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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에 나타난 들어감
▪히브리서 10:19-22▪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설교작성 노트
욥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욥 23:3) 그 앞에서 호소하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고 탄식한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보좌 앞에 들어갈 수가 있으며 어찌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을까? 이는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의 후예들의 최대의 숙원이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가치에 대하여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히브리서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히브리서를 모르고는 모세 5경을 설교할 수가 없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들어감”을 관찰해 보자. 이 주제는 성경 전체의 열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 7: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구해도 얻지 못하고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구약시대입니다.
우리가 다 얻었다 해도 다 찾았다 해도 다 열렸다 해도 하나님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내가 얻었노라 내가 찾았노라 내 앞에 문이 열렸노라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온 천하를 얻었다 해도 내 생명을 잃고 나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구하면서도 하나님은 구하지 않고 다른 것은 얻고자 하면서도 구원을 얻고자 아니하며 다른 문은 두드리면서도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내가 구하기만 하면 당연히 주셔야만 하고 내가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당연히 열릴 것이라고 내게 그런 자격과 공로와 권리라도 있는 냥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자신의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에서 오는 자만입니다. 당신이 버킹검 궁을 찾는다고 여왕을 만날 수가 있으며 문을 두드린다고 열려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성경은 누구에게 구하고 누구를 찾고 누가 계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나 같은 죄인이 구하면 하나님께서 어째서 주시는 것이며 내가 두드리면 하나님이 계신 보좌의 문이 열려지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두드려도, 그토록 오랫동안 두드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이 두드렸어도 열릴 줄을 모르고 굳게 닫혀져 있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히브리서 9:8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성령이” 이렇게 시작하심으로 그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이로써 보이신 것은” 합니다. “이로써”란 9:1-7에서 설명한 성막의 식양(式樣)을 말합니다. 성막은 모세가 임의로 지은 것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보이신 식양을 좇아 지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성막을 가리켜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히 8:5)라고 말씀합니다. 모형과 그림자라고 하신 것은 “이로써 보이시기” 위한 메시지가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8)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막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휘장으로 굳게 닫혀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에도 산에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경이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리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인류의 최대의 숙제였던 것입니다. 욥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하고 탄식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2)하고 갈망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년 일차씩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는 참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가지고 들어간 피도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구약시대 내내 그토록 많은 생축이 피를 흘렸고 그토록 많은 제사가 드려졌지만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잠시 언급해야 할 점은 “성소”라는 단어 문제입니다. 이는 9: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소“와 혼돈해서는 아니 됩니다. 2절의 성소는 땅에 있는 모형으로 주어진 성소이고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하신 8절의 성소는 하늘에 있는 참 성소(9:24)를 가리킵니다.
9:12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들어가신 성소는 모형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땅에 있는 참 것의 그림자인 성소(또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참 성소인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며 그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란 하늘에 있는 참 성소인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시대였습니다. 이것을 모형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 성소의 식양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것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전부라면 마치 문제만 있고 답은 없는 셈입니다. 히브리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신약시대
성경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아직은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 길이 열리도록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암시하고 있으며 미구에 열려지게 될 것을 예시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0:19)하고 드디어 그 길이 열려졌음을 말씀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굳게 닫혀져 있던 휘장이 언제 열려졌습니까?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0-51)
아시겠습니까? 성소와 휘장은 이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어졌으며 이를 계시하시기까지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 내내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그 휘장이 단번에 열려질 수가 있었던 것은 이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기(9:12) 때문입니다.
찢어진 휘장은 다시 꿰매어졌을 것입니다 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은 다시 닫혀지지 아니하고 활짝 열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들어가신 예수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열려지자 맨 먼저 들어간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땅에 있는 지성소가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참 성소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6:19-20)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1차로 “앞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세 번의 “나타나심”이 있는데 첫 번 나타나심은“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6)한 나타나심입니다. 이는 영광을 떠나 이 땅에 내려오신 자기 비하 즉 초림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나타나심은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9:24)한 나타나심입니다. 이는 하나님 우편 재위 즉 승귀를 의미합니다.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맨 먼저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세 번째 나타나심은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28)한 재림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대제사장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에는 일년 일차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피 없이는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을 따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면 우리의 신분이 제사장입니까 대제사장인 셈입니까?
그래서 4:14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중에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왕 중 왕”이란 표현과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휘장 안에 들어 갈 수 있게 된 것은 앞서 들어가신 큰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자취를 따라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고 말씀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그것도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엡 3:12에서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담대함”에 “당당함”을 더하고 있음을 봅니다.
감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진 것입니까? 본문 10:19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뿐입니다.
“오직 예수의 피를 힘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부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9:22)고 말씀합니다. 첫째가 죄사함입니다. 또 있습니다. 로마서 5:9에서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라는 말씀 속에는 이 두 가지 즉 죄 사함과 의롭다하심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담당하시고 주님의 의를 나에게 덧입혀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함과 당당히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한 곳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이를 위하여 주님은 오셨고 이를 다 이루셨을 때에 휘장은 열렸습니다.
이것은 자기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10:22) 일입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
히브리서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 열렸으니 그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고 문제와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한 말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8:1)고 말씀합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런 중에서도 “이러한 대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그래서 이러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모시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 중의 중요한 것이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할 만큼 알 수만 있다면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7:2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의 사역은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항상”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형제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될 때에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따라 지성소에 들어가면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말씀을 받는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낮은 몸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되어 친히 그리고 영원한 “들어감”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필리핀 사역 잘 감당하고 귀국했습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