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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興亡盛衰)(4) - 북로남왜(北虜南倭)
임광자 추천 0 조회 25 08.05.24 23: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興亡盛衰)(4) - 북로남왜(北虜南倭)

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興亡盛衰)(4)- 북로남왜(北虜南倭)

라. 북로남왜(北虜南倭)                           이길상

(1) 고난(苦難)의 상징 만리장성(萬里長城)

베이징 동북쪽의 만리장성농경(農耕)과 목축(牧畜),수렵(狩獵)과 어로(漁撈)는 초보적인 인간집단의 생활수단이다. 이런 것이 지형과기후 등 자연환경에 따라 생활유형을 만들고 세월이 흐르면 각기 다른 특성으로 형질(形質)이분화된다.

정착 농경사회가 길을 차단하고 성곽이라는 방패를만들면, 유목이동사회는 창을 잡고 길을 만들어 뚫고 가야 한다.

이렇게 각기 다른 생활 유형을 가지고 생존을 위한끝없는 투쟁을 전개한 유목민과 농경민의 대표적 공방(攻防)의 유물이 중국 장성(長城),즉 만리장성이다.

영종 정통제의 뒤를 이어 그의 장자 헌종(憲宗) 성화제(成化帝/ 1464 ~ 87)가 명나라 8대 황제가 되었다. 토목의 변과 탈문의 변으로 어수선했던명나라 조정은 그런 대로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왕조 창업이 한 세기를 넘기면서 대내적으로는청류과 탁류, 그리고 향당이라는 파벌(派閥)이 만들어지고, 이런 파벌은 정치 양상은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청류(淸流)란 주로 진사(進士) 출신의 관료군(官僚群)을말하고, 탁류(濁流)란 환관중심의 권력실세들을 그렇게 불렀다. 여기에 이권을 얻고또한 이를 지키기 위해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모여 만든 패거리를 향당(鄕黨)이라한다. 그리고 전봉관(傳奉官) 이라 해서 이부(吏部)나 내각을 거치지 않고 황제가직접 임명하는 관료들도 수없이 배출되었다.

토목의 변으로 혼이 난 명나라에서는 북변의 오랑캐들,곧 북로(北虜)들을 막지 못한다면 청류건 탁류건 향당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고, 이런 위기를 수습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하게 된 것이 청류라고 부르는 선비출신의 관료들이었다. 따라서 국방에 관한 정책도공격보다는 수비위주로 가닥이 잡혔다.

이래서 그 고난의 장성을 다시 쌓기 시작했고, 이를우리들은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만리(萬里)라는 것은 약 4천 킬로미터정도의 길이 단위라기보다는 크다, 혹은 길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만리장성이라고 하면 진의 시황제를 연상한다. 그러나기원전 3 ~ 4세기경 당시의 기마 유목민족인 흉노(匈奴)를 막기 위해 이들이 말을타고 넘어올 수 없도록 방벽을 세운 것은 이미 전국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이것을 진의시황제가 증축 보완하여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성이 황하유역의 한족(漢族) 왕조들을북방 유목민들로부터 완전하게 지켜 주지는 못했다. 장성을 넘어 침입과 약탈은 계속되었고,그러다가 아예 중국으로 들어와 그들의 왕조를 세우고 중국을 지배하기도 하고, 많은세폐(歲幣)를 받아가기도 했다. 이런 시기를 당하면 장성은 단지 이들간의 경계선에불과할 뿐,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중화의 자존심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당(唐)·송(宋)시대로의복고적(復古的), 국수적(國粹的)인 한화(漢化) 정책을 추진한 명나라로서는 다시이들과 길고도 지루한 싸움을 해야만 되었고 이래서 지금 보면 관광자원화는 되고있으나 방어 수단으로서는 역시 무용지물에 불과한 장성의 손질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축성(築城)은 헌종 성화제의 치세기간인 15세기 후반에서시작하여 16세기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 / 1521 ~ 66)에 이르기까지 약 1세기에걸쳐 용도와 필요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이뤄졌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시급한 것이오이라트족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오이라트부족의 근거지인 서북쪽을 막기위해서 서쪽의 감숙성(甘肅省 / 간쑤성)에서부터 동쪽의 산서성(山西省 / 산시성)경계에 이르는 지대에 4만 명의 노동력을 동원해서 불과 3개월만에 그 길이가 자그마치약 1200킬로미터나 되는 방대한 성벽을 쌓았다.

이렇게 짧은 기간 축성이 가능했던 것은 성벽의 재료를햇볕에 말린 흙 벽돌(土壁)로 썼기 때문인데, 이곳은 기후가 건조하고 강수량이 적기때문에 토벽으로서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수량이 비교적 많고 한서(寒暑)의차가 심한 동쪽으로 올수록 토벽만으로는 지탱할 수가 없다.

세월이 지나면서 오이라트 부족의 침입은 뜸해지고,몽골 동쪽의 타타르가 오로도스 지방을 통해서 빈번하게 침입해 오자, 이곳을 지키던당시 영하진(寧夏鎭 / 닝샤진)의 사령관은 북쪽의 황하기슭까지 약 270킬로미터를햇볕에 말린 흙 벽돌과 불에 구운 벽돌(塼)을 섞어서 방벽을 쌓아 서쪽의 토벽 장성과연결시켜 오로도스 안쪽의 장성을 완성 시켰다.

그후 몽골족들이 다시 인산(陰山) 산맥을 가로질러침입해 오기 시작하자 산해관(山海關 / 산하이관)에서 거용관(居庸關 / 쥐융관)에이르는 약 7백 킬로미터의 험준한 산 능선(稜線)을 따라 화강석과 불에 구운 벽돌로견고한 장성을 쌓았고, 한편으로는 선화(宣化 / 쉬안화)와 대동(大同 / 따둥)을 포함하여산서성 북쪽 장성도 수축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으로 남아 있는이른바 만리장성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장대한 규모에 탄성을 연발하는 세계적인관광명소가 되었지만, 이를 수축(修築)할 당시의 명나라로서는 막대한 재정지출과많은 인명을 희생으로 바치고 이룩한 고뇌(苦惱)의 상징 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애써 만든 장성만으로 명나라의 북변은안전할 수 있었는가?

(2) 몽골족의 침입

쥐융관과 그 일대의 만리장성북변(北邊)의 유목사회에서는오이라트부족의 에센이 죽은 후 선두 자리를 두고 그들간에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바투 뭉케란 자가 나타나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1487년스스로 다얀칸(Dayan Khan / 達延汗 / 달연한 / 1464~1524)이라 불렀다. 그는 타타르부족출신으로서 황금씨족이라고 불렸던 칭기즈칸의 자손(子孫)이다.

다얀칸이란 원(元)나라 황제를 일컫는 몽골식 발음이다.그는 몽골제국을 성립시킨 칭기즈칸과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을 마음속 깊이존경하고 있었고, 이들을 계승하겠다는 평소의 그의 의지가 다얀칸이라고 스스로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라고 한다.

그의 조부(祖父)는 1441년 오리라트부족의 에센에게정복당할 때 피살된 토크타부하(脫脫不花)칸의 조카였다., 일족이 몰살당하는 위기에서그의 조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모(祖母)가 에센의 딸이었기 때문이라고한다. 따라서 그의 손자가 되는 다얀칸으로서는 조모로부터 받은 오이라트부족의혈통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여러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는 결국몽골 부족의 추대로 그가 바라던 대망이 칸이 되었다. 칸 위位)에 오른 이듬해인1489년 몽골을 대표한 칸의 지위로 명나라에 2천명의 조공사절을 파견하였다. 조공이라는이름을 빌린 명나라와의 마시(馬市) 무역이 다시 이뤄졌던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영토 내의 주민 6만 호(戶)를 좌우(左右)3만 호(戶)씩 크게 둘로 나누고, 다시 좌우 3만 호를 각각 3부로 세분하였다. 이렇게해서 1만 호 단위로 모두 6부를 만들고, 그의 아들 손자들에게 하나 씩 나누어(分封)주고 통치케 했다. 6부는 각각 독립된 봉건영지로서 그 지배자는 독립적인 권력을가지게 되었고, 몽골이 다시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지는 원천이 되어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이어지고 있다.

다얀칸이 있을 동안, 명나라와 이들 몽골부족들 간에는별다른 충돌 없이 화평이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524년 그가 죽고 나서 사정은 달라지기시작하였다.

다얀칸의 손자로서 6부중의 하나인 투메드를 영지로받아 만호가 된 알탄(몽고말의 금을 뜻한다고 함) 형제가 있었다. 이들 형제는 자주명나라와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정경일치(政經一致) 정책을 추진했던 명나라에서는개별단위의 부족들에게는 마시 무역을 허용치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이를 번번이거절했다.

다시 말하면, 전 몽골부족을 대표한 칸에 대해서만조공무역을 허락하고, 투메드 만호를 비롯한 만호들과의 개별 무역은 할 수 없다는것이다. 이렇게 되자 생필품이 절대 부족했던 알탄 형제는 1532년이래 매년 빠짐없이명나라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게 되었고, 중국측으로서는 유일한 방어 수단인장성의 규모를 늘리고 많은 군사를 배치하는 등 다시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541년(가정 21년) 이들은 다시 사절을 명나라에보내어 통상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이들이 보낸 사절을 참혹하게 죽이고그 목을 베어 국경지대에 들고 다녔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알탄 형제는 군사를이끌고 그해 7월 말, 산서성(山西 / 산시)으로 들어와 대동(大同 / 따둥)과 태원(太原/ 타이위안)을 휩쓸면서 살육과 약탈을 마음대로 저지르고, 그 해 9월 철수했는데,

전후 34일간 이들에게 짓밟힌 명나라는 열 곳의 진지(陣地)와서른 여덟 곳의 주(州)와 현(縣)이 이들에게 함락되었고, 20 여만 명의 남녀가 죽거나포로가 되었으며, 빼앗긴 가축이 2백만 마리, 불탄 집이 8만 호에 달했다고 한다.물론 이런 숫자에는 부풀리기는 좋아하는 이들의 속성상 얼마간의 허수도 있겠지만그 피해가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가 1542년 형 알탄이 포로로 잡아온 기녀(妓女)에게빠져 정신없이 보내다가 끝내는 건강까지 해치고 급사(急死)하고 말았다. 이래서혈기 왕성한 36세의 동생 알탄이 단독으로 투메드 만호가 되었다.

1547년 사실상 전 몽골을 통일한 알탄은 1550년 8월,그의 기병대를 이끌고 베이징 북방의 장가구(張家口 / 장자커우)를 유린하고 장성을넘어, 9월에는 베이징을 포위하고 공포에 떨고 있는 명나라 황제에게 "해 마다세폐를 보내고 무역의 길을 열어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매년 한번씩 도성을 포위하고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하겠다......"라는 협박적인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 군대는 이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반격할 기력도없었다. 알탄은 3일 동안 베이징을 점령하고 마음껏 약탈과 살인, 방화를 저지르고유유히 철수하였는데, 이를 "경술(庚戌)의 변(變)"이라고 하고, 이들 몽골인들은북로(北虜)의 무리들이라고 불렀다.

1551년 알탄은 칸이 되어 알탄칸(Altan Khan / 阿勒坦汗/아륵탄한/ 1507~1582)이라고 불렀는데, 이번에는 서북방으로 방향을 돌려 오이라트를 완전히정복하고 그의 숙원이던 외몽고의 카라코룸을 차지했다. 그의 침입으로 홍역을 치른명나라에서는 서둘러 국경지대에 마시(馬市)를 열 것을 골자로 화평을 제안했으나,양측의 의견이 맞지 않아 결렬되고 말았다.

그후 그의 세력은 청해(靑海 / 칭하이)라고 부르는중국 최대의 함수호(鹹水湖) 쿠쿠눠얼[庫庫諾爾 : 몽골어로 푸른 바다)지방을 원정하여티베트인들의 비옥한 초원지대를 차지하고 몽골인들을 이주시켰으며, 오이라트부족을서쪽으로 계속 몰아내고 현재의 우스베키스탄 북동부에 해당하는 서투르키스탄의시르다리야(Syrdarya)까지 진출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이곳은 1930년대에 스탈린의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한 한국인들이 지금도 많이 살고 있는곳이다.

이렇게 알탄칸이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린 것은 명나라로서는참으로 큰 다행이었다. 여기에 또 한가지 더 횡재가 겹쳤다. 1570년 10월, 알탄칸의손자 바간나기라는 자가 그의 약혼녀를 할아버지인 알탄칸이 대려 간 것에 원한을품고 국경을 넘어 명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 사건은 알탄으로 하여금 명나라와의 화의를 서두르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명나라는 바간나기를 알탄에게 돌려주고 마시(馬市)를 열어주며,알탄은 명나라에 반역해서 그에게 투항해 온 사람들을 돌려보낸다는 조건으로 합의가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이들 양자사이에는 마시(馬市)라는 국경무역이순조롭게 다시 열렸으며 알탄은 1571년(明 穆宗 隆慶 5년) 명나라로부터 순의왕(順義王)이라는책봉도 받았다.이래서 그는 원나라 멸망 후 몽골 최대의 영웅이 되었으며 라마교를숭상하여 몽골의 라마교 전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받고 조공무역을 했다고 해서알탄이 명나라의 신하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장성을 쌓고, 이를 지키기위해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고서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면 중화(中華)의 자존심은고사하고 그 수모(受侮)와 백성들의 노고를 어떤 형태로든 보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중국적인 전제정치하에서 그런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런 가운데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사실 두가지가 나타났다. 그 첫째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얻는 이익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의견들이 명나라의 일부 관료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나왔고, 둘째로는 국경근처에서중국인들과 몽골인들이 섞여 살면서 몽골인들도 점차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3) 남왜(南倭)

통영 벽발산에서 바라 본 한려수로남왜란 남쪽바다를 통해서 침입해온 왜구(倭寇). 즉 일본의 해적집단을 말한다. 이들이 기록상해상에 나타나 약탈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대로서 우리나라와 중국측에 보면 고려와원나라의 후기에 속하지만,

신라의 문무왕이 죽어서도 해룡(海龍)이 되어 왜구를격퇴하겠다는 유언 내용과 이에 수반된 대왕암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봐서이미 신라시대에도 이들의 횡포가 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일본 국내의 남북조시대니 전국시대니 하는정치문제와 연관성이 깊다. 편의상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에 걸쳐 있었던 것을 전기왜구라 부르고, 16세기 중엽 명나라 가정(嘉靖)연간에 나타난 것을 후기 왜구라 부른다.

전기왜구의 주된 활동무대는 한반도의 연안과 중국의북동 해안지대인 발해만과 산동반도 일대였고, 이때 일본의 국내 사정은 남·북조시대에 해당된다. 후기 왜구로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중국의 동남 해안지대였고이때 일본은 전국시대에 해당한다.

고려가 입은 왜구의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것은 이들의 약탈행위가 수지(收支)를맞추게 되자 해적중(海賊衆 / 八幡船)이라고 불리던 수군(水軍)을 거느린 연안 지방의호족(豪族)들이 직·간접으로 여기에 동참하게 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팔번선(八幡船)이라고도 불렀던 해적중의 우두머리인해군대장들은 해상에서 통행세도 거두고, 무역도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해적행위도거침없이 자행하였다. 일본판 남·북조의 상황아래서 북조(京都에 소재)의 해적중이기세를 올리자, 남조(吉野에 소재)에서도 여기에 맞설 수 있는 해적중을 따로 두었다.그러다가 일본에서 요시노(吉野)에 있었던 남조가 교토(京都)에 있었던 북조에게멸망되고 통일되자 이런 해적중이라는 이름의 왜구는 사라졌다.

그후 16세기 중엽, 명나라 세종 가정(嘉靖帝 / 1522~ 66) 연간에 중국의 동남(東南) 해안지대인 강소(江蘇 / 쨩쑤) 절강(浙江 / 저쟝),복건(福建 / 푸젠), 광동(廣東 / 광뚱) 등 연안에 대한 왜구의 침공이 극성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 왜구들은 규모가 큰 것은 3백 명 정도,작은 것은 70 ~ 80 명이 무리를 지어 벌거벗은 알몸에 일본도를 차고, 기저귀 같은천으로 치부(恥部)만을 겨우 가리고 바닷가를 누볐는데, 대장의 군호에 따라 하는행동은 일사불란하고 매우 민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적의 주도권은 아예 중국인들이 쥐게 되고,왜구들은 중국인 해적들이 시키는 칼질이나 잔인한 행위를 맡아하는 졸개 내지는용병(傭兵)으로 그 모습이 변질된 경우가 매우 많아 지게 되었는데, 중국인 해적의목적은 밀무역에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나타나면서무역이 크게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포르투갈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중국의 비단이나도자기를 원했고, 중국인들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은(銀)을 탐냈다. 그러나 명나라조정은 조공이외의 사무역(私貿易)은 일체 금지시키고 있었다.

이런 쇄국령에도 불구하고 이익을 쫓아 상인들이 합세한밀무역이 성행하게 되었고, 목숨을 담보한 이런 밀무역에 왜구들은 값비싼 용병 구실을톡톡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구주(九州 / 큐우슈우)의 송포(松浦 / 마쓰우라)해적과 살마(薩摩 / 사쓰마) 해적들이 여기에 많이 합류했다고 한다.

이들 왜구를 고용한 중국 해적들은 가정(嘉靖) 32년(1553)을정점으로 맹위를 떨치다가 명나라의 토벌 작전과 기묘한 계책으로 두목들이 체포처형되면서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고, 일본 국내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 / 토요토미히데요시)이 전국을 통일하고 그의 명령에 의해서 일본인들의 해외 진출이 통제되었다.

따라서 왜구의 극성은 차츰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들은 다시 국가적인 규모로 대륙을 침략하게 되었는데 1592년에 발생한일본의 이런 침략을 우리들은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


You Made Me The Thief Of Your Heart (영화 'In The Name OfThe Father' 삽입곡) - Sinead O'Connor

 


세계는 지금.......2002년 1월 20일. 일요일

 

Bosnia의한 소년이 10년래 처음이라는 혹독한 추위를 견디게 위해
석탄 쓰레기장에서 타다 남은 석탄을 주어 모으고 있다. January 19, 2002.
REUTERS/Damir Sagolj

아프리카콩고에서는 화산 폭발.....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이웃나라 르완다를 향해 피난길에 나섰고,...
. Goma, in the DemocraticRepublic of Congo,
January 20, 2002. REUTERS/Jacky Naegelen

칸다하르공항을 수비하는 미 해병대 병사는
장갑차 위에서 서쪽으로 지는해를 따라 멀리 바라보고....
Afghanistan on Sunday Jan. 20, 2002.(AP Photo/Dario Lopez-Mills)

중동의분쟁은 과연 끝을 볼 수 있을까? 2000명의 팔레스타인들이
대형깃발을 만들어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에 항의하고...
Sunday, Jan.20, 2002 (AP Photo/Jockel Finck)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으로 국경 지역의 학교들이문을 닫게 되자...
애꿎은 학생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른곳으로 옮겨 학교를 열고,
선생님과 학생들 모두 열심히 노천 수업을받고 있는데.......핵무기 사용의
공포 속에서도 진지한 이들 교수-학습의표정에서 인도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다.

1950 년대, 한국전쟁 당시 학교는 군사시설로 징발 당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의
내색한번 내지 못하고, 거적 때기 위에서도 묵묵히 배움에 정진했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쓰레기 통 보다 못한 허허벌판에서 고도성장이라는장미꽃을 피울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지난 세월에 묻혀 기억조차까마득하겠지만, 그래도 당시 주역들의 눈에는
이것이 남의 일로만보이지 않을 것 같다.

Displaced border students study in an openschool set up in their camp in
Devipur village in the northernIndian state of Jammu and Kashmir January 22, 2002.
Forces onboth sides of the border are on high alert! amid fears of war inthe latest stand-off between the nuclear powers, triggered by aDecember 13 attack on India's parliament which New Delhi blameson Pakistan-based militants. REUTERS/Kamal Kish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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