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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십자군 4 : 예루살렘왕 고드프루아 사후 십자군 5개 기독교 왕국을 세우다!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7월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 1년 만에 고드프루아왕이 죽으니
멀리 에데사백작이던 동생 보두앵이 만난을 헤치고 달려와서 왕위를 이은 후에 레반트
에서는 2가지 뉴스가 생겼으니.... 하나는 2만을 거느리던 툴루즈백작 레몽이 몰락해 불과
3백명의 기사로 트리폴리, 다카스커스 및 홈스군을 격파하고 트리폴리백국을 세운 것입니다.
2번째 뉴스는 기독교 에데사백작인 보두앵과 조슐랭에 이슬람 모술 태수인 자왈리가 한편이고,
그 다른편은 기독교 안티오키아의 섭정 탄크레디와 알레포 태수 리드완이 힘을 합쳤으니
양군은 기묘한 전투를 벌였는데..... 하나는 욕심과 원망 때문이고 둘째는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면서 도우기로 한 서약 때문인데 이후 기독교 세계를 구한건 노르만족 탄크레디 입니다!
1차 십자군은 기병 8천명에 보병 4만 2천으로 1097년 6월 터키 니케아를 항복 받고 10월 하순
안티오키아에 도착해 8개월간 처절한 전투를 벌여 천신만고 끝에 함락한 후에는 레몽과 싸운
보에몽이 차지했는데..... 이후 십자군은 해안을 따라 남하해 숱한 전투를 치르고는 베들레헴
을 거쳐 예루살렘성을 포위해 공격 끝에 마침내 1099년 7월 15일 성도 예루살렘을 수복합니다.
그 1년 후인 1100년 7월 18일에 예루살렘왕 고드프루아가 죽자 대주교는 종부성사를 하면서
예루살렘을 로마 교회에 바치는 유언을 하라고 거듭 종용했지만 고드프루아는 숨이 넘어
가면서도 단 한마디 말을 안했으니 부르고뉴 기사는 그 뜻을 알아듣고는 장례식후 다윗탑
을 수중에 넣고, 고드프루아의 동생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에게 빨리 오라는 급보를 보냅니다.
장례식후 탄크레디는 아코(아크레)로 달려갔으나 함락되지 않자 하이파를 점령하니 1년전에는 야파
뿐이던 항구가 베이루트, 시돈, 하이파, 카이사레아, 아르수프, 야파, 아스칼론 등 7개로 늘어
났는데....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은 말라티아가 귀순하겠다는 말을 믿고 갔다가 셀주크 영주
다니슈멘드의 매복에 걸리자 한 병사에게 자기 머리카락을 에데사의 보두앵에게 보낸후 항복합니다.
다니슈멘드는 보에몽을 흑해에 가까운 니크사르 외딴 성에 감금하니 안티오키아에서는 누구도 행방
을 몰랐는데.... 레몽 백작 마저 콘스탄티노플로 가버린자라 에데사의 보두앵은 너무 급한 나머지
140명으로 멜리테네로 달려가니, 예상치 못한 적은 병사를 보고는 다니슈멘드는 대군이 뒤따라
온다고 믿어 후퇴하는데 보두앵은 8월말 에데사로 돌아온 후에야 형 고드프루아가 죽은걸 압니다.
보두앵은 사촌인 동명의 보두앵에게 에데사백국 통치를 맡기고는 10월 2일 기병 2백명과 보병 7백명을
데리고 출발해 안티오키아로 가서 보에몽이 잡힌 후 일어난 사태를 수습하고는..... 라타키아로 남하
하는데, 다마스크스 영주 두카크의 이슬람군에게 방해를 받으면서 트리폴리에 도착하니 병력은 기병
160명과 보병 500명으로 줄었는데 두카크와 사이가 나쁜 이슬람 트리폴리 태수는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이슬람 트리폴리 태수는 심지어 남쪽 개의 강에 두카크의 다마스커스군 병사들이 매복했다는
정보까지 알려주는데..... 보두앵은 매복한 적병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처럼 강을 건너는
척 하다가, 후미에 배치한 최정예 병사들이 오히려 갑자기 매복한 이슬람군을 공격하는데
좁은 강 기슭이니........ 대병이 진을 펼치지 못하는지라 다마스쿠스군은 패해서 도주합니다.
이후 보두앵은 고드프루아가 점령한 항구는 물론이고 이집트인 태수가 다스리는 티루스 조차
환영하는지라.... 쉽게 통과해 38일 만인 11월 9일 예루살렘에 도착해 대주교 다임베르트를
만나 그가 지위를 이용해 부정축재를 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해서는 예루살렘왕
의 영역에 절대 손대지 말라고 협상을 하고는 12월 25일 대주교로 부터 대관식을 받게 됩니다.
그런후 갈릴리로 찾아가 탄크레디에게 포로(혹은 사망?)가 된 백부 보에몽을 대신해 안티오키아
공국을 맡아달라고 하자.... 탄크레디는 3년 안으로 백부 보에몽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공작령을 차지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보두앵의 동의를 얻은 후에 안티오키아로 가는데.....
바그다드의 압바스왕조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절호의 기회인 이 반년을 활용하지 못합니다?
이무렵 밀라노 대주교가 선동해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에다가
독일 순례자들이 1100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오니, 1차 십자군으로 왔다가 귀국하던
블루아 백작 에티엔과 프라스왕의 동생 위그백작도 있었는데, 비잔틴 황제는 이들을
이용해서 터키 영토를 회복 하고자 했으니...... 툴루즈 백작 레몽을 총대장으로 임명합니다.
이들은 터키에서 남쪽이 아닌 동쪽 앙카라로 진군했는데 다니슈멘드에게 잡혀 있는 보에몽을 구출
하고자 했으나...... 셀주크 투르크인들은 도중에 이들을 습격하니 수많은 십자군이 죽고 레몽은
콘스탄티노플로, 그리고 블루아 백작과 위그 백작은 간신히 몸만 빼 내서는 남쪽 안티오키아로
도주하니 투르크군은 코니아로 진격하는지라 이후 순례자들은 성지로 갈 때 바닷길을 이용합니다.
이때 베네치아는 상인의 나라 답게 종교 보다도 국익을 우선시 하는 나라였으니 “그리스도교인
이기에 앞서 베네치아인 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십자군의 팔레스타인 침공 이후
에도 베네치아는 교황의 금령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이집트와 교역을 멈추지 않았는데.....
무역로 생명선인 아드리아해를 헝가리가 공격해 오자 팔레스티나 해안의 배들까지 소집합니다.
하이파 공략에 큰 도움이 되었던 베네치아 해군이 귀국하자 예루살렘왕 보두앵은 제노바와 피사의
배들에 의지하게 되는데, 협력 끝에 함락시킨 항구에 돌입한 두 도시의 선원들은 그 전에 이슬람
해적선과 싸운 이유 때문인지 팔레스티나의 이슬람 교도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니..... 그런
가운데서도 거류지가 생겨 교역만 할수 있으면 무슬림과도 아주 친하게 지냅니다. 돈이 좋은 것이라?
예루살렘왕 보두앵은 에데사 백작 보두앵을 시켜 셀주크 투르크의 다니슈멘드와 접촉하니 갇혔던
보에몽은 간신히 술탄을 만나 협상해 몸값을 26만에서 10만 비잔틴 금화로 깍고 기사 리카르도
를 인질로 남기고 외상으로 석방되어 2년만에 돌아오니... 안티오키아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조카인 탄크레디는, 1년만 더 늦었으면 안티오키아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그만 난처한 입장이 됩니다.
탄크레디는 자신이 정복한 안티오키아공국 인접 영토라도 달라고 했으나 백부 보에몽은 냉정
하게 거절했으며, 탄크레디가 정복한 갈릴리 땅은 이미 예루살렘왕 보두앵이 차지했으니
그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셈인데..... 한편 에데사의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과 연합해
하란을 공격하자 분열된 이슬람은 단결하니 모술의 영주가 주도해 1만 군을 모아 대항 합니다.
5천 기독교 군대는 대패해 보에몽과 탄크레디는 도망쳤지만 에두사의 보두앵은 포로로 잡히는데
이슬람군이 포로의 몸값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사이 보에몽은 탄크레디를 에데사 백작령
통치 대행자로 보냅니다? 그럼 벌써 세 번째네요? 그럼에도 전투에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이 젊은이는 악조건하에서 기어이 에데사를 지켜내는데 이는 이슬람측이 분열했기 때문입니다.
에두사 백작 보두앵을 사로잡고 있는 이슬람 영주는 사자를 안티오키아의 보에몽에게 보내 돈과 투르크
공주를 요구하자, 이미 소문이 났기 때문인지 비잔틴 금화 1만 5천과 공주를 내주지만... 포로를 돌려
달라고 재촉하지 않으니 이슬람측도 궂이 돌려주지 않는데, 보두앵이 돌아오지 않아야 조카 탄크레디
가 에데사백국을 차지할수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석방시킬려고 애쓰는 흉내만 내면 된다는???
그런데 저때 포로로 잡혀있던 기사 조슐랭은 이슬람 영주와 담판을 하니 다른 영주와 싸울 경우 전투에
참가하고 거기에 3만디나르 금화를 지불한다고 해 자유를 되찾는데.... 보두앵이 여전히 포로로 잡혀
있음을 알고는 모술 영주 자욀리 사와카를 찾아가니, 1만 5천 금화를 받고도 추가로 6만 디나르를
더 요구하는지라 조슐랭은 3만 디나르를 내면서 부족분은 자신이 대신 인질로 잡히겠다는 말을 합니다?
기사도 정신에 감격(?) 한 모술 영주가 둘을 석방하니 보두앵이 돌아오자 탄크레디는 에데사백국
을 또다시 넘기는데.... 그전에 백부 보에몽은 십자군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안티오키아를 조카
에게 맡기고 유럽으로 간지라 그는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되었는데..... 보에몽이 제노바인에게
거류지를 준 것 처럼 그도 피사인에게 거류지를 주면서 영지의 백성들을 성공적으로 다스립니다.
한편 툴루즈 백작 레몽은 라타키아로 돌아온후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의 뜻에 따라 안티오키아공작령을
침범했다가 섭정 탄크레디에게 호된 반격을 받고 포기하고는.... 60이 넘은 고령에도 알 물크 아부 알리
가 다스리는 풍요로운 트리폴리를 빼앗아 트리폴리 백작령을 만드는데.... 알리는 예루살렘왕이 되는
보두앵을 재워주고 물자 제공에 다마스크스군이 매복한 사실까지 알려준 십자군에 호의적인 인물 입니다.
알리는 십자군이 성도 예루살렘을 해방하러온 종교군대 라는 것을 그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한 침략자로 안 탓에 서로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니... 샤이자르, 하마, 홈스 영주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한때 2만을 인솔했던 레몽은 기병 3백명으로 침입해 다마스쿠스군쪽에
백명, 트리폴리태수쪽에 백명, 홈스군쪽에 50명 친위대 50명으로 나누고는 전투에 돌입합니다.
홈스 기병 2천명이 공격해 오자 50명 십자군과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슬람군은 좁은 전장
에서 자기편 끼리 부딪혀서 혼란이 발생했으며 다마스쿠스 기병 2천명도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레몽의 기병은 일시에 공격으로 전환해 무서운 속도로 돌격하니 이슬람군
은 대패해서 후퇴하는데 레몽으로서는 처음이라고 할 쾌거입니다. 이른바 “궁즉통” 이라?
이듬해 봄 다시 3백명으로 출진해 먼저 트리폴리에 원군을 보낼만한 도시들을 공격하는데...
홈스 태수 다울라가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암살 집단에게 살해당하는 운이 따라
주었으니 사주한 자는 놀랍게도 "친아들인 알레포 영주 리드완" 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홈스 유력자들은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에게 도움을 청하니 그 역시 리드완과는 형제 입니다.
레몽은 홈스를 점령하려다가 트리폴리와 다마스쿠스 양군과 싸우자니 힘이 부치는데 이때 제노바인
들이 40척으로 바다에서 트리폴리를 공격할테니 레몽은 육지에고 공격하자는 제안이라 응하자,
트리폴리는 돈으로 이집트 선박을 매수해 제노바 선단을 방해해도 레몽이 혼자 공격을 계속하자...
1105년 봄 트리폴리는 레몽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트리폴리를 존속시켜달라는 강화를 제의해 옵니다.
트리폴리를 접수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후 젖먹던 힘까지 다해 싸운지라 모든 기력을
소진해 버린 늙은 백작 레몽은 쓰러졌으니.... 적군이 쏜 불화살에 불타오르는 본진을
지켜내면서 입은 화상이 도진 것인데, 레반트에서 안티오키아 공국과 예루살렘
왕령을 육지로 연결하는 중간 영토에 기어이 "트리폴리 백작령" 을 만들어낸 것 입니다!
한편 유럽으로 간 보에몽은 9년만에 돌아온 자신의 영지인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에서 십자군
을 편성한 다음 교황 파스칼리스를 만난후 프랑스왕의 궁정을 찾아가니 대 환영을 받는데
프랑스왕 필리프는 프랑스에서 십자군을 모집하겠다는 요청을 흠쾌히 들어주었으며.....
영국 노르만왕조의 창시자 윌리엄의 딸이자 1차 십자군 블루아백작 부인 아델라를 만납니다.
아델라는 열렬한 십자군 지지자로 삶의 보람을 십자군 원정에서 느끼는 여자이니 영국 왕위
를 계승한 오빠에게 보에몽을 소개시켜 새로운 십자군 창설을 약속하게 해 주었고.....
중매를 서서 이듬해인 1106년 봄에 56세의 보에몽에게 상파뉴 백작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프랑스 공주 아델라와 결혼하도록 해 주니 아델라는 남부 이탈리아 풀리아에서 생을 마칩니다.
이때 보에몽은 조카 탄크레디에게도 짝을 찾아 주니 저 블루아 백작 아델라가 힘을 써서 프랑스왕 필리프
의 공주이지만 서녀인 세실리아와 결혼을 시키는데.... 결혼식은 탄크레디가 멀리 지중해 바다 건너
안타오키아에 있는지라 보에몽이 신랑 대행으로 치루는데.... 세실리아는 보에몽 부부를 따라 이탈리아
남부로 갔다가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한다며 바다를 건너 안티오키아로 얼굴도 모르는 남편을 찾아 갑니다.
그런데 새로운 십자군이 편성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못한 노르만족 보에몽은 아드리아해를 건너서
그리스의 두러스를 공격하니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는 대노하는데..... 이때 아드리아해의
통제권이 보에몽에게 넘어갈 것을 염려한 베네치아는 바다를 봉쇄하니 그만 고립무원
상태가 된 보에몽은 비잔틴 황제와 강화를 하고 실의에 빠져 바리에 틀어박혔다가 1년후 죽습니다.
모술의 영주 자왈리는 염원인 알레포를 공격하면서 옛 약속대로 도울 것을 요청하니 에데사백작
보두앵과 조슐랭은 수백명의 기병인 기독교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 영주들끼리 싸우는 전투에
참가하는데..... 알레포의 영주 리드완은 새파랗게 질려 친형제지만 견원지간인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는 들어줄리 없으니, 오히려 "적군인 안티오키아의 탄크레디" 에게 원군을 요청 합니다?
탄크레디는 보두앵이 잡혀있을 때 에데사백국을 대리로 다스리면서 죽자살자 싸워 인접 영토
까지 넗히고는 자신이 에데사 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풀려나 돌아온 보두앵이
에데사를 차지하고는 고맙다는 성의 표시조차 없었으니 당연히 서운했을 것입니다? 자신
이 새로 정복한 영토라도 안티오키아에 속해야 한다는 당연한(?) 요구도 무시되고 말았으니....
탄크레디는 기꺼이 알레포가 요청한 것 보다 2배나 많은 병력으로 이 기묘한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
하는데.... 이는 1281년 충렬왕이 떡고물을 노린 것인지 고려 수도인 개성에서 머나먼 마산까지 직접
내려가서는 전선 건조를 독려하는등 원나라의 2차 일본 침략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연상 시킵니다?
가톡릭 세상인 유럽의 일신교도 기독교도들의 눈에는 기독교군 + 이슬람군과 다른 기독교군
+ 이슬람군이 전투를 치른 참으로 기묘한 전투이지만.... 하지만 종교의 차이를 초월해
서로 이익을 위해 싸운 이 전투는 1108년 10월 초 알레포와 에데사 사이의 멘비즈에서
벌어졌으니 모술군은 보두앵과 조슐랭의 에데사 기독교군 5백명을 합쳐 2천명 이었습니다.
알레포군은 리드완이 이끄는 6백명의 투르크군과 탄크레디가 지휘한 1천 5백명 기독교 병사들로
모두 2,100명 규모인데 처음엔 모술쪽이 우세했으나..... 전투 중에 모술군이 고용한 천명
가까운 베두인 병사들이 수백필에 달하는 아랍말을 훔치기 위해 전장을 이탈해서는 말을
잡아 도주하자 이 기회를 잡은 탄크레디가 돌격명령을 내리니 전투는 알레포의 승리로 끝납니다.
예루살렘왕 보두앵은 에데사백작 보두앵과 안티오키아공작 대리 탄크레디를 불러 호되게 꾸짓고는
레몽이 못다 이룬 트리폴리공략에 나서는데... 레몽의 아들 베르트랑은 서출이었으나 적자가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했으니... 제노바 선단의 도움까지 받아 기어이 1109년
트리폴리를 함락하니..... 10년 세월에 트리폴리에서 라말라 까지 대부분의 항구를 손에 넣습니다.
아스칼론은 이집트가 그때마다 원군을 보내니 손에 넣지 못하다가 베네치아 해군이 팔레스티나
로 돌아온 1123년이 되어서야 차지하는데..... 베네치아는 도제가 갤리선 40척과 28척의
범선에 4척 대형 갤리상선으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며, 다음 해에는 천연의 요충지라
알렉산더 대왕도 수개월이나 걸린 티루스마저 베네치아 해군의 협조를 얻어 함락 시킵니다.
그 전인 1112년 탄크레디는 티푸스에 걸렸는데....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또
십자군 이야기도 썼으,니 “젊은 죽음” 이라는 장에서 “병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처음 걸린 병이 중병이었다, 죽음을 감지는 탄크레디는 지금까지의 야생마와도 같은
모습에서 일변해 자신의 죽음 이후 일을 계획해 서약을 받았다” 라고 감동적으로 썼습니다.
탄크레디는 죽으면서 기사 리카르도의 아들 루지에로를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보에몽의 아들이 성년이
될 때 까지 안티오키아 섭정에 임명하면서 에데사백작의 딸과 결혼을 시켰으며, 루지에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갈릴리 총독 조슬랭 드 크르트네와 결혼시켰고.... 아내 세실리아는 자기가 죽거든
트리폴리 백작 베르트랑의 아들 퐁스와 재혼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에나? 마눌의 재혼까지 챙기다니???
노르만족 탄크레디는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용감하게 싸웠으니 예루살렘성을 함락했고 24명의 기사로
갈릴리를 정복했으며... 하이파를 점령했고, 포로된 보에몽을 대신해 안티오키아공국을 맡아 지키며
타르수스등 영토를 늘렸으나 돌아온 보에몽에게 뺏기고, 역시 포로 된 보두앵을 대신해 에데사백국
을 지켰으나 돌려주었으며... 36세에 죽으면서 안티오키아공작령, 에데사백작령, 트리폴리백작령과
갈릴리를 인척 관계로 묶어 십자군 국가들을 안정시킵니다. 십자군 시대에 나타난 진정 "영웅" 이라!!!
탄크레디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이후 유럽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았으니.... 16세기 이탈리아
문인인 타소는 장편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 에서 탄크레디를 청춘 그 자체로 그리고
있으니.... 이슬람인 안티오키아의 공주 에르미니아와 비극적인 사랑을 한걸로 묘사하는데
안티오키아 보에몽이 에두사의 보두앵 구출 때문에 공주를 이슬람 영주에게 돌려주었지요?
안티오키아의 이슬람 공주 아델라와 자유분방했던 탄크레디의 얘기는 개연성은 있다고 보는데
또 헨델, 로시니, 비발디, 드보르작등 30명이 넘는 수많은 음악가들은 탄크레디를 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를 작곡했고... 그 외에 화가 게르치노와 푸생 및 구에르치노등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탄크레디와 이슬람 공주 에르미니아의 얘기는 실제 일어난 사실이든 아니든, 소설가들이 작품을
쓰고, 음악가가 오페라를 작곡하며, 화가가 그림을 그린 외에도.... 20세기에 들어서는 루카노
비스콘티의 영화 ”레오파드“ 에서 알랭 들롱은 늙은 공작 살리나의 조카 탄크레디를 열연합니다.
보두앵 왕은 교황의 대리인인 편협한 다임베르트 대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정교회나 아르메니아파 기독교도들이 사는 것을 허용했으며..... 군대를 이끌고 주변을 살피느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토라진 부인과 이혼하고 3번째로 시칠리아왕의 미망인과 결혼했는데, 부인 재산
을 노려 한 결혼이라, 부인이 어디서 누구와 지내든 전혀 상관(?)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가지고 왔는데 뭐?
1118년 봄에도 보두앵 왕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견제하러 시나이반도로 향했는데 엘 아리쉬 까지
갔을때 과로로 쓰러졌고 돌아오던 중에 4월 5일 53세로 죽음을 맞이하니..... 이제 제1차 십자군의
주역들은 모두 세상을 뜬 것인데, 죽으면서 사촌인 에데사 백작 동명 2인인 보두앵을 부르니....
조슬랭에게 에데사백국 나라를 맡기고 급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보두앵 2세로 예루살렘 왕위에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