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1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돌베개)
자라고 있는 것들
유난히도 길었던 여름이 언제였는지 벌써 가물가물해졌다. 손끝이 먼저 가을을 맞이하며 거칠어지고 따뜻한 물을 찾는다. 절기를 따라 낮의 길이는 짧아지고 밤은 그만큼 깊어지는 계절이다. 이 계절,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한없이 따스하고 섬세한 선생님의 눈길과 깊어져 가는 생각을 따라가 본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촉촉해진다. ‘팬지꽃 한 포기’(151쪽)에서, ‘10센티미터짜리 화분에 담긴 꽃나무’(153쪽)에서 더욱 멈칫한다. 베란다에 놓인 두 개의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떠오르는 생각들이 반갑다.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화분을 하나 받아왔다. 조심조심 가지고 나오는 모습이 참 예뻤다. 아이가 가지고 온 화분에는 10센티미터가 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선인장 하나가 솟아 있었다. ‘선인장이 뭐람. 예쁘고 귀여운 식물도 많은데.’ 속으로만 투덜거리고 말았다. 아이는 선인장에 이름도 지어 주었다. ‘근육이’ 당시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내 눈에는 볼품없어 보이는, 잔가시가 너무 많아 혹시나 아이가 찔리지는 않을까 싶어 너무 가까이서 보지는 말라 했던 선인장. 아이는 ‘근육아, 근육아’ 부르며 잘 자라라고 이야기를 건네곤 했다. 맘먹고 청소할 때마다 그 작은 화분은 아이 방에도 있었다가 거실에도 있었다가 어느 날은 베란다 한쪽에 내놓았다. ‘살아 있는 건가. 자라기는 하는 건가.’ 꽃이 피는 것도 잎의 모양이 커지는 것도 아니고, 새순이 돋는 것도 아니라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었다. 아이는 처음 가지고 왔을 때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베란다에 나가 화분 앞에 앉아 ‘근육아’ 부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직 거기 있었구나’ 하며 물을 주었다.
아이는 이제 4학년 되었다. 근육이가 우리집에 온 것도 벌써 3년이 되었다. 며칠 전 베란다 청소를 하면서 놓여 있는 화분들을 정리했는데, 근육이가 언제 이렇게 자랐나 싶을 정도로 훌쩍 커 있었다. 자라기는 하는 건가 싶었는데 ‘화분이 좁겠구나. 옆으로 쓰러지겠구나’ 싶을 정도로 자랐다. 길이를 재어 보니 20센티미터 가까이 된다. 화분을 갈아주려고 조심조심 들어 올리는데 뿌리도 제법 깊다. 뾰족한 것이 콕콕 찌르면 아프겠지 생각했던 가시도 처음 만져보았다. 가시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살며시 쓰다듬어 보니 부드럽다. 온기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살아 있는 것을 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을 따라 만지면 가시가 부드럽기도 하구나.’ 처음 알았다. 이만치 자랐다는 것도 이제야 보인다. 기특하다. 예쁘다 바라봐 주지도 않았고, 세심하게 돌봐 준 것도 아닌데 자라고 있었다니.
“근육이가 처음보다 두 배는 더 자란 것 같아.” 살짝 감격해서 아이에게 말했다.
“그럼, 근육이는 잘 자라고 있어.” 아이는 나보다 먼저 알았나 보다.
수수꽃다리. 참 예쁜 이름이다. 봄이 무르익을 때 전해오는 향기는 또 얼마나 좋은지. 작은 대롱 모양의 꽃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모습이 자세히 보면 앙증맞기까지 하다. 작년 봄에는 기어이 그것을 소유하겠다며 화분 하나를 집으로 들였다. 가지며 입이며 무럭무럭 자라, 해마다 봄이 오면 집안 가득 은은한 향기가 채워지기를 바랐다. 가져올 때 맺혀 있었던 꽃들이 떨어지고 향기도 사라지고 가늘디가는 가지에 푸른 잎들도 하나하나 떨어지더니 가을 겨울을 보내며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화분에는 이쑤시개만큼이나 얇은 가지만 남았다. 올해 봄, 길가에 수수꽃다리 나무들은 새순이 돋고 이내 대롱대롱 꽃망울이 맺히더니 향기가 터져 나오는데, 우리집 수수꽃다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따뜻한 자리로 옮겨도 보고 영양제도 주었는데 마른 상태 그대로였다. ‘아이코, 이거 집에서는 제대로 못 자라나 보다. 아니 바깥에 있는 애들은 더 춥고 메마른 곳에서도, 그늘진 곳에서도 잘 자라 꽃을 피우고 있는데 한 해를 이겨내지 못하는 건가.’ 홱 뽑아버릴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 그냥 구석에 두었다.
길가에 수수꽃다리는 발현(發現)을 마치고 짙은 초록 잎사귀가 풍성해지는 6월, ‘잊혀진 자리에서 꽃나무는 저 혼자의 힘으로 힘차게 빛나는 꽃을 준비하고’(153쪽) 있었다. 그 마른 가지에서 연둣빛 순(筍)이 자세히 보아야만 보일 정도로 존재를 드러내더니, 여린 모습 그대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커졌다. 그렇게 가지 곳곳에서 잎이 자라더니 ‘어머나!’ 옅은 자줏빛 꽃망울이 보였다. ‘세상에, 살아 있었구나. 자라고 있었구나.’ 길가에 가득했던 제 친구들에 비하면 아주 작고 약한 모습이지만, 많이 늦기도 했지만, 자기의 때가 되니 이 작고 약한 녀석도 발현한다. 가까이 다가가 코를 대니 은은한 향이 안으로 쏙 들어온다.
내 눈에 들지 않는다고 안 예쁘다 했다. 다른 것에 비하면 너무 약하고 늦은 거 아니냐며 나무랐다. 자라고는 있는 건가, 자라지도 못하고 죽었구나 속단했다. 그런데 자라고 있었다. 자라고 있는 것들은 예쁘다. 마냥 기특하다. 우리집 두 아이도 그렇겠지. 자꾸 잊곤 하는데 근육이, 수수꽃다리를 자주 보며 기억해야겠다.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자라고 있다는 것을. 제 모습대로 예쁘게도 발현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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