 이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 잣나무라 칭하였다. 최항은 후에 관직이 상국(相國)에 이르렀다. (전문)
5. 맺는말
어우당 유몽인은 조선왕조 중기에 태어나 글과 글씨에 그 재주가 뛰어나 그 명성이 뛰어났으나 뜻밖에 역적과 연루된 혐의를 받아 65세를 일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어우야담』을 통하여 우리는 유몽인의 폭넓은 문학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야담은 독창적이고 획기적이며 다양한 화제를 담은 수문잡록(隨聞雜錄)이면서 설화문학의 일대보고로 문학사상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야담’이란 표제를 사용한 것도『어우야담』이 처음이었고 이전의 설화집은 귀신 이야기나 성(性)과 관련된 소화(笑話)에 치중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인간 삶의 제 측면을 포괄하는 다채로운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것을 생생하게 그려내어 그 서사의 폭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의미에서 문학사적인 의의를 충분히 지닌다는 평가이다.
항간에는 『어우야담에』수록된 많은 작품들을 근대소설로 보아야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수필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도 적잖게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러한 작품 성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결론을 예측불허하는 탁월한 구성적인 수법이다. 둘째 문맥이 거침이 없고 풍자적 요소와 해학적인 면은 독자들에게 한층 재미를 유발시킨다. 세째 작가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야기가 기술되고 있어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넷째 무엇보다도 사건이나 그 내용들을 제시하고 나서 작가의 사상이나 판단이 주제로 무리없이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수필을 쓰는 후학들에게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라고 사료된다.
※참고문헌: 한국문학강의 조동일외 6인공저 길벗 조선 야담의 문학적 특성 성기동 도서출판 민속원 어우야담 유몽인저, 시귀선 역, 한국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