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혜원정사 주지 효명 스님
“‘범망경’ 독송하며 양심의 가책 느끼는 분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 아들, 친구 권유로 불교와 인연
이른 아침 쌍계사에 흠뻑!, 천왕봉 넘고 불교란? 사유
첫 법문에 말 막혀 식은땀, “포교 준비 안 됐다” 판단
은사의 주지 소임 권유에, “공부해야 한다.”며 떠나
“우리 시대 최고 율사, 어른 모시는 건 공덕”
매월 보름 ‘포살 법회’ 복지‧인재 불사에 매진
상담해준 청년 불자, 첫 월급 보시에 감동
“주지 소임‧포교 일선서, 많이 배웠고 참 행복해”
부산 혜원정사 주지 효명 스님은
“율장을 읽는다는 건 기억하기 위함이고,
기억하는 이유는 지키기 위함”이라며
“자신을 단속하며 부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서원”이라고 강조했다.
부산 혜원정사(慧苑精舍). 고산혜원(杲山慧元‧1933∼2021.
조계종 제29대 총무원장‧쌍계사 방장) 스님이
부산의 포교 지평을 넓히고자 1978년 세웠다.
개산(開山) 당시 절 뒷산을 ‘묘봉산(妙峯山)’이라 했는데
세월이 쌓여가며 산 이름으로 굳어졌다.
절의 굳건한 입지를 증명함이다.
불자들에게는 수행도량이자 지역주민들에게는 쉼터로 다가서는
혜원정사의 주지는 고산 스님의 제자 원허효명(元虛曉明) 스님이다.
정식 주지로 1999년 취임했으니 도심 포교에 매진한 지 24년.
고산 스님의 유지를 이으면서도 복지‧인재불사 등
자신의 원력을 유감없이 표출하고 있다.
은사의 가르침을 올곧이 새겼기에 가능했을 터다.
늘 그러했다. 은사는 곁에 두려 했고, 제자는 떠나려 했다.
은사 고산 스님과 제자 효명 스님.
쌍계사에서 정진하던 중 은사스님 앞으로
‘해인사 강원으로 갑니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떠난 적이 있다.
해인사 강원(현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공부한 제자는
해제 직후 스승을 친견했다.
제자의 절을 받은 스승은 법문 원고 준비에 정성을 다할 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바닷 속, 강보다 깊은 침묵이
흐른 후에야 일언이 떨어졌다.
“강원비는 냈느냐?” “못 냈습니다!” “얼마냐?” “20만 원입니다.”
지금과 달리 1980년대엔 강원에 입방하려면
소정의 보시금을 내야 했다. 강원비를 냈기에 별문제 없이
한 철 공부를 마쳤을 터다. 더욱이 강원비가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님을
모를 리 없건만 스승은 20만 원을 봉투에 넣어 건넸다.
사제의 정은 그렇게 흐른다.
“대강백이신 덕민 스님을 쌍계사에 모셨는데
굳이 해인사로 갔단 말이냐!”
아쉬움 짙게 밴 ‘혼쭐’임을 제자는 알고 있었다.
쌍계사를 떠난 사연이 있다.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자연스레 성당을 다녔는데 세례명을 받으려 할 때마다
‘뭔 일’이 생겨 받지를 못했다.
그러던 차에 친구 따라 절에 들어서곤 했다.
불보살님 앞에서 절을 하지는 않았으나 산사의 고즈넉함이 좋았더랬다.
고등학교 2학년 10월의 가을. 무작정 길을 나서고는
순천행 비둘기호에 몸을 실었다. 입시의 치열함을 잠시나마
식혀보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다.
밤 9시께 이르러 ‘더는 가지 말자’ 하고 내린 곳이 하동역이었다.
여인숙에서 하룻밤 묵고 주인장에게 명소로 추천받은 쌍계사를 찾았다.
이른 아침의 도량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몇몇 사람들이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득 ‘친구가 절에 다니며 인사한 사람들이
저 일을 하시는 분들이겠구나.’ 싶었다.
지리산 천왕봉으로 발길을 틀었다. 세석산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 왔다’라고 생각한 순간 다리가 풀렸고,
잠깐 쉬었다 가려 앉으니 눈이 감겨왔다. 찰나의 순간이었을 터다.
‘잠들어 선 안 돼!’ 하며 깨었다.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남루한 텐트를 부여잡았다.
변변한 침낭 하나 없었기에 버너를 켜 몸을 녹이며 하룻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천왕봉을 넘어 ‘하늘 아래 첫 절’인 법계사에 닿자마자
처음 본 사람에게 “쌀 한 줌만 주시라” 사정했다.
계곡에서 밥을 지어 먹고 중산리로 내려와서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불교란 무엇인가?”
친구의 인도로 불연을 맺은 효명 스님은 곧바로 출가하려 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에도 2년이 걸렸다.
어머니가 쌍계사를 찾아왔다. 대웅전 앞에서 삭발염의한 아들을 본
어머니는 속명 한 번 부르고는 뒤로 쓰러져갔는데
마침 지나가던 도반이 부축해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아들의 흔들림 없는 마음을 확인한 어머니는 끝내 돌아서야만 했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여 해인사로 들어섰다.
은사스님으로부터 ‘강원비’를 받아 가야산으로 돌아간 제자는
4년 과정을 마쳤다.(1993) 강원 졸업 후
혜원정사로 돌아와 절 일을 도왔다.
이를 지켜보던 은사는 제자에게 주지를 맡으라고 했다.
새벽 도량석에 여념 없는 은사스님의 뒷모습을 보며
마당에서 절을 세 번 올리고는 혜원정사를 떠났다.
편지 한 장도 남겼다.
‘저는 지금 공부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포교 원력도 세우지 않은 제가 주지를 맡을 수는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부산 혜원정사 전경. [혜원정사 제공]
혜원정사를 떠난 제자는 해인사 율원을 졸업(1995)한 후
법주사에 이어 해인사 선원에 방부를 들이고는 좌복 위에 앉았다.
은사는 당시 해인사 주지 보광성주(普光性柱 ·희랑대 조실)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제자를 찾았다.
그러나 제자는 ‘결제철’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화를 받지도,
하지도 않았다. 해제 직후 혜원정사로 돌아와 은사스님과 마주했다.
“주지를 맡는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내가 오래 살긴 살았나 보다. 뭐냐?”
“1년에 한 철은 선방으로 가는 걸 허락해 주세요.”
“알았다. 또 뭐냐?” “없습니다.”
앞선 주지가 남긴 임기를(1997∼1999) 이어받은 효명 스님은
1999년 10월 정식 주지로 취임했다.
작심만 했다면 30대 중반에 혜원정사 주지를 맡을 수도 있었다.
편지만 남기고 떠난 이유가 ‘공부’ 하나뿐이었을까?
차 한잔 마시며 내보인 미소가 또 하나의 사연이 있음을 대변했다.
“강원 졸업하고 혜원정사 왔을 때 사중 일을 좀 도왔습니다.
석왕사에 머무르신 은사스님이 전화로 ‘동지(冬至) 법문을 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시간이 촉박했어요.
급하게 자료 찾아서 법문할 내용을 메모해 법상에 올랐습니다.
휘갈겨 쓴 글씨는 저도 잘 못 읽어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는데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주지 소임을 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해인사 선방에서 혜원정사로 돌아와 소임을 보기로
결심한 건 ‘이젠 준비 됐다’는 판단했기 때문일까?
“제가 은사스님의 전화를 받지 않으니
보광 스님께서 저를 찾아와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의 은사스님에게 볶여서 못 살겠다.
내가 해인사를 떠나거나, 네가 떠나거나 하자.’
주지를 맡으라는 전화임을 알기에 받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
한마디 이르셨습니다. ‘너의 은사스님은 우리 시대 최고 율사이시다.
스승 곁에서 직접 보고 배우면 좋지 않겠나?
어른을 모시는 공덕은 실로 크다.’
그때, 한 철 결제만 얻을 수 있다면
은사스님의 뜻을 따르자고 생각했습니다.”
사제 사이의 약속은 지켜졌다. 매년 희양산 봉암사, 오대산
상원사‧신성암 등에 방부를 들였다.
고산 스님을 모시며 받은 가르침도 많았을 터다.
“해인사 강원 대교반으로 올라가며
입승(入繩‧대중의 기강을 잡는 소임)을 맡았다고 하니
은사스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입승은 누군가를 체벌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솔선수범해 대중이 따라오게 해야 한다. 그래야 화합을 이끈다.’
‘한겨울 고무신’ 일화를 전해 들었기에
무슨 말씀인지 금방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고산 스님이 대중의 허물을 규찰하는 찰중(察衆) 소임을 볼 때의 일이다.
한겨울의 추위가 매섭다 보니 정진하는 대중은 고무신을 잘 닦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고산 스님은 한밤중에 모든 고무신을 닦아 놓았다.
다음 날 깨끗한 고무신을 본 대중은 놀랐고,
수소문 결과 고산 스님의 ‘정성’이 깃든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 이후 모든 대중이 고무신을 자주 닦았다고 한다.
효명 스님은 계율의 근본으로 일컫는
‘범망경(梵網經)’의 핵심을 집약한 ‘범망경 요약집’(혜원정사)을
혜원정사 신도들에게 배포한 후 매월 보름 ‘범망경 포살법회’를 열어왔다.
“율장을 읽는다는 건 기억하기 위함이고,
기억하는 이유는 지키기 위함입니다.
자신을 단속하며 부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서원이기도 합니다.
신도님들에게 늘 강조합니다.
‘범망경을 독송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수행을 잘하는 분이십니다.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모르면 참회할 수도, 고칠 수도 없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잘못을 하고 참회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사회복지법인 혜원’의 대표이사인 효명 스님은
이 분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다.
“혜원정사는 1993년부터 경로잔치를 열어왔습니다.
연산동의 지체부자유 아이들을 초청해 피자파티 시간을 가졌을 때입니다.
‘나는 스님이요 수행자’라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들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 앞에 당당히 섰습니다.
저를 본 아이들이 반갑다며 막 다가오는데,
저는 뒷걸음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지’하고는
다시 다가가 그들을 안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몰랐을까요?
제가 진심으로 안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요?
‘동짓날 법문’과 함께 주지를 맡아 포교할 준비가 안 돼 있음을
깨닫게 해 준 또 하나의 사건입니다.”
모든 불사가 자비심 없이는 불가능하나 복지는 더더욱 그러하다.
기념관은 고산 스님의 향훈을 오롯이 담고 있다.
“주지 소임 맡고 ‘바른 소리’를 잘했습니다.
원칙에 어긋나면 호통도 쳤습니다. 송곳 같았지요.
송곳은 아무리 숨겨도 사람을 찌릅니다.
찔린 상대는 아파하고, 때로는 심한 내상을 입습니다.
젊었을 때는 ‘강단 있다’고 평해주지만
나이 들었을 때는 ‘허물’이 됩니다.
리 스님들 사이에서는
‘주지하려면 십지보살(十地菩薩)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주지 소임 보고 포교 일선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효명 스님은 “참, 행복하다”고 한다.
최근 법문에서도 청년 불자가 찾아와 첫 월급 일체를
효명 스님 앞에 내놓은 사연을 전하며 “행복하다”라고 했다.
“법회 오면 안아주고, 고등학교 때 상담 몇 번 해 준 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첫 월급을 갖고 저를 찾아온 겁니다.
청년의 성의를 받고 ‘이젠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했습니다.
일부는 동행하신 어머니에게 ‘옷을 사 입으시라’며 용돈으로 드리고,
나머지는 도로 주며 ‘내 누비옷 한 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공덕을 지을 기회를 주었음이다.
그 청년은 ‘동방 누비’를 올렸다.
불자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청했다.
“저는 우리 신도님들에게 용심(用心)을 잘 쓰시라 강조하곤 합니다.
마음을 잘 쓰는 것 자체가 신구의 삼업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021년 12월 개원한 ‘고산당 혜원 대선사 전시관’.
효명 스님은 2021년 3월 원적에 든 고산 스님의 유품과 사진을 통해
생전의 가르침을 새기는 ‘고산당 혜원 대선사 전시관’을
혜원정사에 마련하고 그해 12월 개관했다.
둘러보니 전시실과 수장고는 완벽했다. 한 생각이 스쳤다.
전시실에 돌았던 고산 스님의 향훈,
그 향훈 오래전부터 올곧이 안고 새겼기에
효명 스님의 자비는 더 따스하게 깊어졌을 것이다.
효명 스님을 만난 혜원정사 불자들도 ‘참 행복할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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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 스님은
해인사 승가대학‧율원을 졸업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32‧33회 단일계단 존증아사리,
부산지방경찰청 경승으로 위촉됐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혜원’ 대표이사이며
사)대한불교청소년연합회 부산지회장,
사)부산광역시 청소년단체협의회 이사,
고산장학회 대표이사, 대한불교조계종 부산연합회장,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이다.
쌍계사 주지에 이어 부산 혜원정사 주지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세상을 물들이는 멋진 아침’이 있다.
2023년 9월 6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