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1993년의 상하이 이야기
1993년, 덩샤오핑의 ‘남부시찰 연설’이 있었던 이듬해, 남부지역 특구에 뒤이어 상하이 푸둥이 중국 개혁·개방의 최전방으로 떠올랐다. 3년에 걸쳐 해가 다르게 급격한 변화를 거치면서 상하이는 초고속 발전궤도로 접어들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농촌에서 올라온 다궁메이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1980~90년대 중국, ‘농민공의 물결’로 대표되는 근현대화 과정 속에 나타난 도시와 농촌의 관계다. 도농관계는 어떻게 도시의 자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가? 상하이의 도시 의식은 어떻게 이 이야기의 서사를 통제하는가? 그러한 서사 자체는 어떻게 도전 받는가? 이러한 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농촌에서 도시로 진입한 여성 주체성의 구축 과정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2. 도시의 ‘죗값’과 봉합된 ‘대단원’
<마오마오 고소사건>은 후난에서 온 다궁메이와 상하이 뒷골목 룽탕의 남자 장애인 사이의 미혼가정에서 태어난 아이 이야기다. 마오마오가 태어나고서 아버지는 자신의 장애가 아이를 키우기에는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해 마오마오를 자기 자식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석 달 된 딸아이를 데리고 법원에 찾아가 그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신시기 이후 소설과 영화, 텔레비전, 사진 등 여러 예술양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실’의 추구를 경험했다. 또한 이후 그 ‘진실’에 대해 회의와 배신을 다시 보여주었다.
《귀주 이야기》는 명목상으로는 상급기관에 탄원을 하러가는 농민 이야기지만, 여인공 추쥐의 동기는 사실 남권 중심의 봉권종법사상으로 귀결된다. 영화는 추쥐의 ‘근력 있는’ 성격을 희극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소송 동기를 남권의 비호를 통해 대를 잇기 위한 전통 종법사상으로 귀결시키는 태도는 근현대성과 대비되는 농촌의 봉건성을 감추고 있다. 이러한 서사적 입장은 영화와 그 인물에 희극성을 부여했다. 장이머우는 사실주의 기법을 빌려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취하지만 이야기의 서사와 구조는 반현실적이다. 그는 이야기라는 방법으로 주류 권력 담론과 결탁을 추구했고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옭아맸다. 《책상 서랍 속의 동화》는 그러한 서사전략의 재판이자 더욱 노골화한 경우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우선 다음과 같은 은유에 주목하고자 한다. 농촌이 도시를 만나면 농촌은 여성이 된다. 강력한 ‘타자’앞에서 주체는 언제나 여성의 형상과 상상으로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사실 천멍전이다. 그녀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가장 직접적인 동기다. 우선 프로그램은 상하이의 ‘농민공 물결’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시골 여성 천멍전이 상하이에 의해 합법적인 상하이인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또한 관건이었다. 방송은 이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상하이는 결코 아무렇게나 들어올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방대한 농민들은 오늘날 중국 도시에서는 숨겨진 존재다. 도시가 1인당 평균 수입을 계산할 때 호구지표에만 따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건너온 다궁메이가 호구 증명에 따라 상하이인이 되는 유일한 통로는 결혼이다.
농촌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의 물결 때문에 도시는 영원히 범죄의 공포에 빠져들 것이며, 대중매체는 영원히 외지 인구의 범죄를 보도할 것이다. 상하이인의 소시함과 배타적 자세는 바로 그런 운명의 부산물이다. 이 말은 왜 그런 차별화 기제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 도시를 위한 주석이다.
사실 그 어떤 중구의 도시를 이해하는 데서도 피해 갈 수 없는 첨예한 문제는 도농관계가 도시 안에 깊이 내제해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근현대화 역사는 바로 그런 관계 속에서 험난하게 전개되어 왔다.
청말 이후 중국의 도농관계에는 구조적 모순이 등장했다. 근현대화한 도시는 수면 위에 노출된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그것은 사실 수면 아래 감추어진 거대한 소리 없는 농촌이라는 존재 그 잠재의식으로서 초조함의 근원에 의해 제어되고 있었다. 오늘날 근현대화한 도시가 자신과 농촌의 동일한 관계를 부인하고 이런 역사성으로부터의 격리를 통해서 서양을 향해 자아를 확립하고 상상해야할 필요가 있음을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부정적 충동에 따르는 위험과 불안을 암시하기도 했다.
마오마오는 상하이라는 도시의 죗값이다. 마오마오는 천멍전이 상하이라는 도시에 들어올 수 있는 합법성을 얻는 근원이다. 따라서 마오마오의 혈통 감정은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그 때문에 연출자는 방송국의 권력을 행사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는 친자감정의 나이도 되지 않은 마오마오의 피를 뽑게 한다.
연출자, 매체, 시청자, 자오원룽, 천멍전, 마오마오가 저마다 자신의 것을 얻게 되었다. 모든 갈등과 충돌이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고 풀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대중매체에 의해 봉합된 ‘대단원’의 결말이 갖는 의미다.
이 이야기의 서술자는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도시의 입장에서 있다. 사실 이야기는 본래 감춰진 더 큰 서사 속에 놓여 있었다. 이야기는 이 도시에 잠재해 있는 도덕적 근심을 완화해 주었으며 이 도시가 만족할 만한 도덕성의 통로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농촌을 마주하고 서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도시의 죗값이기도 했다.
3. 농촌에서 도시로 : 정체성과 위기
그러나 <마오마오 고소사건>의 ‘대단원’결말이 봉합되는 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모종의 냉혹한 진실과 현실만을 보여주었다. 사실 <마오마오 고소사건>에서 소송이 처음부터 천멍전에게 결혼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외려 일종의 세례였다.
자오의 도덕적인 자아회피는 도시의 ‘타락의 위험’에 대한 왕안이의 우려와 매우 비슷하다. 동시에 농촌은 음란한 유혹의 상징이 된다. 그녀는 농촌의 도덕적 가치의 수호자로서 비로소 자기 주체성을 수호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순결하다는 사실을 마오마오는 증명해 줄 것이다. 이것이 천멍전의 출발점이었다.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얻어내려 했던 것은 양육비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세례 증명이었다.
매체의 개입으로 그녀는 결혼을 받아들였고 법률적으로 상하이 사람이 되었다. ‘상하이 사람’이 근의 희망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마오마오를 이용해 상하이에 끼어들고자 했던 것이 그녀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들의 결혼은 사실 상하이의 매체와 시청자들이 훨씬 더 촉구하고 바라 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이념, 즉 사실주의 기법과 현실의 진실성에 대한 존중은 천멍전이 직접 카메라를 대면해 비판할 기회와 가능성을 가져다주었다. 대중매체가 그녀를 선택한 동기와 그녀가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동기, 이 두 가지는 확연히 다른 두 입장에서 비롯했다. 서로 다른 동기의합작과 여러 합작 테스트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성부의 소리를 듣게 된다. 서로 다른 소리는 한 가지 총체 서술의 억압을 그다지 조화롭지 않게 돌파한 후 각자 자신의 의미를 표현했다. 표현된 객체로서 ‘타자’는 객체의 패러다임 속에서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완강히 드러낸다. 이 또한 오늘날 중국의 신다큐멘터리 운동이 갖는 중요한 의미다.
천멍전이 결혼을 받아들인 것은 그녀의 자아 정체성이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그녀가 상하이인임을 수용한 것이고 또한 새로운 자아 정체성의 내원으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거세’의 방식을 택해 그녀에 대한 도시의 규범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인정과 결백을 얻게 되었고 도시는 자신의 통행증으로서 그녀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천멍전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신분, 도시의 신분을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강력한 심에 의해 소환되고 창조되었음에도 그 힘의 비호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는 새로운 자아 정체성이 처음부터 위기와 분열로 가득 차 있었음을 뜻한다. 가정과 방송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회적 자원이다. 이 둘은 천멍전이 상하이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준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은 오히려 그녀를 억압한다. 가정 자체는 결코 외부 세계와 격리된 사적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가정은 애초부터 공공화한 사적 공간이었다. 즉 천멍전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승인이라는 탐구에 의해 부여된 거대한 대가였다.
천멍전의 이야기가 추쥐의 이야기와 다른 점은, 천멍전은 추쥐처럼 소송에서 근현대성과 엇갈린 자리에 놓인 몽매한 농촌 여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도시에서 농촌에 이르기까지 천멍전은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바로 그러한 거대한 사회적 단절을 뛰어넘어야 했다.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그녀의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단절은 치료할 수 없는 상처처럼 보인다.
4.맺음말: 은닉된 주체들
노동자계급이 주체성을 잃어버린 시대, 근현대화의 맥락 속에서 농촌사회가 자신들의 주체적인 지위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억압된 주체는 격리된 채 이름과 성을 숨기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토지와 정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타자의 공간에서 유랑하고 또 쫓겨난다. 그들은 주체 신분이 없는 객체적 존재가 된다. 주체 신분의 허무는 그 배후의 정치적, 경제적 힘의 부재를 뜻한다. 즉 하층 노동자들이 ‘신체’ 즉 피와 살, 욕망과 눈물이 될 때, 일종의 생물적 존재가 될 때 그들은 비로소 대중매체의 시야에 들어올 가능성을 얻게 된다. 우리가 단지 진실이 유리된 고통스러운 재난, 눈물, 시체, 유해 등과 같은 물적 존재만을 볼 때, 억압된 주체는 영원히 익명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타자’의 말없는 희생과 고통 위에 세워진 근현대문명은 평화로울 수 없다. 주체의 익명은 결코 존재의 허무를 뜻하지 않는다. 그러한 익명의 존재는 우리의 원죄다. 그것은 피억압자의 권리가 언젠가는 독촉 받을 날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피억압자가 신분을 얻고 해방을 추구한 과정들은 일찍이 이미 저마다 ‘혁명’이라고 명명되었다. 중국의 근현대화 과정은 피와 불로 얼룩진 죗값의 역사다. 도시들은 저마다 모두 그렇게 이른바 근현대화라는 원죄를 짊어지고서 그렇게 무거운 숙명 속에서만 속죄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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