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강원일보신춘문예 당선작 '미끼' |
|
( 2009-1-2 기사 ) |
|
|
김갑수<서울 서초구 반포2동>
“야, 미끼, 떴다!”
떡대의 목소리였다.그의 본명은 언젠가 들어보았지만 이내 잊어버렸다.아무도 그의 본명을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이곳에서 그의 이름은 그저 떡대일 뿐이다.내가 미끼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곳에서 ‘미끼’다.오해 마시라, ‘삐끼’가 아니고 ‘미끼’다.미끼라는 별명을 왜 갖게 되었는고 하니, 얼굴이 시뻘개져서 나를 불러대는 저 떡대처럼 몸집이 좋다거나, 되게 말랐지만 주먹 하나는 제대로 매워서 홍까시라고 불리는 녀석처럼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곳에서 맡은 직책 때문이다.미끼라 함은 다구리를 칠 때 앞에 나서서 미리 맞아주는 역할을 말한다.나는 오성파의 미끼다.오성파라, 뭔가 이름을 붙이면 가오 잡힌다는 주장에 떡대가 나서서 만든 이름이 오성파였다.뭐 어찌됐건 폼 난다는 얘기다.
처음 미끼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나머지 넷은 오랫동안 토론을 벌였지만, 결국 귀찮았으므로 얘기는 자기들이 건드린 여자애들한테로 흘러갔고, 무조건 핑크색인 그녀들의 빤스 색깔로 옮아갔다가, 술기운에 흐느적거리며 그럼 한 번 시켜볼까 쪽으로 흐지부지 결론이 났다.뭐 사실 그들로서는 밑질 게 없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놀랍게도 미끼의 역할은 떡대들의 수입에 꽤 괜찮은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난 하루에 꼭 오천 원씩만 받아갔다.어떤 날은 서너 명의 지갑에서 백만 원도 넘는 수표 쪼가리들을 털어내기도 했지만 내 몫은 꼭 오천 원이었다.내가 제일 어리고 집이 있으며 학교까지 다니고 있기 때문이란 게 그들이 설명한 이유였다.듣고 보니 그럴듯했다.개 코딱지만한 집도 집은 집이지.내 자존심이 상할까봐 걱정해서인지, 만 원짜리를 깨기가 아까워서인지 늘 오천 원짜리로만 쥐어주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학교생활이란 걸 설명해 보라면, 뭐 그닥 할 말이 없다.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다.그래서 공부 말고 연기란 걸 해본답시고 연극부에 들어갔지만 종종거리며 의자만 날랐다.반에서 거의 유일하게 말을 트고 지냈던 말대가리 짝꿍은 더 이상은 맞기 싫다며 학교를 때려치웠지만, 나는 이제까지 맞은 게 억울하지도 않냐, 좀 더 참아보지 그러냐고 입술을 비틀며 슬그머니 웃던 키 큰 담임에게, 어쩐지 맞는 건 이골이 났으므로 졸업은 해 볼 수 있을 거라며 학교에 남겠다고 하는 말이나, 혹은 에이 씨팔 같은 말은 사실 중얼거려 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인 채로 앉아 있었더니, 담임은 된장찌개를 시켜 먹을 때 책상에 깔아 놓은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내 대굴빡을 세 대 딱딱딱 때린 후에 ‘들어가 인마’ 두 마디를 내 뱉길래,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하고 교실로 돌아와 버렸다.그렇게 된 것이다.내가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된 게 말이다.왜 담임에게 불려갔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뭐 그렇고 그런 일이겠지.그러므로 그럴싸한 일도 아닐 테고 그러니까 별 건 아닐 거다.
“떴다니까 씨벌놈아!”
떡대는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 성격이 급하지만, 썩 나쁜 친구는 아니다.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것에 대해서도 ‘미끼는 보기보다 맷집이 좋다’며 은근히 나를 치켜세우는 말로 설명하곤 했다.사실 모두에게 몇 타스씩 맞아 봤지만 주먹이 가장 센 건 몸무게가 제일 많이 나가는 ‘떡대’나, 쿵푸 했다는 ‘사마귀’나, 태권도 사단이라지만 안타깝게도 단증을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시범을 보일 때마다 품새가 달라지는 ‘실바’보다도 단연 ‘까시’였다.잠시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사이 까시의 왼 주먹이 내 오른쪽 볼을 사정없이 후려쳐 버렸다.씨벌놈아, 귓구녕을 송곳으로 뚫어주랴? 까시가 왼손잡이였나 생각하는 사이 날아든 그의 말은 주먹만큼이나 오지게 매웠다.
알았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지금 맞으나 이따 맞으나 맞는 건 똑같지 않은가.모르겠다고 하나, 알았다고 하나 까시에게 맞으나 길거리 술패거리에게 맞으나 마찬가지란 말이다.하지만 줘 맞을 때 아픈 건 늘 새롭다.어제도 맞았고, 오늘도 맞지만 그때그때 새록새록한 통증이 밀려온다.멸치볶음에 다 쉬어터진 느타리김치만 올라오는 우리 집 밥상이며, 뒤통수만 때려대는 담임이며, 아직 내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우리 반 반장의 한심한 눈초리도 다 그대로인데, 이상하다 몇 대 줘 맞는 통증은 늘 새롭기만 하다.
까시의 턱짓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골목 끝에서 넥타이 셋이 걸어오고 있었다.서류 가방 외엔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늦은 밤에 말일이니 이런 경우 거지반 은행원일 거였다.월말에는 은행원들이 많이 걸린다.하기사 은행이 좀 많은가.동네마다 하나은행 국민은행 신한은행 씨티은행에 우리은행이며 기업은행까지 지폐 다발로 여기저기 차곡차곡 세워져 있다.거기선 남자들도 다달이 생리를 한다고 누군가 그랬었다.웅크려 엎딘 내 등에 올라타 타잔처럼 주먹질을 하던 어떤 돼지는, 오늘 자기가 얼마를 메웠는지 아냐며 어설픈 쌍욕을 해 댔었다.십할, 십할, 마치 하나 둘 셋 넷 구령을 붙이듯이 주먹을 휘두르며 그는 울었었다.하긴 월말이니까.
그날 걸린 넥타이 셋은 정말이지, 이 녀석들 도대체가 무슨 국군 권투부대라도 나왔는지 일으켜서 배만 때리려고 했다.나는 작고 말랐으며 꽤나 못생겼다.얼마나 때려주고 싶은 얼굴이겠는가, 그런데도 이 녀석들은 얼굴은 놔두고 자꾸만 보디블로, 보디블로, 어, 벨트라인 아래는 반칙인데요, 그러다 아주 가끔씩만 어퍼컷.나는 맞으며 구구단을 세곤 하는데 그날은 자꾸 팔칠에 오십육에서 헷갈렸다.팔칠에 오십사인지 오십이인지, 혹시 팔단을 두 번째 외우는 건 아닌지, 맞는 도중에 구구단이 끝나버리면 안 되니까 기왕 틀린 팔단을 계속 헤매며 새우처럼 몸을 오그릴 때쯤에, 저마다 몽둥이를 하나씩 잡아 든 떡대들이 들이닥쳤다.
어찌나 감격스러운 순간인지, 나는 벌떡 일어나 망을 봤다.뭐 가끔 내가 기절해서 처치 곤란으로 질질 끌려나올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떡대들은 나를 어디 한적한 골목에까지 끌고 가서 버려두곤 했다.갈빗대가 부러지기도 하고 코가 주저앉기도 했지만 갈빗대야 뭐 놔두면 그냥 붙지 않는가.게다가 그런 날에도 주머니에는 어김없이 오천 원이 들어있었다.정직하다.떡대들은.
콘크리트 벽에 몸을 기대고 온몸에 힘을 풀면 제일 먼저 코가 데데하다.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코피라도 터지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은가.훌쩍 콧물을 들이키면 비린 피냄새가 코를 타고 올라갔다가 다시 목젖을 따라 식도로 흘러내린다.망을 보며 훌쩍거릴 때마다 남의 돈 먹는 게 쉽지 않다고 노래 부르던 어머니의 말뜻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잠시 발을 멈추고 골목 안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술집 골목을 지나치는 사람들이란 그저, 어유 저걸 어쩌나 하는 표정만 잠시 지은 채 무관심하게 지나쳐갈 뿐이다.흘끗, 그러곤 끝이다.간혹 핸드폰을 꺼내들고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있지만 짭새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 떡대들이 아니다.오성파의 휘황찬란한 행동강령은 ‘속전속결’이었다.
그리하여 적당히 얻어터진 은행원들은 골목 안쪽에 급히 벗어던진 외투처럼 쌓여 있었다.떡대들은 두둑한 현금을 챙겼고 나는 오천 원을 벌었다.빳빳한 신권이었다.지갑에서 돈을 빼내자 그이들은 어어어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그들을 지탱해 주던 건 지갑 속에서 빳빳하게 자존심을 세운 신권들이 아니었을까.쇄골이 시큰거렸고 어찌어찌 한옆으로 쓰러지던 통에 팔이 좀 까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집을 향해 걸어갈 힘은 남아 있었다.
집으로 가려면 술집들이 뚝 끊기고 원룸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떨어져 내린 것처럼 수많은 모텔들이 갑자기 모여서 불을 밝힌 골목을 지나야 한다.동네 꼬맹이들은 거길 지날 때마다 괜시리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고추를 조물락거리며 얼굴을 붉혔지만, 나는 그곳을 지날 때면 왠지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다.달아오른 불빛 때문인지, 그 불빛들이 오래전 아버지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올려다 본 시청 앞 트리를 닮아서인지 어쩐지 알 수 없다.
모텔, 호텔, 모텔, 호텔 또 모텔들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길을 지나 이 차선으로 어둑신한 큰길을 건너 언덕을 오르면, 드디어 쪽방들이 닥지글거리며 붙어 앉은 우리 동네가 나온다.
그애는 [아모르] 앞에 서 있었다.한여름에도 캐럴을 불러야 할 것 같은 골목 맨 끄트머리에 말이다.네온 불빛으로 번쩍거리는 골목은, 그러므로 밝았지만 꼭 그만큼의 어둠을 함께 품고 있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불빛을 올려 보다가 고개를 내리면 골목 안은 막막한 어둠에 휩싸였다.중학교 때까지 곧잘 하던 공부가 내 아버지의 인생처럼 내리막을 탄 지 오래되어서 그게 암순응 때문인지 명순응 때문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골목 끄트머리에 서 있는 여자애의 모습은, 아무튼지간에 그저 그림자로만 보일 뿐이었다.
내가 골목길에 들어서자 그림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그리고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내 쪽을 바라보기만 했다.어쩐지 나는 긴장이 되었다.오성파의 미끼가 긴장이라니.하지만 아무리 오성파라고 중얼거려 봤자, 걸음걸이는 자꾸 어긋나기만 했다.그애는 길고 마른 그림자를 길에 드리워놓고 있었다.그림자는 좀 추워 보였다.여기저기 멍들고 깨진 몸을 움직여 그애의 얼굴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을 때, 그애가 갑자기 내 쪽으로 한걸음 걸어왔다.나는 갑자기 다가선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한옆으로 물러서야 했다.
그애는 아무 말도 없이 가까이서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퍼런 액정화면의 불빛이 그애의 얼굴을 비추었다가 사라졌다.눈매가 무척 예뻤다.그애는 열심히 문자를 보내다가는, 꼼짝없이 서 있던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너, 담배 있니?”
그애의 볼우물이 깊게 팰 때마다 서글서글한 얼굴이 붉게 드러났다.잠시 뒤 그애는 모텔 기둥에 천천히 담배를 비벼 끄고는 몸을 돌려 검은 문 속으로 사라졌다.무거운 유리문은 잠시 내 얼굴을 비춰냈다가 덜컹, 경첩이 도로 꺾이는 소리를 뱉어내며 굳게 닫혔다.나는 한참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그애가 사라진 커다란 모텔을 올려다보았다.유리문은 굳게 닫힌 채 찌그러진 내 얼굴만 자꾸 비추어냈다.
“관우, 이 자식.”
담임의 출석부가 머리통을 후려쳤다.딱히 감정을 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저 늘 그랬듯이 그가 뒤통수를 때린 것뿐이다.게다가 소변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왔다고 하지 않는가.흡연은 학생 선도 3대 선결과제라고 학생주임 등 뒤에 걸린 태극기 아래에 또박또박 쓰여 있다.“줄 한 줄이면 음성, 줄 두 줄이면 양성이다.이 쌔끼.이거 순 꼴초 아니야.니께 두 줄 제일 선명하잖아.이거,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응?”
학생부실에는 나와 함께 무작위로 지목되어 흡연검사를 당한 여남은 명의 녀석들이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다.검사 당한 애들 100프로가 양성반응이었다.학주는 의기양양 득의양양 또 뭐더라, 기세등등했다.
이상하지 않은가.좀 험상궂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 누시오.그러고는, 당신 마약했군.이러지는 않는단 말이다.그런데 학교에서는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너, 꼬추 까.싸.새끼 담배 폈군.딱딱딱.아무튼 담임은 학주의 그 서슬에 내 뒤통수를 갈기고, 쪼로록 몇 마디를 내뱉고는 출석부를 추슬러 반으로 내려가 버렸다.
종례시간이 십 분이나 지나 있으니, 성마른 아이들은 담임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려대고 있을 것이다.학원시간이 급하다, 그 녀석들은.
“초범은……교내봉사 3일, 재범은……교외봉사 7일, 앞으로 처벌기간에 상관없이 무기한……으루다가 조·종례 시간에도 대걸레 들고 청소 실시……한다.너희들은……지금부터 걸레부대다, 이 걸레 같은 노무 셰키들.지금부터……육하원칙대로 진술서 쓰기 시작한다.육하원칙은 알지? 이 무식한 노무 셰키들.‘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다.’ 엉? 부모님은……내일들 모시고 오고…….실시.”
그는 말이 좀 많다.아니, 말이 많다기보다 말과 말 사이가 너무 길다.한없이 늘어진 그의 인중처럼 말이다.그의 말을 들어주려면 큰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걸레부대는 고개를 숙이고 열중쉬어 하고는, 그저 한껏 교화된 표정을 짓고 있다.육하원칙에서 ‘왜’가 빠져 있었지만 아무도 손을 들고 지적해주지 않는다.
처벌을 ‘봉사’라고 부르는 이유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는다.학주는 아이들이 오줌을 지려 놓은 플라스틱 앰플을 흔들고 있다.나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선생이란 위대하지 않은가, 특히 학주란 자리는 말이다.그런데 교외봉사라니.어차피 보내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썩 달갑지 않으므로 이쪽이건 저쪽이건 보내지는 녀석이건 모두 건성 건성일 터였다.하지만 학교 입장에서는 일단 눈에 안 보이니 보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뚝 자르고 학주의 말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관우, 넌……어떻게 할 거야? 누구……모시고 올 거야? 응? 어머니……안 계시면 응, 이모나……뭐 할머니나……오셔야 될 거……아니야.어? 아니 아니, 야, 지금 너 뛰어 내려가서 느이 담임……도루 오시라구 해.이노무……셰키.”
도대체 집 나가버린 아버지와 한 달이면 일주일이나 집에 있을까 말까 한 어머니를 무슨 수로 불러온단 말인가.나 참, 이런 젠장.다시 학생부로 올라온 담임은 심각한 뒤통수로 한숨만 쉬어댔다.학주 앞에 마주 앉은 그의 어깨는 급식비를 못낸 학생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애를 다시 만났다.이번에도 그애는 모텔 한쪽 구석 벽에 기대서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나는 여느 날처럼 여러 대 줘 맞았고, 웬일인지 코피가 잘 멎지 않아 연신 손등으로 코를 훔쳐대고 있었다.그러므로 조금 특별하다면 특별한 날이었다.
어두침침한 골목에서 돈벌레처럼 몸을 말고 두들겨 맞으며, 나는 조금 외로웠었다.그래서였을까 이번에는 구구단을 외우지 않았다.대신 그애의 흐릿한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확실히 구구단을 외우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이었다.이를 악문 어둠 속에서 그애의 얼굴이 등불처럼 떠오르다가도, 발길질과 주먹질이 시작되면 정전이 되듯 사라졌다.그렇게 머릿속에서 자꾸만 그려보던 얼굴인데도, 막상 그애가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형편없이 부어올라 눈도 잘 떠지지 않는데다가, 코피를 줄줄 흘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서였다.하지만 달리 돌아갈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담임이 부루퉁한 내 얼굴을 쿡쿡 찌르며, 도대체 어디서 뭘 어쩌고 돌아다니느냐고 할 때나, 엄마의 지청구가 시작될 때나, 학주가 느릿느릿 퇴학이라는 말을 입속에서 알사탕처럼 굴리며 말할 때나, 나는 별 느낌 없이 살았더랬다.뭐 그냥 줘 맞고, 용돈을 버는 것뿐 아닌가 하고 살았을 뿐이었다.그런데 그게, 갑자기 조금 부끄러워졌다.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코피는 발걸음에 맞춰 줄줄줄 잘도 흘러나와 주었다.쏟아지는 코피에 웃옷을 적시지 않기 위해서는 상체를 한껏 앞으로 숙여야 했다.꼭 술 취한 아저씨 같은 걸음이 걸어졌다.쪽팔리게.
막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그애가 느닷없이 달려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담배였다.꿀럭꿀럭 피가 흐르는 내 코 앞에, 그애가 담배 한 개비를 들이대고 웃고 있었다.
“꾼 건 갚아야지.”
“너……이노무 셰키 이게 나를…… 호구로 아나, 이 셰키 좀 보게.”
학주는 내 오줌이 잔뜩 묻은 흡연 테스트용 앰플을 흔들며 소리쳤다.“오……천 원짜리야 이게, 이노무 셰키야.느이 밥……벌레 같은 노무 셰키들한테 오…… 십원 두 쓰기 아까운데, 자그마치 오……천 원을 들여서 검사를 했더니 이……게 나를 속여?” 학주는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딱히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배신감을 느낄 리도 없을 텐데, 왜 그는 투투날 애인에게 버림받은 남자처럼 흥분하는가.
지금 학주의 얼굴은 사귄 지 22일 만에 친구들에게 200원씩 걷어 가지고, 지난 22일 동안 자기들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절실했는가를 신나게 자랑하다가, 하필이면 그날 밤, 오빠 이제 그만 만나자, 깔치의 생뚱맞은 배신으로 가슴이 펑 터져버린 고삐리의 표정이다.가련해라.하는 수 없이 나는 전날 번 오천 원을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 내밀었다.의아한 표정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던 학주의 얼굴은 어느새 대충 버무린 느타리김치처럼 물들었고, 그러자마자 발길질이 날아왔다.
“이런……순……개노무……셰키가…….” 이럴 거면 준비할 시간을 좀 주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는데 때리는 사람들은 늘 서둔다.검사결과가 음성이라는 게 발길질의 주된 이유였겠지만, 아닌가? 하긴 좀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어쩌면 오히려 좀 감동했기 때문이 아닐까.오천 원짜리 앰플이 아깝다고 해서 나는 매품 팔아 마련한, 그야말로 피 같은 돈을 내밀지 않았는가 말이다.하긴 위대하신 학주님이라도 학생에게 오십 원도 아니고 오천 원이나 받는데 감격하지 않을 리가 없겠다.등등의 헛소리를 머릿속으로 주워섬기며 그저 줘 맞을 뿐이었다.앰플을 받아서 오줌을 묻혀 돌아왔을 뿐인데, 그는 되게 흥분했다.하긴 내가 담배를 끊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맞아도 싸지.아닌가? 그런데 왜 내가 담배를 끊지 않았을 것이라고 굳세게 믿으면서 부러 내게 검사를 시킨 것일까?
그냥 물어나 보지.어쨌거나 맞는 건 늘 새롭다, 하는 순간 갑자기 요의가 찾아들었다.이상하게도 맹렬한 요의였다.이런 당황스러운 일이 있나.정말이지 이럴 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대로 맞고 있다가는 바지에 지려버린다.무시무시한 생각이 탁구공처럼 뒤통수를 타다다다 울려댔다.하는 수 없이 나는 날아드는 발을 잡아들고 벌떡 일어섰다.그런데 그냥 빨리 일어난다는 게 좀 우스운 꼴을 만들고 말았다.내가 일어서자 다리를 붙잡힌 학주는 중심을 잃고 등 뒤에 가로놓인 책꽂이에 머리를 부딪치며 와당탕 넘어져버렸다.때리다가도 가끔은 맞는 날이 있다는 걸 조금 깨달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둥 마는 둥, 학생부 선생들이 우우 하고 놀라 서 있는 틈을 비집고 나는 화장실로 내달았다.소변기 앞에 서자 안심은커녕 나의 청양고추를 면도칼로 조곤조곤 후벼대는 것 같은 저릿한 통증이 찾아들었다.오줌은 빨갰다.그리고 또 이상하지, 전혀 시원하지가 않았다.
결국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되었다.학생주임인지 학생부장인지 선생님께서는 치료비 같은 건 오십 원도 받지 않으시겠다며 내게 무릎 꿇고 합장을 하고 손을 열심히 비비라고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얼굴로 말씀하셨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정작 먼저 무릎을 꿇은 건 어머니였지만, 뭐 그럭저럭 마무리가 되긴 했던 것이다.그리고 또 죄송한 것은 나라는 인간은 분기에 사십육만 원짜리 학비를 칠만 오천 원만 빼고 면제 받는데다가 중식지원도 받고 있지 않은가.
별 볼 일 없는 강북의 인문계 고등학교인, 소나무 언덕이라든가 뭐라든가 우리 송구 고등학교에서 학비지원을 받는 애들은 한 반에 여덟아홉 명쯤 될 것이다.어차피 담임이 조·종례 때 흘리고 다니는 이면지엔 누가 돈을 못 내는지 누가 급식을 얻어먹는지가 다 적혀 있다.쪽팔리게.중식지원은 나까지 세 명이었든가.셋 모두 ‘한부모가정’이다.부모가 이혼한 것까지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다.이 나라의 동사무소와 학교는 말이다.하지만 결석을 해도, 방학이 되어도 점심 값은 나온다.이천오백 원짜리 식권으로.그러므로 좋은 나라에다 좋은 학교다.
재범인데다가 선생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므로 무기한 사회봉사명령이 떨어졌다.교외봉사 말이다.새하얀 직육면체 근엄한 디자인으로 지어진 ‘수호천사병원’에 가서 청소를 했고, 사실 청소보다는 월남전에서 지난달까지 베트맨을 죽였다는 정신 나간 아저씨와 병원 계단에 죽치고 앉아 노가리를 까며 담배를 피운 시간이 더 많았지만, 적어도 담배를 피울 때는 그 애를 생각하곤 했으니, 봉사활동을 통해 인생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고 한껏 교화되어 학교로 돌아오게 된 건 지도 몰랐다.
1학년 초에 들어간 연극반에서는 그간 단 한 번도 배역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잘려버렸다.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연극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게 이유였지만 무대에 한 번도 올라보지 않은 나를 연극부로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연극부제명공고’를 읽고 있던 3학년 선배들은 쟤가 연극부였냐, 이름이 뭐냐, 누가 뽑았냐 따위의 말을 끊임없이 구시렁대며 내 쪽을 흘끔거렸다.그렇지만 덕분에 불미(不美)라, 이번 일뿐만이 아니라 나는 살아온 내내 한 번도 아름다워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담임이 연극부 담당 선생을 만나 좀 말려주긴 했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었다.무대 뒤편에서 의자를 나르다 보면 곰살맞기도 하지, 아버지가 왜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는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곤 했었다.아이구야 이상하지, 그들은 가난한 주제에 결혼을 해서 작고 못생긴 아이까지 낳았더랬다.뭐 그들도 산다는 게 썩 아름답진 않았을 것이다.
학교를 나서며 학주의 차를 발견했지만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꾸러미를 찾거나 하지는 않았다.검은색 그랜저 승용차였다.
학교에서 그랜저를 타는 선생은 네 부류다.첫째는 교장.둘째는 남편이 부자인 여선생이고, 셋째는 차를 아주 좋아하는 선생, 그리고 넷째는 뭔가 다른 돈벌이가 있는 선생이다.물론 교장을 포함한 모든 선생들은 자기가 삼 번에 해당한다고 눈에 힘을 주며 쉬는 시간마다 나가서 차를 닦는다.심지어 수해가 나서 물이 안 나오는 와중에 군부대에서 설치해준 물탱크 물을 쥐어짜내 차를 닦던 선생도 보았다.차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런 젠장, 번쩍번쩍.
뭐 어찌됐건 번쩍거리는 것에 구태 흠집을 낼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딱히 선생이 미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중얼거리며 언덕배기를 투덕투덕 내려오는 내게 누군가 앞에서 휘파람을 불어댔다.대낮이었는데, 오성파였다.하나 둘 셋 넷.학교로 찾아오다니, 미쳤군.
건대나 홍대입구는 이제 위험하니 다른 곳으로 옮겨 보자는 게 떡대들이 대낮부터 뭉친 이유였다.종로는 어째 자꾸 ‘종로경찰서’ 생각이 나서 싫고, 압구정은 이상하게 주눅 드는 이름이고, 역시 강북에 배경을 둔 오성파는 강북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어찌어찌 다음 작업 장소는 경희대 앞으로 결정되었다.사전 답사를 가는데 나를 끼워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보통은 문자메시지로 [건대 전철역 아홉시 콜] 뭐 이런 게 도착하곤 했었다.
그런데 경희대 앞은 유흥가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좀 미안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종합병원이 하나 있고, 커다란 대학교가 있는 곳인데, 어째 그곳은 망해가는 공덕동 게딱지 동네를 닮아 있었다.골목은 좁았고, 여기저기에서 쓰레기가 썩어가고 있었다.그 냄새들은 덜 달궈진 햇빛을 타고, 꼭 사람들의 콧구멍 높이만큼만 들어 올려 졌다가 풀썩풀썩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떨어져 내렸다.
조땠다.공치겠다.씹할.와 봤다며 십새끼야.각각 한 마디씩을 내뱉는 뒤를 졸졸 따르며 나는 그 애를 떠올렸다.[YAJA 호프]와 [솔낭구]라고 쓰인 간판들 사이로 술 취한 듯 굽어진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어쩐지 그 좁은 골목을 멈춰 세운 양철 대문집이 하나 나오고, 파란 문을 열면 그 애가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사자얼굴이 양각된 파란 대문을 열자 튀어나온 건 식식거리는 떡대의 목소리였다.존만아 빨리 안 따라올래? 어느새 생각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온 떡대의 말이 저 앞에서 내 귓바퀴를 잡아끌었다.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골목길 한복판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할까, 언제나, 얘들은.
어느새 오성파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어느 기둥이고 어느 담벼락이고에 숨어서 이쪽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떡대들이 사라지고 나자 골목에는 나와 그이만 남게 되었다.그는 형편없이 쭈그러져 있었다.나는 옆에 붙어 앉아 시비를 걸든지, 지갑을 빼내든지 해야 했다.그런데 양복 상의에도 뒷주머니에도 지갑은 없었다.셔츠 주머니에 똑같은 명함만 몇 장 들어 있을 뿐이었다.우습게도 어금니 모양의 명함이었다.‘이편한나라 치과’ 의사가 왜 경희대학병원 앞에서 떡이 되도록 마시고 혼자 버려졌는지는 물론 알 수 없었다.흔들어도 깨지 않을 만큼 그는 정신을 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씩 기침을 해대는 치과의사 옆에서 엄마 생각을 했다.삭아 부스러진 어금니 하나를 새로 박는데 삼백만 원이라고 했다.아마도 엄마는 평생 어금니 하나가 없어진 채로 살아야 할 것이다.딱딱한 발뒤꿈치와 오래된 무좀도, 그래서 집안 가득한 식초냄새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엄마, 제발 그 쉰내 나는 대얏물 좀 버리라니까, 썅.나는 언제나 쌍놈의 새끼였다.쌍누무 새끼가 즈이 엄마한테 말하는 것 좀 보게.목소리만 컸던 아버지가 남긴 건 아로나민 골드 간장약통뿐이었다.
옆에 선 떡대는 결국 공쳤다며, 소리죽여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까시는 묵묵히 치과의사의 양복을 툭툭 건드렸다.까시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다행이 치과의사의 앞주머니에는 만 원짜리 몇 장이 쑤셔 박혀 있었다.
오성파는 속전속결, 어디론가 사라졌다.나는 한숨을 내쉬고 하얀 가운 같은 그의 와이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오른손에는 까시가 쥐어준 오천 원짜리가 땀에 눅진하게 젖어 구겨져 있었다.간간이 지나치던 사람들이 나와 치과의사를 흘끔거렸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는 않았다.
나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등에 매단 가방이 필통소리를 내며 좌로 우로 달랑거렸다.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골목으로 뛰어들었을 때 내가 달려든 속도만큼 불쑥 그 애가 나타났다.그 애는 머리에 파란 리본을 달고 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애가 웃었다.
“담배 하나만 줘, 갚을게.”
가방 밑바닥을 들춰 숨겨 놓았던 담배를 건네자 그 애는 서둘러 담배를 물었다.불을 댕기는 내 오른손을 하얀 손이 살짝 감싸 쥐었다 풀었다.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 애는 먼산바라기만 했다.그러다 문자메시지가 오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답장을 하고 한 모금 디스플러스를 빨고, 그러고 나면 어느새 다시 퍼렇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그 애의 얼굴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그 애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 때문인지, 며칠 전 맞아 터진 눈 때문인지, 혹은 그 애의 핸드폰 액정화면 때문인지 그 순간 많은 것들이 반짝거리고 번쩍거리고 희미하거나 붉으죽죽했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나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한참동안 그 애를 바라보았다.눈썹을 파도처럼 출렁이던 그 애가 한숨을 폭 쉬더니 말했다.
“십만 원이야.”
파란색으로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만큼 가벼운 그 목소리는, 금세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그 애는 허벅지를 살짝 드러내며 느릿느릿 일어서서는, 천천히 걸어가 버렸다.그 애가 길게 팔을 늘어뜨려 흔들던 자리를 휘저어 보았지만 손에 남은 건 꼭 십만원만큼의 무게감뿐이었다.
[파인힐]을 끼고 돌아 [아모르]로 향하는 그 애의 뒷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리 깊게 숨을 들이쉬어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을 붙잡고 집으로 달렸다.[파인힐] 앞에서 눈앞이 초록색으로 흐려졌다가 [리베라]를 지날 때는 푸른색으로 밝아졌다 했다.그리고 18, 못된 욕처럼 철거 순번이 스프레이로 붉게 뿌려진 우리 집 대문 앞에 서자 눈앞에 있던 문고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눈을 치켜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암순응이다, 아닌가 또 명순응인가.도대체가 이놈의 세상은 문을 여는데도 뭐든 순응해야 한다는 말인가.한참을 기다려서야 아귀가 안 맞는 대문이 비명을 지르며 한 뼘쯤 열려 주었다.문이 열리자 내 눈도 딱 그만큼 밝아져 왔다.집에는 아무도 없었다.키우던 개는 복날 언저리에 팔아버리고, 빈집을 꿋꿋이 지키는 건 짝이 안 맞는 슬리퍼뿐이었다.
주머니에 있는 오천 원짜리를 세어보니 열일곱 장이었다.[아모르]든 [파인힐]이든 어디나 [대실료 이만 원]하고 허연 현수막으로 휘날리고 있었으니 그 애에게 줄 돈까지 셈해보면 꼭 삼만오천 원이 부족했다.집에는 그간 모아둔 오천 원짜리가 꽤 있었다.삼만 원이 아니면 사만 원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을지도 몰랐다.돈이 부족하게 되면 떡대들에게 빌려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세상에는 꼭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아로나민 골드’ 깡통에는 오천 원짜리가 아홉 장이나 들어있었다.다행히 엄마가 이 돈까지 손을 대진 않았다.
주머니에 돈을 쑤셔 넣고 다시 골목으로 달음질쳐 돌아왔지만 그 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고개를 들어 [아모르]와 [파인힐], [리베라]의 불 켜진 방들을 올려 보았지만 그애는 영영 다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병신같이 나는 그 애의 핸드폰 번호도 물어보지 않았었다.
“성의부족 이야 인마.
칠만오천 원이 없어서 못 낸다는 게 말이 되냐? 삼십팔만 원이나 학비보조 받잖아.나머지는 제때제때 내 줘야지.”
주머니에서 오천 원짜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엄마를 떠올렸지만 이 돈으로 수업료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학교에서 가르친 것으로 번 게 아니므로, 학교에다 줄 수는 없었다.
“인마, 결국 한꺼번에 내면, 응, 목돈 된단 말이다.어머니 바쁘시니까 니가 인마 이런 거 잘 챙겨서 말씀드려얄 것 아냐.행정실로, 이번 주 안에 해결하시라고 해.CMS로는 이제 안 빠져나가, 날짜 지나서.그러니까 직접 오셔야 한다.아님 니가 들고 오든지.0교시 특기적성비는 내가 어떻게 처리했다.어차피 절반이 지각인데 돈 내기도 아까운 거고.”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에서 물러나오는 사이 나는 한 마리 쥐며느리나 돈벌레나 아님 바퀴벌레라도, 조그만 틈만 있으면 놓치지 않고 기어들어갈 수 있는 무언가로 변신했으면 싶었다.그런데 CMS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젠장.슈퍼맨이나 재벌 2세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그냥 쥐며느리면 되는 거였다.
“관우.”
일곱 쌍의 다리를 열심히 놀려 문 앞까지 잘 물러나온 나를 담임이 다시 불러 세웠다.
“아니다…….담배는 끊었냐?”
‘담배’라는 말이 들려오자 이곳저곳에서 못마땅한 표정을 한 얼굴들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치어다보았다.
교무실은 쥐며느리에게는 너무 밝았다.
정문을 나서며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어째 해가 학교 시계탑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열두 시인가, 열두 시 십 분인가 햇살에 가려서 시간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찌됐건 바닥엔 꼭 그 시간만큼의 짤막하고 몽땅한 길이로 내 그림자가 느정느정 앞서가고 있었다.
시장통을 지나 한방병원 골목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아이고, 이제는 정말 안녕하기도 뭐하고, 그냥 인사 없이 떠나기도 뭐한 기분이었다.등 뒤에는 학교가 여전히 나를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계실 텐데 말이다.하지만 어찌됐건 학교는 높아서 좋았다.멀리서도 보이니까.그건 참 좋은 거였다.하기사 집도 그랬다.우리 집과 학교는 골짜기를 하나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그리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무언가는 나처럼 흘러내려가기 마련이다.당연한 거 아닌가.결국, 어쨌거나 이렇게 걸어 나가는 건 좋은 일이다.나에게나 송구고등학교에게나, 내가 나가서 휴 다행이지, 학주의 그랜저에게나 그것도 아니라면 짤뚱한 내 그림자에게라도 말이다.
빈 가방에 궁둥이를 대고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아모르] 옆에 쪼그려 있었다.골목 안에 어둠이 알맞게 차오르자, 되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한눈으로 흘깃거리며 [아모르]의 검은 문으로 게걸음쳐 들어갔다.
핸드폰을 열 때마다 시간은 겨우 이 분씩, 삼 분씩만 흘러갔다.읽을거리는 만화책뿐이었다.폭주족이 선생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나는 ‘그레이트 티처 오니주카’가 나오는 만화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폭주족이긴 해도, 최소한 우리 담임보다는 훨씬 선생 같은 주인공의 얼굴을 연습장에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역시 그림에는 영 젬병이란 사실을 슬슬 깨달을 무렵,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 있었다.그리고 그 애가 골목으로 걸어 들어왔다.천천히 걸었지만 방향이 분명한 걸음으로 또박또박 초등학생 글씨처럼 걸어서는 내 앞에 섰다.그 애가 긴 머리를 목뒤로 넘기자 세상에서 제일 작고 앙증맞은 귀가 나타났다.
“가자.”
그 애가 웃으며 말했다.갑자기 졸음이 밀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