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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자기 나라 사람 자기 형제’는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를 알아라’
이 말은 ‘기노스코하라 파악하라’는 뜻인데 여기서 알고 있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 사람으로 행세하는
지식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한국 사람이면
어떤 행동을 해야 되는지 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사실을 알면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파악하고 생각하는 것이 뭔지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의
제사장이요 새 언약의 중보의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 때까지 계속 가르쳐야 됩니다.
부지런히 가르쳐야 됩니다. 그러나 문이 열리면 주님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계속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알고 난 뒤엔 그 때는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복잡해 보이는 히브리서라 할지라도 ‘간단하게
권면했다’고 말하는 겁니다(히13:22) 실제로 히브리서는 어려운 문체들이지만
내용을 파악하고 나면 진짜 간단합니다. 다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오리무중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주의 백성들을 어디로 몰아넣을까요? 그 양의 문 안으로 넣는 겁니다.
일단 문 안으로 들어오면 성령이 스승이 되셔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문은 깨달음입니다.
요일2장 22절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기노스코는 바로 자신의 체험에 의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전하기는 하지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라는 이 앎 곧 ‘기노스코’ 동침한다는
의미의 안다는 건 우리 각자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12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개인 개인의 죄를 일일이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일괄적으로 죄를 처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한 사람
한사람의 죄를 다루신다면 지금도 주님께서 하루에도 십자가에 수십, 수 백 차례
오르락내리락 하셔야 될 겁니다. 전해지는 복음의 문제로 영 단 번에 드려진 속죄의
제사의 효력 못 믿은 사람들이 지금도 예수님을 자신의 죄 값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아침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 오늘도
제 죄를 위해 수고를 많이 해 주십시오’ 이런 식입니다. 이걸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현저하게 욕보인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무 십자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언제든지 화목하고 맞바꿀 수 있다는 것,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누가 자기 아버지가 교수형으로 죽었는데 그 밧줄을 기념으로 목에 걸고 다닐까요?
철부지처럼 십자가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여기저기 장식을 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그 참혹한 저주를 나를 대신해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수고와 죄에 대한
저주의식이 끝나자마자 안식이 옵니다. 수고와 무거운 짐이 끝나면 안식이 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쉬시므로 우리도 자신의 일을 쉬고 안식합니다. 사랑을 하고는
싶은데 왜 사랑이 안 되는지 알고 있나요? 사랑이 없어서 안 될까요?
죄 사함을 받지 못해서 사랑이 안 되는 겁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안식이 오고,
의가 오고, 거룩이 오고, 영광이 오고, 사랑이 오는데 왜 내가 사랑을 하지 못할까요?
그 대답은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죄 사함을 받았는데
실제는 받지 못한 겁니다. 마18장에는 한 사람이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것이 이론입니까? 실제입니까? 이론밖에 아닙니다. 아마 실제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으면 나가자마자 백 데나리온쯤이야 당장 그만둬라 말하는 게 정상입니다.
자신이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나오는 길인데 일백 데나리온
빚 진자를 잡아 옥에 가두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이 일어납니다.
사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린 피로서 우리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은 하지만 밖으로 나가자마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받았는데 실제적으로는 확실한 계산이 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게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실제적인 죄 사함이 오는 겁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인데
사실은 죄와 상관이 없는 자라야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사랑이 없고 좀 무정하니 이해해줘’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 사람은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를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말미암아 베스트 컨디션이
될 때는 사랑이 됩니다. 이 베스트 컨디션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해서 욕심을 부린다든가 속이 상한다든가 화가 나 있다든가
남을 미워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당연히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지만 우리는 육체가 있으므로 어둠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이 안 됩니다. 사랑은 반드시 죄 사함 뒤에 따라 옵니다.
내게 죄의 수고와 무거운 짐이 완전히 없어져야만 남의 짐을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할 때는 어떤 사람도 사랑이 되는데 성령이
소멸되면 사랑을 못합니다. 사람이 육체로 거할 때는 절대로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교회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납니다. 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자유로 사랑의 종노릇, 성령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육체 자랑으로 죄의 종들로 되돌아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린도 교회와 같은 교회이고
그 다음에는 갈라디아와 같은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나타나는 은사나 기적이나 표적을 쫓아다닙니다. 반면에
갈라디아교회는 성령으로 시작해서 율법과 할례로 인해 육체의 자랑으로 진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도 사랑이 없고 갈라디아교회도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 충만한 에베소 교회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끝난 다음에
고린도전후서가 있고 갈라디아서가 있고 에베소서가 있는 것은 로마서와 같은
심오한 진리가 있어도 현실 교회에서는 고린도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고,
갈라디아와 같은 교회도 있음을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두 번째 언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일이 언제 일어나느냐면
바로 오늘날입니다. 현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성경의 모든 명령 동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을 했다고 하시면 그 속에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가라’ 하셨는데 희한하게도 아브라함이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그것은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 가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을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위력이라는 겁니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영과 혼은 인격의 질서를 잡고, 관절과 골수는 이를 연결시켜 하나님의 명령이
몸에 통하도록 만드십니다. 이건 기록된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감
곧 성령의 감동은 항상 있지만 구분하자면 말씀을 기록할 때 기록 영감이 있고
그 말씀을 읽을 때 깨닫는 영감이 있고 그 말씀을 행할 때 행하는 영감이 있는 겁니다.
오직 성령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깨닫기도 하고 행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참된 의미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요14장) 고아는 스스로 다 챙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 하시고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계명 또는 새 언약입니다.
13절을 다시 봅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가 한꺼번에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안 된 것을 된 것처럼 입을 높이면 안 됩니다.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낡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항상 겸손해야죠. 피조물의 영광은 겸손입니다. 능하신 주님 앞에 겸손하라
때가 되면 높이시리라(벧전5:6) 어거스틴이 피조물의 영광은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최대 겸손은 ‘나로 말미암아 하도록 하시는 주로 말미암아 나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곧 ‘나는 아니고 주님이시다’는 겁니다. 그러나 첫 것이
한꺼번에 낡아지는 게 아닙니다. ‘첫 것을 폐했다’가 아닙니다. 낡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빨리 옮겨 타야 됩니다. 따라서 율법에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제사장을 삼아 새 언약 안에서 옛날에는 대용품으로 예물과 제사를 드렸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드리는 산제사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복을 주심을 늘 감사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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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