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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문순자 시집 『어쩌다 맑음』 _ 류미야
상군 가인(歌人)이 부르는 지극한 생의 노래
류미야 (시인, 공정한시인의사회 주간)
1.
광이불요(光而不耀)1)
ㅡ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는다.
2.
한 권의 시집에서 그것이 묶일 당시의 시인의 속내는 물론, 독특한 개성과 지향 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어딜까. 아마도 ‘시인의 말’이나 서시, 그리고 마지막 시편이 아닌가 싶다. ‘시간예술’의 속성을 지닌 문학의 특성상 의도하든 않든, 처음과 끝의 의미는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각별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인 스스로 가장 마지막까지 그 앞에서 머뭇거렸을 ‘시인의 말’이 시집의 맨 첫머리에 얹히는 것이나, 곡진했던 도정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시가 마침표가 아닌 다음을 향한 쉼표가 되는 것 또한 과연 역설로 미학을 꽃피우는 시(詩)다운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번 시집의 마지막 여정에서 「쇠죽은못」을 만났을 때,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정(詩情)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 일소되는 듯이 느껴졌다. 제주 애월읍의 전래 지명담을 모티프로 한 이 한 편의 시 속에 한 개인으로서의 시인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삶, 또 그가 발 디딘 땅의 과거와 현재가 보이지 않는 핏줄기들처럼 얽히고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망의 복판에는 고요히 중심을 잡고 있는 시인의 존재가 느껴졌다. 시집의 종시(終詩)가 ‘소가 빠져 죽은 연못 이야기’인 것도 가볍지 않게 다가왔다.
찔레꽃가뭄에도 밭갈아치 찾아온다
새벽부터 일을 나선
알더럭* 홀어멍네
훅하니 꽃내음 같은 살냄새 맡았다던가
마음은 콩밭이라 날씨마저 싱숭생숭
막걸리나 연거푸 홀짝홀짝거리다가
밥차롱 쟁기에 걸고
짐짓 드러누웠다지
그 모습 보다 못해
쟁기 잡은 여장부
사람도 헉헉 쇠도 헉헉 밭갈인 다 마쳤는데
세상에, 물 먹다 그만
급체한 저 밭갈쇠
연못이 무슨 죄랴,
빠져 죽은 쇠 잘못이지
그 쇠 헉헉 끌고 온 홀어멍 잘못이지
홀어멍 살냄새 맡은 그놈이 잘못이지
ㅡ 「쇠죽은못」 전문
애월읍 하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풀어낸 시편이다. 흔히 오인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서사 모티프를 끌어와 시적으로 변형하는 일이 창작 과정의 수고를 더는 ‘영민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뼈대만 남은 이야기에 개연성(蓋然性)을 더해 새롭게 탄생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뿐더러, 장르를 바꾸어 구현하기란 마치 나무를 깎아 새를 만들고 숨을 불어넣는 ‘연금술’에 비길 만한 노역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이 작품의 경우 ‘정형률’이라고 하는 멍에 아닌 멍에까지 한 겹 더 들쓴 셈이니, 한 편 시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는 지점들이 적지 않다 하겠다.
문순자 시인은 제주 애월 태생으로, 그의 시 속에는 나고 자란 모향의 근원적인 풍광들이 천연하게 펼쳐져 있다. 시인에게 그곳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생활 터전이며,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라는 과거의 시간과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연대기적 공간이다. 공간이면서 시간인 ‘제주’는 실감으로서의 땅인 동시에, 수많은 생의 공간과 시간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하나의 ‘우주’인 셈이다. 그런 그에게 신화나 전설로 전해지는 땅의 사연들은 상상의 허상이 아닌 생생한 실상이자 구체(具體)가 된다.
하여, 거의 여백으로 채워져 있다시피 한 ‘쇠죽은못’의 많은 이형(異形)들 속에서 시인은 자신만의 특별한 개성을 시의 액면 아래에다 선명히 새겨넣는다. “여장부”인 “홀어멍”의 이야기는 대개의 설화에서처럼 비극의 풍경으로 끝나지 않고, 봄날의 “찔레꽃가뭄”의 고통 속에도 꽃내음, 살내음 생생한 일상의 장면으로 멈춰 서 있는 것이다. 융의 원형심리학에 정통한 시인이자 심리분석 전문가인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논지를 빌면, 이러한 여성상이야말로 바로 ‘여걸[Wiid Woman]’의 한 전형일 것이다. 이때의 ‘Wild’는 단순한 ‘거칢’이나 ‘길들여지지 않음’ ‘통제불능’의 의미가 아닌 ‘자연의 일부로서의 건전한 삶과 야성’을 의미한다. 그러한 야성을 지닌 여성은 수동적 한계를 벗어나 원형적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근원을 잃어버린 생명은 살아있음 본연의 체취를 잃어버리지만, 야성을 지닌 주체는 제 특유의 살내음을 풍기게 된다. 그러니 저만의 ‘살아있음의 체취’를 지니는 것 자체가 잘못이나 실수는 아닌 것이다. 자연과 인간, 본능과 이성이 인과 없이 뒤섞인 이 세계에서 생은 희극도, 비극만도 아니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근원적 생의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생명의 깊은 서사가 출렁거리면서도, 감각적이고도 훌륭한 시조의 율격이 ‘넘치지 않는 물동이의 물처럼’ 구현되고 있는 점도 놀라움을 자아낸다.
한편 시인의 이러한 웅숭깊고 자연스러운 시간 의식, 생에 대한 의식은 생로병사의 도저한 고통 앞에서도 비극에 함몰되지 않는 의연한 태도를 끌어낸다.
바다에 반쯤 잠겼다 썰물녘 드러나는
애월 돌염전에 기대 사는 갯질경같이
한사코 바다에 기대
서성이는 생이 있다
그렇게 아흔아홉 세밑 겨우 넘겼는데
간밤엔 육십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기 젖 물리란다며 앞가슴 풀어낸다
사나흘은 뜬눈으로, 사나흘은 잠에 취해
꿈속에서도 꿈을 꾸는 어머니 저 섬망증
오늘은 어쩌다 맑음
요양원 일기예보
ㅡ 「어쩌다 맑음」 전문
전체 시집 속에는 가족 관련의 시편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가령 「추풍령 삘기꽃」 「산굴뚝나비」 「아버지」 「꽃과 바다」 등의 ‘아버지 시편’과 남편의 「넥타이」 외, 시어머니가 등장하는 「흰 접시꽃」, 손자, 딸(들)과 사위의 「봄날의 교집합」 「혜화문 아래」 「시치미」, 아들의 「봉갓다」 「정자리」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상강 무렵」 「붉은 찔레꽃」 「갯무꽃」 「금니빨」 「박달나무 꽃피다」 같은 ‘어머니 시편’들에서는 시인이 가슴으로 부르는 먹먹한 사모곡(思母曲)을 들을 수 있다. 이처럼 끈끈하고 입체적인 혈연 의식은 시인이 단독자로서의 개인이기보다는 핏줄공동체 속에서의 삶의 의미를 중시하는, 강한 유대감과 가족애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도 위 작품에는 섬망에 빠진 백수(白壽) 노모가, 그리운 어머니를 꿈속에서 만나 젊은 여식(女息)으로 돌아가는 모습, 또 그것을 초로에 접어든 딸이 지켜보는 장면이 중첩되어 그려져 있다. 풍경이 풍경을 바라보는 생의 아이러니가 우리로 하여금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를 감득하게 한다. 아마도 젊은 날 “바다에 기대” 어린 생들을 키워냈을 그 어머니, 파란곡절 생의 바다에서 물질을 끝낸 지금 어린아이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이제는 다 자라 그 자신이 너른 ‘모성의 바다’를 이룬 딸에게 온전히 기대고 있는 것이다. 호젓한 슬픔 가운데서도 “어쩌다 맑음”의 하루치 낭보(朗報)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화자의 모습에서 생의 한가운데를 지키는 어떤 의연한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삶을 순연히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삶 근방에서 동행하는 소중한 것들과의 ‘교집합’을 찾게 하고, 그 시간을 ‘봄날’로 여기게 한다.
어린 봄 햇살 몇 줌
어찌 그냥 흘리랴
겨우내 눅눅해진 이불 홑청 가는 사이
일곱 살 벌테 손자가 반짇고릴 엎질렀다
저건 전리품이다
시집올 때 딸려온
쪽가위 골무 단추 남편의 첫 월급봉투
덩달아 마른 탯줄도 불쑥 튀어나온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 도장이나 만들까
세상에 남길 거라곤 하나뿐인 탯줄 도장
아들놈 첫울음 같은
연두로 꾹 찍고 싶다
ㅡ 「봄날의 교집합」 전문
이번 시집 전체를 놓고 볼 때 계절감이 직간접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많은데, 그중에도 특히 많은 시편의 배경이 되는 시간적 배경이 바로 ‘봄’이다. 과연 이 봄날의 시간대가 시인의 의식 저변에서 어떤 강렬한 근원으로 자리 잡고 있길래 이렇듯 깊숙이 시의 형성에 관여하는 것일까. 위 시 「봄날의 교집합」에서 그 하나의 단초(端初)를 찾아볼 수 있다. 기실 생이란 “쪽가위”와 “골무”, “단추”, “첫 월급봉투”, 뜬금없는 “마른 탯줄” 등이 두서없이 담겨 있는 “반짇고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소중한 의미였을 그것들은 지금 나의 ‘인생’이라는 한 바구니 안에 오롯이 쌓여온 과거의 “전리품”일 뿐이다. 그것을 “일곱 살 벌테 손자”가 “엎지”르는 순간을 담은 이야기가 바로 이 「봄날의 교집합」이다. “눅눅해진 이불 홑청”처럼 망각으로 지지부진해진 일상의 시간을 전복하며 다시 “첫울음”으로 새롭게 발견해낼 때, 그것은 강력한 “탯줄 도장”의 주술이 되어 푸르게 푸르게 핏줄의 시간을 “어린 봄”의 시간으로 이어갈 것이다. 시인은 돌발적이고 사소한 봄날의 한순간을 의미롭게 포착함으로써 생의 전 시간을 켜켜이 돌아보며 그 가운데서 경이로움을 발견해내고 있다. 유난하지 않은 일상의 장면 속에서 그것을 관통하고 조명하는 어떤 ‘찬란’을 읽어내는 힘이 시집 전체에 환한 봄날의 빛을 얹어주고 있다.
핏줄에 대한 깊은 마음은, 그리하여 자기 삶의 일부가 된 외부 생명들에 대한 따뜻한 표용과 공존의식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양된다. 포용과 상생을 꿈꾸는 시인에게 함께 풍우 맞으며 살아가는 땅의 존재들은 단순한 사물이 아닌 동일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첫 수확 감귤밭을 어떻게 알았을까
‘링링’ ‘타파’ ‘미탁’ 그리고 ‘하기비스’
이름도 낯선 태풍들
번갈아 다녀간다
크든 작든 농사야 하늘이 짓는다지만
생색내듯 서너 됫박 햇살은 못 보탤망정
어린 것,
그만 흔들고
차라리 내 뺨을 쳐라
ㅡ 「내 뺨을 쳐라」 전문
여자에게 과거는 묻는 게 아니랬다
사나흘 뭍 나들이 헛바람 든 감귤밭
여름순 가을순 가리랴
부나비 같은 사랑
그사이 은밀하게 알 슬은 귤굴나방
하우스 몇 평 없으면 그게 어디 농사꾼인가
이파리,
저 은빛 공사
영락없는 비닐하우스
이래 봬도 내 꿈은 바람 타는 비닐하우스
쇠붙이 하나 없이 맨몸으로 굴을 파는
애벌레, 저 성스런 농법
내 무릎을 꿇는다
ㅡ 「어느 비닐 하우스」 전문
“차라리 내 뺨을 쳐라”고 소리치는 화자의 모습에서 「쇠죽은못」의 그 ‘여장부’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살이나 관계의 문제라면 고요하게 “빌어보”든(「향일암 동백」) “세월에나 맡”겨보든(「몸으로, 갑년」) “개점휴업”이라도 하겠지만(「씨름판」), 그것이 아닌 근원적인 삶을 위협하고 “어린 것”의 생명을 앗으려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는 ㅡ 그것이 대자연일지라도 ㅡ 온몸으로, 온 힘으로 맞서고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화자의 의식의 저변에는 생명을 잉태하고 지키는 위대한 여성성, ‘모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때의 모성은 ‘생명성’의 다른 이름이다.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생명은 강인하면서도 너그럽다. 그런 너그러움만이 어리고 약한 것에 연민과 사랑을 느끼며,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비닐하우스」에는 이른바 ‘해충’으로 치부되는 “귤굴나방”의 침노(侵擄) 앞에서도 기꺼이 마음 한자리를 내주는 화자가 등장한다. “맨몸으로 굴을 파는” 애벌레의 고군분투를 “성스런 농법”의 “은빛 공사”라 칭하며 대역사(大役事)로 기록하고 있다. 무엇을 막론하고 생명을 거는 일은 비장하고 경외롭다. 미물로 불리는 것 앞에 기꺼이 무릎 꿇은 화자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방의 삶도 모르면서 위대한 인간을 말하다니!”
이런 관대함과 넉넉함을 가지고 있기에 다음과 같은 시편도 가능한 것이다.
놀리느니,
댓마지기
기장 씨를 뿌렸다
기장도 연두 연두
연두 천지 피 천지
아무리
에멜무지라도
여름 농사 피 봤다
ㅡ 「피 봤다」 전문
시인은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 “이젠//놓아주마//가난한 내 시편들아”라고 썼다. 그러나 가난을 아는 마음은 부요(富饒)하며, 자처한 가난은 고귀하다. 그런 화자(시인)이기에 대농의 꿈으로 안달하지도 않고, 뿌린 것이라 해봐야 돈 되기는커녕 작기도 작은 “기장 씨”인 것이다. 싹 나고 자라는 그 곁에 “피”까지 나 법석이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눈에는 불이 돋는 대신 연두가 돋았다. “여름 농사 피 봤다”고 하는, 황당한 ‘피의 참사’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툭 내뱉는 그 말 앞에서 그만 웃음이 난다. 짧지만 생생한 삶의 묘사와 더불어 사물과 언어의 동음이의의 말놀이(pun)까지 구사되는 시편을 통해 시인의 넉넉한 마음은 물론 재기발랄한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그래도 아깝다 할까/사냥매 꽁지깃의 이름표를 떼어내듯/내 이력 슬쩍 떼내는/딸 도둑 내 사위야”라며 속내를 내비치는 「시치미」라는 작품 속에서도 이런 너그럽고 환한 깊이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안온하고 평안한 바라봄, 드넓은 마음의 지평을 열어주는 영지(英智)는 어디에서 오는가. 스스로 가난을 들이고도 휘청거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 속에서 낙망이 아닌 난만한 웃음과 상생의 온기를 더해주는 지혜는 바로 주체가 가진 내면의 빛으로부터 나온다. 참 빛은 번쩍거리는 외피의 장식과 수사를 벗고 스스로 한 걸음, 존재 뒤편에 설 줄 아는 겸손함을 품는다. 인위의 현란이 아니라 깃들어 있어 스며 나오는 찬란이다. 가짜 빛은 눈멀게 하나 진짜 빛은 눈을 뜨게 한다. 그 빛은 앞서 제 존재를 자랑하지 않고, 존재로부터 스며 나와 세계를 밝힌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서 밝힌 “광이불요”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시인은 다름 아닌 그런 내면의 빛, 참된 빛을 지닌 자라야 한다. 유몽인2)은 “시는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우러나온다. 시가 생활을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궁하기 때문에 그의 시가 이러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신’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의 가난은 생활 바깥이 아니라 생활의 안쪽에 있다는 얘기다. 바깥은 가릴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안은 가릴 수 없다. 그런데 시는 정신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정신의 그릇인 시를 보면 가릴 수 없는 그의 진짜 삶이 드러난다는 얘기다.
잘 먹고 잘산다면 뭔 소리가 우러나랴
애월 어느 바닷가 소라고둥 같은 마을
건들면 울음소리가
묻어날 것 같은 이들
상군 해녀 춘희 삼촌은 내 어머니 친구다
4‧3 광풍 이후 날궂이하듯 도진 신병
한사코 내림굿은커녕
푸닥거리도 마다했다
농한기 멍석 깔면 우리 집은 노래마당
“느~영 나~~영 두리둥실~ 놀~고요”*
북 장구 허벅장단에
파도 소리도 끼어든다
그때 그 선소리꾼 분명 세상 떠났는데
어머니 요양원 곁에 오락가락 숨비소리
이 가을, 소리쟁이로 와
한 목청 꺾나 보다
ㅡ 「소리쟁이」 전문
문순자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크게 마음을 사로잡는 시편인 「소리쟁이」다. 한 편 시 속에 “4‧3” 비극의 시간과 “농한기”, “그때 그 선소리꾼”의 시간, 어머니의 시간, “이 가을”(현재)이라고 하는 넓고 다양한 시간의 스펙트럼이 중층적으로 깔려 있다. 그런 시간을 종축(縱軸)으로 하고, “애월-바닷가-마을”, “우리 집-노래마당”, “요양원”이라고 하는 공간을 횡축(橫軸)으로 하여 전체 배경은 복합적으로 교직되어 있다. 그렇게 마련된 서사의 마당에 들어서는 등장인물들이 “춘희 삼촌”과 “선소리꾼”, “어머니”와 자세히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건들면 울음소리가/묻어날 것 같은” 어촌 사람들이다. 켜켜이 쌓인 그 땅, 그 시간 속에서 어떤 수많은 울음과 웃음이 파도 소리처럼 밀려왔다, 밀려갔을까.
하즈랏 이나야트 칸3)의 “소리는 어디에나 스며 있는 생명이 의식되는 활동”이라 한 말을 되짚으면, 생명력 있는 모든 것은 소리를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귀 기울이면 인간이나 크고 작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한자리 가만있는 바위조차 파고드는 시간에 품을 내주며 쩍쩍 소리를 내는 것이 들린다. 먼 데서 달려온 바람과 물소리, 밤이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줌 빛에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오는 작은 새들도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존재하는 일이 제소리를 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살아있기 위해서는 소리를 내야 한다.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날 것 같고, 광풍이 휩쓸고 신병이 도졌어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 크게 소리쳐야 하는 것이다. 그 선두에서 북, 장구, 허벅장단으로 흐벅지게 끌어주던 그 선소리꾼 가고 없어도 노래 멍석을 깔고 한 목청 꺾어야 하는 것이다.
소리를 생각하는 마음은 모든 것들이 제소리와 빛깔을 피워올려 한데 어울려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조화’를 꿈꾸는 마음이다. 너른 생명의 바다에서 저마다의 소리를 길어 올리며 조화와 공생을 이끄는 그 선소리꾼이 바로 ‘삶의 소리쟁이’, 시인이다. 마치 “나, 소리하겠소, 소리로 살아있겠소” 외치는 듯한 시인은 다음과 같은 인식에 이르며 생을 노래한다.
기어이 허공에 올라 별이 되고 말리라
기도이듯, 절규이듯 절벽을 타오르는
초가을 파도 소리를
감아올린 으아리꽃
그리움은 지상의 일, 하늘은 허공일 뿐
종일 땅바라기 그 끝에 하늘바라기
육지와 바다도 그냥 물끄러미 쳐다볼 뿐
마라도 가파도가 쏘아 올린 이 꼭대기
몹쓸, 몹쓸 모슬포 바람 온몸으로 울고 마는
하산길 내가 서 있던
그 자리도 하늘이었네
ㅡ 「송악산 으아리꽃」 전문
평론가 유종호는 “오직 모국어 속에서만 비로소 시인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때모국어란 모든 산 것들이 제 타고난 땅에서 길어 올린 저다운 소리를 의미할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듯, 절규이듯 절벽” 같은 일이 되고 “온몸으로 울고 마는” 일일지라도 기어이 타고 오르고 길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번쩍거리는 영예가 아닌 “허공일 뿐”인 하늘의 일이 될지라도 “기어이 허공에 올라 별이 되고 말”아야 한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날도 늘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광이불요의 별처럼.
3.
문순자 시인은 한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자아의 고요한 중심을 잡으면서도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삶에 긴밀히 연결된 일원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뿌리내린 땅에 핏줄처럼 이어지고 스민 시간을 되새기며, 삶의 안팎을 구성하고 이끌어 온 어떤 근원에 대해 이르집고 기리고자 한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현재적 삶은 물론, 연대기의 토양이자 영혼의 본향인 제주라는 거대한 우주가 자신의 시 세계의 도저한 근원이 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적 삶의 조건에 조응하면서도 건전하고도 능동적인 야성을 발휘하며,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를 애써 견지한다. 시집 속의 화자가 대상물들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인의 의식 저변에 깃들어 작동하는 강인하고도 너그러운 깊이는 물론, 어리고 여린 것, 약한 것들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의 모성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 안온하고도 넉넉한, 조화와 공존을 꿈꾸게 하고 실현해가는 기제는 바로 ‘소리’다. 그는 현대시조의 정형률이라는 언어 미학에 충실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절절한 노래로 울려 퍼지는 소리를 선창(先唱)하는 아름다운 ‘삶의 소리쟁이’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문순자 시인의 이번 시집은 ‘언제나 맑음’이 아닌 ‘어쩌다 맑음’의 생을 노래하고 있다.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피 흘리는 것”이라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몹쓸 바람 때리는 내리막의 하산길이 도처에 있는, ‘어쩌다 맑을 뿐인’ 생임을 그는 잘 안다. 바닷속을 훤히 꿰고 있는 상군 해녀가 편하고 좋은 곳을 선점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먼바다로 나가 존경을 받는 것처럼, 그는 그런 어둠 가득한 날에도 여장부처럼 생의 먼바다로 앞장서서 시의 물질을 나간다. 그리고는 가쁜 생의 바다에서 생명 있는 것들의 소리를 길어 올린다. 존재가 피우는 작은 소리에도 영혼의 촉수가 돋아 잠 못 드는 그는 지극하게 생을 노래하는 상군 가인(歌人)이다.
풍경보다 아름다운 지도는 없다. 수많은 풍경의 소리가 올올이 새겨진 이번 시집의 지도를 그리면서, 그가 빚어낼 깊고 아득한 다음 풍경들이 벌써, 몹시도 궁금해진다.
1) 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耀, 『老子』 58장.
2) 조선 중기 문인,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썼다.
3) 인도 수피즘의 영적 스승. 시인, 철학자.
문순자 제주 애월 출생. 199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파랑주의보』 『아슬아슬』, 시선집 『왼손도 손이다』 『가랑비동동(90년대 5인 시조집)』이 있음. <시조시학젊은시인상><한국시조작품상><노산시조문학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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