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과 트럼프, 그리고 하나님 나라
윤석열은 시종일관 부자감세와 암묵적이지만 의료민영화와 같은 부자들을 위한 작종 정책을 지지하고 펴왔다. 그는 철저하게 부자들에게 편향된 자였다. 그 말의 의미는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특히 강압적이고 무자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가 가장 잘 한 일이 계엄령선포였다고 생각한다. 그가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남은 임기 동안 얼마나 우리나라가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은 2년 반이 아니라 매 순간이 돌이킬 수 없는 파괴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를 통해 드러난 바람직한 현상 또한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동안 사회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극우들과 친일들을 전면에 드러나게 했기 때문이다. 국회의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 정신병자와 같은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암약하던 이들을 일망타진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사회는 일직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좌로 치우치면 우로 기울어지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의 재임기간은 그것이 우로 치우친 시기였다. 물론 문재인 정권에 대한 반대 현상이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가 뒤로 후퇴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위해 의미가 전혀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나라가 극단적으로 갈라진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반대급부라고 할 수 있다. 다행인 것은 극우들의 나이가 대부분 많다는 점이다. 나이가 든 나는 ‘동귀어진’을 생각할 정도로 나이 든 사람들이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말을 해왔다.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은 죽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더구나 나를 포함한 나이 든 이들이 사회의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부담도 줄어지고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나이 든 이들이 빨리 혹은 일거에 죽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절박함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나도 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를 근원으로부터 살펴야 한다. 왜 우리나라는 이처럼 극열하게 분열되어 서로 맹렬하게 싸우게 되었는가. 보수와 진보란 애초에 그처럼 물과 기름 같은 것인가. 당파싸움의 전통이 다시 우리 시대에 망령으로 되살아난 것인가. 사실 성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사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그 복음은 숨긴 것을 드러내고 왜곡된 것을 바로 편다. 복음은 가난한 이들이 처한 억압적 상황과 차별, 폭력, 전쟁, 불평등한 세상, 망가진 지구를 바로 세우는 일을 지향한다.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것이 그런 나라, 곧 하나님 나라다.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파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에로 이르는 길이며, 이것을 위해 일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은 결국 돌아서야 했다. 청년은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보다 인간에게 실증적인 것은 없다.
나는 오래 전 지속적으로 드렸던 기도의 제목이 있다. 그것은 가난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어쩌면 나도 부자 청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재물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난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복음을 통해 배웠고,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기도는 응답을 받아 나는 마침내 가난해질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지금의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나는 혹독한 가난의 시간을 어렵게 헤쳐 나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많지만 이런 나를 이해하는 이들은 없다. 누구도 나처럼 가난을 위해 기도하는 이도, 가난을 감사로 받는 이들도 없다. 더구나 가난한 것을 하나님 백성의 증거로 생각하는 이들은 더더욱 없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가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혹독하게 마무리하신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에 따르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심각하게 듣지 않고, 에둘러 지나친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담긴 의미를 간과한다. 그것은 복음이 지향하는 일들을 간과하게 만든다.
인간의 탐욕은 복음과 나란히 갈 수 없다. 결국 복음이 지향하는 일들을 간과한다는 것은 복음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복음은 결코 그리스도인 개인의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영혼수집광이 아니시다. 복음이 말하는 구원은 곧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초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국부론>을 쓴 18세기에 살았던 아담 스미스는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르는데, 큰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 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는 공히 공멸의 위기에 처했다. 가난한 이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 역시 죽음에 직면했다. 그것은 오늘날 세상이 18세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 세계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일론 머스크의 의미는 앞으로 더더욱 탐욕이 주도하는 세상이 된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전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더더욱 심각해질 것임을 예고한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부자 청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빈부격차로 공멸하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부르심이다. 하나님 나라가 부자들의 진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윤석열은 ‘스몰 트럼프’이고 그들은 맘몬의 노예들이다. 윤석열의 탄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멸을 향해 치닫는 맘몬의 세상을 직시하고, 공생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탐욕에서 돌아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주님의 음성이 내 귀에 쟁쟁하다.
첫댓글 그리스도인 목사로 현실 세상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인식에 대해 많은 부분 공감하며 추 천하고 싶은 글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5.01.23 1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