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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근교산>- 서초구 우면산-둘레길 종주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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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소가 누워있는 형상의 牛眠山 탐사기, ☞일시: 2020년 3월 21일(토요), 기록: 자유인산악회 한문희총대장, ☞코스: 실제거리16.4km, 7:00시간소요, 홍보전단지,
-09:30분경, 서울 사당역 도착, -09:40분, 방배동 우성APT, -09:50분, 방배동 창호제작 및 폐자원 지역, 서울둘레길 들머리, -10:01분, 서울도심 고속도로 터널위 3거리 정자쉼터, -10:10분, 군 벙커와 산불감시초소봉우리, -10:14분, 205m봉우리, -10:32분, 254m봉우리, 테크목 쉼터, -10:35분, 시멘트 포장군사도로, -10:38~42분, 공군부대 84XX부대(우면산정상 306m)가 주둔, -10:45분, 공군부대 아래 유점사3거리 정자 쉼터, -11:07~40분, 우면산293m(牛眠山), 소망탑정상, 정영기대원 조우, -11:46분, 태극쉼터, -12:00시, 우면동 관문사(觀門寺)갈림길, -12:14분, 우면동 코오롱 하늘채@옆, 놀이공원, -12:17분, 우면동 우면교(牛眠橋) 도로, -12:25분, 양재천(良才川), -12:37분, 전철9호선 양재 시민의 숲, 매헌역 앞, ☞거리 참고도(GPS기준) 01- 사당역-공군부대-우면산(소망탑) 3.8km, 02- 우면산-우면동우면교-양재천-매현역 4.1km, 소계= 사당역-우면산-양재천-양재시민숲매현역, 7.9km, <왕릉:王陵>- 구룡산-대모산이 국정원과 헌인릉을 품고 있다, -우면산 탐방 이어서 구룡산-대모산-헌인릉 탐방길, -12:58분, 염곡동 kotra, -13:05분, 염곡동 서울둘레길 들머리, -13:14분, 능선3거리(한국연구재단), -13:29분, 산악기상관측소, -13:37~42분, 국수봉(봉수대), -13:48~14:30분, 구룡산306m(九龍山) 점심, -15:08분, 대모산기지국(송신탑), -15:12~20분, 대모산293m(大母山), -15:34분, 헌인릉 3거리, 산행종료, -16:10분, 古王陵 탐방길, 헌릉인릉 입구, -16:18분, 국정원 정문 앞, -16:20분, 헌인릉 매표소 -16:21~17:10분, 헌인릉 견학, -17:20분, 헌인릉 입구 도로,-모든 일정 마침- > ☞거리 참고도(GPS기준) 01- 매헌역-염곡동 1.4km, 02- 염곡동-구룡산 2.1km, 03- 구룡산-대모산 1.9km, 03- 대모산-헌인릉 3.1km, 소계= 매헌역-염곡동-구룡산-대모산-헌인릉, 8.5km, 전체합계= 사당역-구룡산-매헌역-구룡산-대모산-헌인릉, 16.4k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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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나를 보고(청산혜요아: 靑山兮要我) 나옹선사( 懶翁禪師 ) 靑山兮要我以無語 ( 청산혜요아이무어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 창공혜요아이무구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 료무애이무증혜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 여수여풍이종아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 청산혜요아이무어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 창공혜요아이무구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 료무노이무석혜 )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 여수여풍이종아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문화재>- 사적194호 구룡산+대모산에 있는 헌인릉(獻仁陵)- 05, 관악지맥 끝자락 인릉산과 범바위, 구룡산과 대모산, 헌인릉을 품고있는 모산의 대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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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인릉(獻仁陵, 사적194호): 대모산 남쪽 기슭, 서초구 내곡동 산 13의 1번지에는 사적 제194호로 지정된 헌릉과 인릉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갈한 느낌의 한옥이다. 이 집은 원래 인릉을 지키던 능참봉가(陵參奉家)인데 현재 는 관리사무실로 쓰고 있다. 헌릉을 지키던 능참봉가는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 둘러보면, 풍수(風水)에 대해 잘 모르는 평범한 눈으로도 명당(明堂)임을 알 수 있다. 왕릉은 풍수지리상 명당에 자리 잡게 되는데, 좌청룡(左靑龍)의 의미로 능의 왼쪽으로부터 물이 흐르고 뒷산을 배경으로 타고 내려와 앞산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한다고 한다. 헌릉과 인릉은 뒤쪽으로는 대모산과 구룡산이 주산(主山)으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쪽으로는 인릉산(仁陵山)이 조산(朝山)이 되어 마주하고 있으며 능역(陵域) 앞에는 맑은 명당수(明堂水)가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장풍득수국(藏風得水局)의 형세라는 설명과 보이는 그대로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또 능 뒤편에는 북현무(北玄武)의 의미로 소나무를 심게 되는데, 그 이유 는 소나무가 나이가 들면 껍질이 거북이의 등처럼 갈라지기 때문이라고 한 다. 또 능 앞쪽으로 흐르는 명당수는 능의 앞쪽을 습하게 만들기 때문에, 습지에서 잘 자라는 오리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처럼 풍수적 의미를 지닌 조 선 왕릉 주변의 소나무와 오리나무는 조선시대 내내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고유한 경관을 유지해 왔는데, 일제 때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수탈되고 불타버린 곳이 많았다. 그런데 이곳 헌릉과 인릉은 뒤편으로 소나무 숲이 잘 보존되어 있고, 앞쪽으로 오리나무 숲이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찾아온 이들을 반겨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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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 (仁陵) 사적 제194호 능의구성: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하여 단릉과 같은 형식이다. 인릉의 능역에는 곡장 3면, 난간석 12칸, 석양 2쌍, 석호 2쌍, 혼유석 1개, 망주석 1쌍, 장명등 1개, 문인석과 석마 각 1쌍, 무석인과 석마 각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과 재실등이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 12칸만을 둘렀으며, 기타 상설은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은 조선 초기의 팔각등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무석인은 생동감 있는 표정과 힘차고 활달한 조각 기법,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매우 사실적이어 조선 후기의 석물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릉의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이 중 하나는 최초의 조영 당시의 것이고, 하나는 고종 때 순조숙황제로 추존되면서 세운 것이다. 능의역사: 순조는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1835년 4월 19일 파주 교하 구후(舊後) 장릉(長陵) 국내에 안장하였고, 능호를 인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풍수지리상의 불길한 논쟁이 대두되어 천장을 결정하게 되었다.『철종실록』1855년(철종 6) 1월 18일의 기사에는 "인릉의 능침을 봉안한지 21년이나 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외의(外議)가 서로 논쟁하고 있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어머님께서도 이런 내용으로 하교하셨지만, 일이 지극히 중차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경등과 상의하여 결정해서 행하려 한다.”로 시작하는 내용의 인릉의 천장에 대한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논의가 있은 다음해인 1856년(철종 7) 10월 11일에 인릉은 현재의 위치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 언덕으로 천장되었다. 1857년(철종 8) 8월 4일에는 창덕궁 양심각에서 순원왕후 김씨가 승하하여 같은 해 12월 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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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獻陵) 사적 제194호 능의구성: 헌릉은 3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의 봉릉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병풍석의 규모와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초기 조선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 혼유석, 장명등은 1쌍이고 양석, 호석은 각각 4쌍, 문무인석과 마석은 각각 2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며 조선시대에서는 가장 웅장한 배치 방법이다. 헌릉이 지닌 조선 초기 왕릉으로서의 특성을 두 가지 꼽자면 소전대와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를 들 수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라고 하는 석물은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지방을 불사르는 시설로 태조 건원릉과 이곳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석물이다. 한편 봉릉 앞 상석 아래에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인데, 이와 같이 고석이 5개인 능은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으로 모두 조선 초기 상설제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헌릉에는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은 물론, 원찰의 설립을 금하였다. 능의역사: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건좌손향으로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22년(세종 4) 태종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릉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을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능원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도비와, 1695년(숙종 21) 하나 더 증설하여 세운 것이다. 왕릉의 신도비는 태조의 건원릉, 정종의 후릉, 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때까지 세웠다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했는데, 세종의 영릉 신도비는 서초구 내곡동 원래의 터에 묻혀 있던 것을현재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볼 수 있으며 1973년에 발굴하여 현재의 청량리 홍릉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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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의 영원한 동반자 살아있는 백두대간사관학교, 전설팀 자유인산악회, > 바람따라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이 흐릅니다.
<박현>- 바람아 불어라, -자유인산악회/한문희총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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