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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사건 20110227
통혁당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 듣기 쉽게 ..
linus | 2006-05-23 18:00 | 조회 1887 | 답변 1
여러 페이지를 돌아 다녀서
통혁당 사건에 대한 자료는 많지만
무슨 이야긴지 확실하게 이해하고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활동분야 : 만화,애니 | MS윈도우즈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이었다. 통혁당은 전위정당으로서의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를 당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79년까지 통혁당 재건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사건 적발지역도 서울경기에서 호남과 부산 경북지역까지 확대되는 특징을 갖는다.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에서는 통혁당을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이남간첩조직으로 몰아갔으나, 오늘날은 이남의 독자적인 전위정당 건설로 보고 있으며, 군부 치하에 피라미드 세포로 구성된 지하당으로 존재했다는 것과 통일을 주장하면서 친북성향을 띄었던 탓에 이북연계설의 의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슬퍼런 박정희 군부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던 4.19세대와 진보인사들도 이 사건을 빌미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대표적인 인사로는 조동일, 임중빈, 박성준 박사(한명숙 초대 여성부 장관 남편) 등이 있으며, 지금은 중고등학생 권장도서이기도 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신영복 교수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중에 집필한 책이다.
2006-05-23 18:03 | 출처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통혁당사건(68.8.24)
작성일 : 2004-09-09 작성자 : 정윤희 조회수 : 918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이었다. 통혁당은 전위정당으로서의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를 당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79년까지 통혁당 재건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사건 적발지역도 서울경기에서 호남과 부산 경북지역까지 확대되는 특징을 갖는다.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에서는 통혁당을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이남간첩조직으로 몰아갔으나, 오늘날은 이남의 독자적인 전위정당 건설로 보고 있으며, 군부 치하에 피라미드 세포로 구성된 지하당으로 존재했다는 것과 통일을 주장하면서 친북성향을 띄었던 탓에 이북연계설의 의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슬퍼런 박정희 군부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던 4.19세대와 진보인사들도 이 사건을 빌미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통일혁명당이란?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일간지에서는 이례적으로사건의 발생과 공판과정을 매우 작게 취급했지만, 이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사건이었다.
통혁당 사건은 다른 사건에 비해 몇가지 점에서 특징을 가진다.
첫재, 그 규모가 다른 사건에 비해 매우 컸다는 점이다. 이 사건이 적발된 1968년에는 그 사건의 범위가 서울과 전라남도지역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정보기관에 의해 밝혀진 통혁당 관련 사건을 살펴보면 그 범위가 부산 경북지역까지 확대되어 남한의 상당지역에 미치고 있다.
둘째, 활동의 지속성이다. 통혁당의 재건은 4월민중항쟁 시기 직후 착수된 이래 최영도가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조직침습에도 불구하고 1969년 8월 25일 당중앙위원회가 결성된 후 1970년 2월 당창건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재편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9년 삼척에서 '강원도 통혁당 지도위' 결성을 도모하다가 검거된 이후, 조직 자체가 검거된 적은 없다. 이와 같은 활동의 지속성은 공안당국에 의해 발표된 다른 조직사건과 비교해볼때 통혁당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째, 통혁당은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노동계급의 전위당임을 자처했다는 점이다.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최고의 목적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에 두고 있다. 당강령은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로 규정하였다. 구체적 목표로는 "첫째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철폐와 자주적 민주정권의 수립, 둘째 파쇼독재체제의 일소와 사회 민주주의의 실현, 세째 민주적 토지개혁과 농.어촌 빈곤 일소, 네째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자립적 민족경제의 실현, 다섯째 민주적 노동법령의 실시와 노동자의 사회 경제적 처지 개선, 여섯째 여성의 권익보장과 사회적 지위 향상, 일곱째 민주적 민족문화 창달과 지식인의 생활보장, 여덟째 교육쇄신과 무료교육제.장학금제 실지,아홉째 선진적인 의료보험제 실시와 무상치료제실시, 열번째 자위적 민족군대 창설, 열한번째 자주외교 구현과 반제평화애호국과의 교류, 열두번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성취" 등의 사항을 들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통혁당에 대한 몇가지 특징들로 인하여 한편으로는 통혁당사건은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통혁당에 대한 연구는 학문외적인 제약을 받아왔고 특히 국가보안법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연구성과는 관심의 정도에 반비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현재 통혁당과 관련한 글은 1960년대말 이후 이 사건을 조사했던 중앙정보부에서 쓴 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의 회고 등을 참조한 것과 최근에 많은 비합법 출판물들이 출간되면서 나온 몇 가지 통혁당 관련서적들(대동편집부 편,[통일혁명당], 나라사랑편집부,[통일혁명당] 등이 잇고 통혁당의 활동을 사실에 근거하여 소설로 형상화한 것으로는 [애국시대] 상.하 대동이 있다)이 전부이다. 그나마 이런한 책들에서도 구체적인 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조망은 부재하고 단지 자신들의 관점을 암시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구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데 그치고 있다.
통일혁명당의 독자성과 대중성 문제
통혁당과 관련하여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중에서 통혁당이 독자성과 대중성에 대한 얘기가 많다.
먼저 공안당국의 평가는 통혁당이 조직원칙상 독자성과 대중성이 없다는 것이다. 즉 통혁당은 출발부터 조선로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하였고, 당의 필요성과 조직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이 계획한 것이므로 통혁당의 임무는 단독활동에 의한 핵심조직사업, 잠복초소의 설치와 유지 관리, 평양으로부터의 지령 이행에 한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통혁당에 관계했던 핵심적인 인물인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은 북한에 다녀온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일정 정도의 교육을 받고 자금을 수수하였다. 또한 통혁당 전라남도 조직은 북한에서 남파된 인사에 의해서 처음으로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의 주체사상(1970년대 이전에는 맑스-레닌주의)을 자신들의 조직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통혁당의 조직과정과 이념 설정은 통혁당이 독자성이 없는, 북한의 지령을 받는 괴뢰조직이라는 평가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통혁당이 독자성이 없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휴전선을 중심으로 하여 남이냐 북이냐를 따지는 방식은 올바른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없다. 현재의 중심적인 과제를 자주 민주 통일이라고 설정했을 때, 남과 북을 나누어 사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통혁당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북쪽으로부터의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아니 필연적으로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1949년 남북 로동당이 통합한 이후 조선로동당을 전위정당으로서 당연히 인정하고 있던 민족민주세력의 핵심인사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던 인식이었다.
다음으로 통혁당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여 독자성이 없다고 하는 주장 역시 문제의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는 것이다. 독일과 소련에서 시작된 맑스-레닌주의를 영국이나 중국, 쿠바, 동구권의 공산당에서 받아들였다고 하여 이들 당이 독자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다. 오히려 문제는 그러한 사상을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있는 것이며 이것이 곧 독자성 여부를 검증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조희연은 공안기관의 시각과는 다르게, "통혁당을 구성하고 있던 성원들은 - '전략적 독자성'과 '현실적 지원'관계의 긴장에도 불구하고-통혁당을 독자적인 '남한혁명의 참모부'로서의 '독자적인 당'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통혁당에 참여했던 주체들이 한반도 전체의 상황을 떻게 인식하였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독자성을 북한과 관계 속에서 어떻게 풀어보려고 했는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통혁당의 독자성 문제는 북한과의 관련이나 당시 통혁당에 참여했던 주체들이 독자성 문제를 어떻게 고민했는가를 통해서 검증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이 문제의 해결은 당시 통혁당이 얼마나 남한에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한의 상황을 객관적인 정세에 기초하여 올바르게 풀어 나가려고 했는가에달려 있다. 아무리 통혁당에서 우리는 북한의 지령에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주장할지라도 남한사회의 대중적인 기반 위에 서 있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독자성일 것이다. 때문에 문제의 핵심은 통혁당의 독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혁당의 대중성에 있다고 하겠다.
통일혁명당의 활동
통혁당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현재 그 전모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청맥]의 발간을 통해 지식인 사이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했고, 학사주점을 인수 운영하였으며,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향력의 행사 및 참여, 기층민중운동에로의 접근, 또 다른 혁명적 조직과의 결합시도, 무장투쟁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노력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1967년의 국회의원 선거 및 대통령선거의 부정행위에 대한 반대투쟁, 그리고 미국 부통령 험프리 방한 반대투쟁, 사토 일본수상 방한 반대투쟁 등에 통혁당 산하의 학생운동 조직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통일혁명당의 투쟁], [통혁당], 1987~ 1988 ).
통혁당의 활동과 관련하여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통혁당의 무장투쟁에 대한 준비와 활동이다. '통혁당서울시위원회'는 자신의 임무 중에 "모든 조직을 장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술적 간부의 획득"과 "각지에 무기고의 설정과 무기획득 및 그 비축을 위한 방법 연구" 등을 설정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혁당의 무장투쟁노선에 대해서 조희연은 통혁당의 성원들간에 "무장투쟁이라는 것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볼 때 혁명투쟁의 궁극적 최고의 형태이며, 구체적인 수준에서 볼 때 제3세계 혁명투쟁의 일반적 형태라고 하는 데 공감"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통혁당이 무장투쟁을 실제로 전개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장기적 혹은 단기적 전망으로 사고했을 뿐이라고 파악한다
이에 반해 북한은 통혁당이 합법적인 대중투쟁과 함께 적극적인 무장유격대투쟁을 조직하고 수행하기 위한 준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이를 위한 확고한 거점을 창설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무기획득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무장그룹 활동을 실행했다고 주장한다. 김남식은 1960년대 중반이후 북한의 대남공작의 특징으로 3~10명 정도로 소조를 편성하여 태백산, 지리산을 비롯한 높은 산악을 배경으로 밀거지굴설과 산간지역 소부락에 대한 혁명화 공작 등을 지적하고 있는데, 북한은 이러한 것들을 통혁당이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통혁당의 활동과 관련하여 무장투쟁노선의 실행 여부, 1960년대 빈발했던 '무장간첩과의 관계 등이 좀더 검토되어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통혁당서울시위운회의 노선과 활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견해 중 어떠한 의견이 옳은가를 평가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쉽지 않다. 통혁당의 실체를 밝히기에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주객관적인 여러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한국 민족민주운동사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통혁당 건설을 위한 노력은 단순히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서 일어났다기 보다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의 고민에서 나타난 민족민주운동의 발전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통혁당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와 올바른 자리매김이 보다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연구범위를 1968년에 발표된 '통혁당사건'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일어난 일련의 조직사건과 1970년대 발표된 '통혁당재건사건'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이후에야 비로소 통혁당의 전체적인 성격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출처 : myhome.paran.com)
문근영,그녀의 외조부,그리고 통혁당l마이페이퍼
노이에자이트 l 2008-11-23 17:07 http://blog.aladin.co.kr/782087115/2419176
본문의 너비가 페이퍼의 제한 너비를 초과한 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새창에서 원래 너비의 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시대가 있습니다.대체로 해방 3년사나 한국전쟁에대해선 상당히 묵직한 연구서들이 있는 반면 50년대 60년대는 사각지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주변에서 이야기들은 많이 합니다만 실제로 진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참 드뭅니다.그 시절 성인기를 보낸 이들도 가물가물한 기억 빼고는 잘 모르지요.특히 공안사건이라고 통칭하는 사건들은 워낙 미묘한 구석이 많아서 쉬쉬하기도 합니다.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시국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수기나 기사들을 읽는 중에 흥미로운 사실을 몇 개 알아냈는데 인혁당 사건과 통혁당 사건에 대한 현재의 기억에 관한 차이입니다.일반인들도 그렇고 과거사 진상규명위에서도 인혁당 사건에 대한 조명은 꽤 한 듯한데 통혁당 사건은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기껏해야 통혁당 하면 우선 생각나는인물이 성공회 대학교수 신영복 씨 정도? 문근영 씨가 유명해진 2005년 이후엔 그녀의 외조부인 류낙진 씨가 검색어로 오르고 있더군요.사실은 그 무렵 류 씨는 고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통혁당 사건을 공부하게 된다면 김종태라는 인물을 만나게 될 겁니다.당시 대공수사기관에선 통혁당의 수괴라고 선전한 인물입니다.지금의 제 나이 또래들도 영남 지방 하면 군사정권의 아성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인혁당이나 통혁당 사건의 주동 인물들은 영남의 혁신세력들이었다는 점을 우선 밝혀둡니다.항간에선 박정희가 이들을 유례없이 탄압한 이유가 영남의 혁신세력들을 없애버리겠다고 작심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최근 신영복 씨가 '청맥'이란 잡지에 대한 추억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이 교양잡지는 지식층을 대상으로 해서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진보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잡지의 주간이 김질락.그는 김종태의 조카였습니다.숙부인 김종태는 그에게 우상이었다고 합니다.둘 다 경북 영천 출신.김종태가 통일혁명당을 공식결성한 시기는 1964년 무렵이며 청맥은 당 기관지같은 성격도 있었습니다.물론 중정이 이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지요.1967년 청맥은 강제로 정간당하다가 그 뒤 복간과 폐간을 거듭합니다.
1968년이 통혁당이란 조직이 신문방송에 등장하게 된 계기입니다. 7~8월 무렵.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서울 조직의 지도급들이 체포되고 호남에선 최영도,정태묵 등이 체포됩니다.(호남에서 일어난 사건이 세칭 임자도 사건인데 야당 의원을 지원하려고 했다 하여 나중에 1980년 5월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공판 당시 김대중 씨가 정태묵과 접선을 했다는 계엄사령부의 주장이 등장하게 되니 그 여파가 얼마나 길게 계속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이때 육사에서 부교관이었던 신영복 중위는 군대내에 통혁당 조직을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지요.이른바 ps혁명론입니다.FROM PAPER TO STEEL의 약자이지요.무투(무장투쟁)혐의입니다.김종태,최영도,이문규는 모두 1969년 사형됩니다.정태묵,김질락은 1972년 사형.신영복 씨는 20년 징역형.
인혁당도 제 1차 사건이 1964년이고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통칭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듯 통혁당 사건도 통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습니다.1979년의 일이죠.그 전인 1971년. 조직이 파괴되던 호남쪽에선 류낙진 씨가 체포됩니다.류낙진 씨는 통혁당 관계 문헌에 반드시 등장하며 류낙진 외 11명 체포라고 나옵니다.1980년대 이후의 통혁당과 한민전은 그전과는 성격이 많이 변하는데 이에 대해선 그저께 올린 저의 페이퍼를 참조하십시오.
김질락은 체포되어 사형을 기다리던 중에 수기를 씁니다.일종의 반성문 겸해서 쓴 글인데 자신의 우상이던 숙부 김종태를 여기선 애증이 교차하는 비판도 합니다.감옥 속에서 쓴 글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글은 통혁당에 대해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는 책입니다.나중에 책으로도 나왔지요.<어느 지식인의 죽음.김질락 옥중수기,원제:주암산>행림출판사1991 .주암산이란 1967년 그가 북한을 방문하여 20일 동안 있었던 평양의 숙소 뒤의 작은 산.임진왜란 당시 계월향과 김응서 장군의 사랑 이야기가 된 무대.김질락의 사형이 집행되던 때는 7,4공동성명으로 온 한반도가 통일의 열기가 뜨겁던 1972년 7월 15일이었습니다.
김종태를 비롯한 통혁당 지도부를 체포한 이가 중정부장 김형욱.그와 김종태의 일문일답이 흥미롭습니다.
김형욱: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알고 있는가?
김종태:우리는 그것을 인정한 일이 없다.
김형욱:그러나 우리는 그 법으로 당신을 재판한다고 생각한다.당신의 죄목만도 181가지나 된다.
김종태:어떻게 내 죄명이 181가지인가? 정치탄압을 가한다면 나에게 1810가지 죄명을 덮어씌워도 좋지 않은가?
北 '통혁당 장례식' 國葬으로 치렀다 북한.통일자료 2006/10/31 09:40
http://blog.naver.com/aldnjfem/70010159029
北 '통혁당 장례식' 國葬으로 치렀다
[탈북 기자] 장례식날 1분간 묵념…'공화국 영웅' 칭호 받아
[ 2006-10-30 20:10 ]
▲ 평양에 있는 '김종태전기기관차 공장'
1968년 적발된 남한의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북한에도 잘 알려져 있다.
김종태 최영도 등 통혁당 주모자들이 남한에서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북한당국이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공화국 영웅' 칭호와 '조국통일상' 등 각종 명예를 수여했기 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은 통혁당 사건을 남한의 '간첩단 사건'이 아니라 '남조선 파쇼분자들에게 희생된 남조선 혁명가 탄압사건'으로 알고 있다.
통혁당 사건과 관련해 당시 남한당국은 관련자 158명을 검거하고, 1969년 1월 25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상의 간첩죄, 내란음모죄 등을 적용,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5명은 사형, 신광현 등 4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21명은 최고 15년에서 최하 3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은 '4.19 혁명' 직후 대남 통일전선 조직을 총괄하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구성하고, 남한내 지하당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김종태를 주모자로 하는 당조직을 만들었다.
통일혁명당은 당시 지식인, 학생, 청년 등과 전(前) 남로당 당원을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에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결행할 것을 기도했으나, 통혁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활동이 드러남으로써 사전에 발각되었다.
김종태는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를 맡고 이문규(조국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민족해방전선 책임자), 최영도(전라남도위원회위원장), 정태묵, 윤광수 등이 활동한 통혁당은 분명한 북한 노동당의 지하당 조직이었다.
통혁당 창당 기념일 맞아 해마다 추모모임
북한당국은 김종태 최영도 등이 사형되자 이들에 대한 장례식을 빨치산 투사들과 똑같은 격에 맞추어 '국장'(國葬)으로 진행했다. 북한 장례식으로는 최고 영예다.
북한당국은 추도모임을 전국적으로 갖고, "김종태 동지는 미제 식민지 통치에서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조국통일위업을 위해 싸우다 체포되어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전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각지에 빈소를 만들어놓고 각 기업소 직장 주민들이 1분간 작업을 멈추고 남쪽을 향해 묵도(묵념)하게 했다. 동시에 기차와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게 했다.
김종태를 비롯한 통혁당 지하당원들이 체포되자, 북한은 전국적 범위에서 이들의 사형을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열고 그들의 사형을 막아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김종태는 사형집행 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고, 그가 죽은 해인 1969년 평양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전기기관차 공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마다 통혁당 창당 기념일을 즈음해 추모모임을 가지고 있다.
또 통혁당 관계자들의 활동을 '김일성혁명역사' 교과서에 '조국통일을 위한 남조선 혁명가들의 투쟁'이라는 한 개 절로 만들어 통혁당 건설과 최후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교과서는 "통일혁명당은 조선노동당의 붉은 혈통을 이어받아 남조선에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전위부대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태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의 지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마치 남한에서 주체사상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조직을 결성한 것처럼 묘사했다.
더욱이 통혁당 관계자들이 북한 교과서에 등장하게 된 것도 김정일이 "남조선 혁명도 김일성주의 기치를 들어야 한다"는 '온사회의 김일성주의화' 작업이 한창이던 70년대 중반이다.
국정원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또 94년 7월 통혁당 연루자들인 이상진과 김영복이 입북하자, 김종태의 처와 아들의 행처를 확인할 데 대한 지령을 내리고, 김일성의 "남조선 혁명가 김종태의 가족을 찾고, 그들이 원할 경우 북한으로 데려오라"는 뜻을 전달 받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北 '통혁당 장례식' 國葬으로 치렀다|작성자 브니엘
통혁당 간부를 구출하기 위해..무장공작선 이야기는?
포스트 상세 정보
2010-09-27 18:40:34 조회 (209) | 추천 (0) | 퍼간
중앙정보부의 역(逆)공작에 의해
통일혁명당 핵심간부를 구출하기 위해..북한이 제주도 서귀포 해안으로 보냈다가 우리 군·경·정 합동작전에 의해 나포됐던 북한 무장공작선 이야기는.. 한편의 소설,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도..충분히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퍼온글]
지난 1968년 통일혁명당(통혁당) 핵심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북한이 제주도 서귀포 해안으로 보냈다가 우리 군·경·정(軍警情) 합동작전에 의해 나포됐던 무장공작선은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의 역(逆)공작에 의해 밀파됐었다는 사실이 42년 만에 월간조선 10월호에서 밝혀졌다.
당시 군·경·정 합동작전을 통해 우리 측은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이로부터 4일이 지난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사건의 전모를 공식 발표했다. 제주도 서귀포로 침투했다가 섬멸된 북한의 무장공작선 탑승 생존 공비들에 대한 기자회견도 같은 날 열렸다.
이후 판결문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무장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 공작선으로 김종태 등 통혁당 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Z작전에 대해 현재까지 관련 사료들은 통혁당 간부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보당국이 간첩선을 섬멸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하지만 월간조선의 취재 결과, 무장간첩선은 애초 남한 중앙정보부 요원이 보낸 A-3 지령(간첩 지령용 방송)을 통혁당 간부들이 보낸 것으로 판단한 북한이 통혁당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밀파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의 유인공작(역공작)에 북한이 걸려든 보기 드문 사례다.
1968년 당시 무장공작선 검거작전에 참가했던 군·경·정 관계자들이 밝힌 ‘통혁당 구출시도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작전’(Z작전)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월간조선은 전직 요원의 증언과 관련 자료를 토대로 이 사건을 재구성했다.
통혁당 총책격인 김종태가 검거된 시기는 사건 발생 두 달여 전인 1968년 6월이었다. 통혁당 전체를 주도한 핵심 인물은 김종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한에선 통혁당 내 엘리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문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친북반미(親北反美) 성향의 월간지 ‘청맥사’ 편집장이었던 이문규는 공군 정훈장교 출신이며,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다. 1967년 5월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종태가 체포된 후 이문규는 경남 지역을 다니며 도피하다 대구에서 검거됐으며,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문건이 발견됐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도피 상태에 있던 이문규를 북한이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펼칠 것이라 판단, 이문규를 체포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암호문건을 토대로 대북(對北) 통신 공작에 착수한 정보당국은 1968년 8월 4일 새벽 북한에서 보내온 A-3 지령문 해독에 성공했다. 북한은 그때까지도 이문규가 체포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 정보당국은 북한이 이문규에 대해 필사적인 구출 시도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북한이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간첩선을 보낸다면, 통혁당과 북한과의 연계를 가장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보당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계획(Z작전)에 들어갔다.
※ 자세한 기사 전문은 월간조선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통혁당 사건이란
남파간첩에게 포섭된 김종태(사형)가 국내에서 통일혁명당(통혁당)을 만들어 학원, 노동, 종교 등 서클 형태의 소(小) 조직과 서울시내에 여러 개의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선전·선동 활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에 적발된 1960년대 최대 간첩단 사건.
1960년대 사회와 변혁운동(2) "금단의 땅" 건너려던 사람들, 통일혁명당
통일혁명당의 사람들
-김종태, 이문균, 김질락
통일혁명당의 실체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북한의 지령에 따른 간첩단 사건처럼 생각하고, 또 다른 측에서는 아직도 현존하는 전위 조직으로 여기기도 한다.
다만, 통혁당에 참가한 개인과 그 세대들이 꿈꾸던 사회가 무엇이며, 이를 위해 그들이 한 행적에 대해서는 추적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먼저 통혁당 서울시 위원장이던 김종태는 46년 대구 10.1항쟁의 혐의로 상당 기간 고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둘째형인 김상도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의원비서직에 전념했지만, 56년에는 서울대 문리대에 '청맥전선'이라는 비밀 써클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4월 항쟁이후 경북노동연합회 지도고문, 경북피학살자유족회 고문, 교원노조 등에 김종태는 개입했다.
5.16쿠데타 이후 김종태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무렵, 전쟁 기간 다양한 형태로 잔존하던 활동가들이 전위 조직을 형성하려는 흐름이 나타난다. 물론 이런 인식 변화는 61년 북한 노동당 제4차 당대회에서 남한의 독자적인 당 건설 노선을 채택한 배경도 있었다.
이후 김종태는 남파된 김수영과 동반 월북했던 김송무와 만나, 임자도로 가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으로부터 청년학생과 노동조합 간부를 포섭하고, <청맥>지를 창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고, 이것이 통혁당 서울시위원회의 시발이 된다.
다음으로 민족해방전선을 담당했던 김질락은 김종태의 친조카였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경남매일신문사 논설위원 등을 지내다가 김종태의 제안으로 청맥을 만들면서부터 통혁당 활동을 개시한다. 김질락은 이문규에 비해 대학 시절 써클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알려진다.
마지막으로, 이문규는 대구 지역 부호 집안 출신으로, 대학 시절 서울대 문리대 이념써클인 '신진회'의 핵심인물로, 4월 항쟁 이후 학생운동을 비밀리에 지도한 지도부로 알려 졌다. 그 역시 <청맥>지 활동을 시작하면서, 통혁당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통일혁명당의 활동
먼저 전제되어야 할 점은 통혁당은 완성된 조직이 아닌, '준비 단계'의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통혁당 건설과정의 이중성으로는 먼저, 구 남로계열과 60년대 새로운 변혁 운동 세대의 결합일 것이다. 통혁당은 "선 진보적 인텔리, 후 기층인자"라는 조직화 방식 아래 조직의 확장을 추진했다.
통혁당 지도부의 조직 형태는 위 3인의 '협의회'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혁당 초기 조직형태는 삼인소조를 기본조직으로 하고 종선, 단선을 원칙으로 하여 횡선(橫線)과 월선을 절대 금지했다.
또, 조직방법은 처음에 포섭대상자를 모색하되 ①가족, 친지, 동창, 친우, 직장 등 생활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찾아내고 ②출신성분과 가족관계, 학력, 직업, 성품 등을 미리 조사, 가급적이면 특수기관이나 경찰관 등의 가족이 아닌 자를 선정 ③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을 고르고 일단 포섭대상자가 결정된 후엔 부단한 열의로 접촉, 구두교양을 위주로 필요에 따라 문건을 사용하여 조직화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알려진다.
한편 당시 서울시위원회의 임무는 ①혁명의 대중적 기반 축성 ②당의 조직 강화 ③각종 학술연구 써클의 조직과 당 지도 간부의 양성 ④기초 써클 강화에 의한 당세포 조직의 재편 ... ⑦모든 조직을 장래 유격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술적 간부의 획득 등이었다. 이러한 임무의 달성을 위한 조직화와 관련, 주요 대상은 학생들이었다.
김질락의 회고에 따르면, 서울대를 비롯 고대, 연대, 중대, 숙대 등 주요 대학에 조직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민족주의 단계의 교양이 끝난 포섭대상자들이 선정되어 있었다. 그 외 민중부문에 대한 조직화와 관련, 서울대 구농회, 농진회 등 멤버들과 접촉하거나 영등포 지구 하층 청소년의 교양, 덕소의 농민학교 운영, 화남농장, 백운산농장 등에 실무자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맹아적 단계의 운동을 초기적으로 교양하는 수준이었다. 운동의 선두그룹의 인식은 체제와 혁명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지만, 여전히 선진운동 그룹과 대중운동 사이의 수준, 인식상의 차이가 컸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5.16 직후 대중운동의 거점이 부재했고, 통혁당이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던 농민운동 조직만 해도 거의 부재한, 한마디로 대중운동의 진척이 매우 느린 조건의 산물이라고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민족해방전선(이하 민해전)과 조국해방전선(이하 조해전) 그리고 청맥으로 이어지는 통혁당의 주요 조직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조해전과 민해전의 구성원으로는 <그림1>에 나오듯이, 전자는 이문규, 이재학, 오병철 그리고 윤상환 등으로, 후자는 김질락, 신영복 그리고 이진영으로 이루어졌다.
민해전의 경우, 당 수준보다 낮은 강령과 규약을 기초로, 다양한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소위 통전체를 건설하기 위한 전위조직으로 구상했고, 이 두 조직은 조직 발전 단계로 보아 소조형태로 조직의 맹아를 형성하는 단계였다.
다음으로 <청맥>은 합법적인 대중잡지로, 그 역할은 민족주체의식과 반미의식의 선전선동의 무기,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청년, 지식인 결집의 장, 당내 지도핵심 발굴의 장이었다. 전체적으로 청맥의 논조는 반정부, 반미노선으로 향했고 반공적인 기사는 일체 게재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보안상의 이유로 사회주의를 논평하는 기사도 게재되지 않았다.
끝으로, PS(from paper to steel)라 불리는 무장투쟁 계획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이런 시도는 문제를 제기한 정도이며, 상당히 수사과정에서 과장된 것이다.
신영복도 한 잡지와의 회고에서 "혁명에 있어서 무장력 준비는 원칙문제입니다 ... 소위 PS계획이란 문건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무장력을 혁명의 원칙의 문제로 제기했을 뿐 ... 저는 다만 유격전쟁의 조건을 베트남의 정글, 라틴아메리카의 농촌배후지, 중국의 정강산과 같은 자연적 조건에 국한해서 사고하는 것이 온당한가라는 문제제기를 하는 데 그쳤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금단의 땅, 유형의 세월
- 통혁당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며
통혁당의 특징은 먼저 활동의 지속성을 들 수 있다. 60년 직후 임자도 조직이래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직 재건 시도한 점이 그 단적인 예이다. 또한, 이전 시기 혁신정당과 조직 위상이 다른, 전위 조직 지향을 분명하게 했고, 전후 신구혁명운동 인자의 결합한 점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통혁당 운동을 4월 항쟁 이후 변혁운동의 맥락에서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지적 가능한 것이 북한의 남한 혁명운동에 대한 주관적 사고의 문제다.
60년대 후반기 일련의 무장 투쟁 사건과 잇따른 조직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북한의 통일전선 정책담당주체들은 남한에서 변혁운동 주체들이 지닌 중압감에 대해 매우 피상적으로 사고했다.
산업화와, 이에 동반된 반공이데올로기의 내면화 과정에서 북한의 남한 변혁운동에 대한 개입은 부정적인 경우가 잦았다. 이는 북한과 강한 연관이 존재하는 통혁당 식의 조직 모델이 얼마나 남한 운동에 긍정적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화두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이 단지 우연이나 인간적인 관계만으로 통혁당을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서울 조직의 경우 김종태의 지도 아래, 50년대 이후 선진적인 인식을 지닌 인텔리들의 결합이 한 축으로 이루어져 형성된 것이며,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한 임자도 조직과 기타 지역 조직의 경우, 전후 잔존하던 구좌익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파시즘 국가에 의한 일방적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되고, 타자화되었던 비판적 지식인의 혁명화 과정으로,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군사 쿠데타란 현상 자체가 이들 변혁적 인텔리들로 하여금 통혁당이란 조직의 맹아를 만들도록 강제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jpwon@orgio.net
(김원/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박형상 중구청장의 아주 특별한 선물
| 기사입력 2011-02-24 06:03
【서울=뉴시스】양길모 기자 = "언제나 처음처럼 그 열정과 노력으로 더욱 더 큰 발전 이루시길 바랍니다."
박형상 중구청장이 지난 23일 구청의 4·5·6급 승진자 총 15명에게 책을 선물했다. 선물한 책은 신영복 교수의 베스트 서화 에세이인 '처음처럼'.
이 책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여 년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47세의 중년이 돼 바깥세상으로 나온 신영복 교수가 그동안 발표한 글 중에서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글을 서화와 함께 엮은 것이다.
박 구청장이 이 책을 선물한 게 된 것은 지난 1월말 김덕진 중구공무원노조 지부장에게 이 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노조지부장의 선물을 받은 박 구청장은 밤새워 이 책을 읽은 후 감동을 받아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승진자들에게는 박 구청장이 직접 책에다 '승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언제나 처음처럼 그 열정과 노력으로 더욱 더 큰 발전 이루시길 바랍니다'라는 축하글도 남겼다.
박 구청장은 "이 책은 삶에 대한 사색을 품어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물론, 언제나 우리의 관심은 인간과 인간다운 삶에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며 "이 책 제목처럼 항상 초심을 간직하면서 원칙과 상식이 존중받는 사람 중심의 중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dios102@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