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웅
조혜정
아이를 내보내고 이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아이가 고만고만한 아파트의 창들 사이에서 눈어림으로 나를 찾으며
타박걸음을 걷는 게 보인다. 아이는 나와 눈을 맞추고서야
씩 웃으며 손 한번 흔들고 학교를 향해 달음질을 한다. 등교준비를 하던 바로 전만 해도 빨리 서두르라고 채근하던
것도 잊고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샘솟는
애정을 감출 수 없어하는 게 우습다.
파란 모자가 달린 아이의 옷이 길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나서야 나는 창문을 닫는다. 학교 운동장이 뒷 베란다에서 훤히 보이는 터에 나는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 아침마다 아이의 뒷모습을 눈배웅하는 것일까.
어릴 적 기억이 선명하지 않은 나는 우리 아들 나이 또래에
엄마의 배웅을 받았는지 기억이 없다. 지방 소도시라 길이
복잡하지 않았고 학교가 집과 아주 가까웠다. 주택지나 아파트에조차도 빈터란 빈터는 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는 이즈음과는 달리 교통사고란 게 그다지 흔하지 않았고 동네
어른들이 저 애는 뉘집 자식인 것을 훤히 알던 때 아니었던가. 그러니 어릴 적 내 어머니는 지금의 나만큼은 아이 등교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등교길보다 내게 오히려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 문밖에 서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저녁
무렵이다. 저녁 이내가 흐리게 낄 때가 되면 어디서 오는지
모를 우수같은 게 스물스물 몰려와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으시던 엄마가 야속해지고는 했다.
"엄마는 무엇하느라 우리만 놓아두고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담."
속엣말을 하고는 하늘색 대문 앞의 키 큰 오동나무 아래에서 멀리 시내 외곽을 가로지르는 개천 위의 다리쯤을 까치발로 바라보고는 했다. 먼 빛으로도 엄마 모습은 낯이 익었다. 원피스를 입었거나 스웨터에 꽃무늬 월남치마를 입었거나 얼마든지 알아 볼 수 있었고 엄마 모습이 보이자마자
비탈을 내리 구르듯 한길로 뛰어나가 마중을 했다.
그렇게 시장 간 엄마를 기다리며 쪼그리고 앉아있던 오동나무 아래에는 겨울이면 동그란 열매가 붙은 나뭇잎이 떨어져 있었고 봄엔 보라색 제비꽃이 드문드문 피어났다. 여름녘엔 소리쟁이 무성하게 자라났으며 비탈진 둔덕으로는
사철 연탄재가 항상 몇 장씩 구석에 쌓여 있고는 했다. 엄마가 쉬이 장에서 돌아오지 않을 때 발로 연탄재를 툭툭 차면 희부연 먼지가 바짓단을 타고 오르며 동시에 신발코를
부옇게 만들었다. 그렇게 끝없이 긴 것 같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엄마 오는 걸 미처 눈치 못 채는 때도 있게
마련이다. 엄마를 기다렸으면서도 엄마 오는 걸 놓친 아쉬움으로 다시 심통이 나고는 했던 조막만한 어린 마음이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지 않은 것 같다.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너무 이르게
터득해 버린 탓일까. 현관 밖으로 인기척이 쉬이 들리지 않는 밀폐된 주택구조는 장에서 돌아오는 엄마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내리막길을 마련해 주지 못하고 그보다 엄마를
잠깐쯤은 얼마든지 잊을 수 있는 티브이나 컴퓨터 게임 같은 장치들이 즐비해 있지 않은가. 오히려 밖으로 내보내는
엄마 마음이 안절부절못하고 백 미터도 안 되는 등교길을
눈바래기한다.
우수로 채워졌던 어린 날의 기억이란 우리 아이들에겐 이미 사라져가는 김 빠진 감상에 불과한 걸까. 노을지며 어두워지는 하늘빛에 어린 맘이 괜히 쓸쓸해져서 곧 돌아올 엄마가 영영 오지 않을 듯이 울음을 터뜨리던 그 적요의 시간들을 이제 아이들은 저 스스로 깨뜨려 생활의 한 부분으로
요리할 줄 알게 된 듯하다.
사람이면 생태적으로 물리칠 수 없는 고독의 그림자가 멀리 엄마의 낯익은 모습이 어른거리는 그 순간 눈 녹듯이 사라지던 안도감을 우리 아이들은 어디에서 느끼고 있는 것인지. 사람에게 그리움이란 공간이거나 시간이거나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서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비록 장에서 쉬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해넘이 비탈에서
까치발을 들고 기다리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 중년의 한 남자가 될 저 아이에게 그리움의 일렁임이 될지 모르는 두어
번의 손짓을 지금 내가 막 내저었는지 모른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그리워할 추억이 더 이상 장에서 돌아오는 엄마의 그림자는 아닐지라해도 사람은 누구에겐가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으로 힘든 일상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은 분명할
게다.
무의식에 저장되는 스무 살 이전의 기억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책임은 바로 부모에게 있는 게 아닐까. 무심하게 지난 어떤 순간이 아이에게 쓸쓸함을 주었다면 장에서 돌아와 아이를 가슴에 꼭 차게 안아주던 그 안도감으로 아이의
그리움 속에 내가 남을 수 있는 추억 몇 개쯤 남겨주고 싶다. 세월이 아무리 변한다해도 엄마를 기다리던 그 기다림을 우리 아이 또한 다른 빛깔과 느낌으로라도 그립게 추억하게 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