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구]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배움터가 필요하다
1.
우리는 ‘원래’(it is natural)는 없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우리는 원래 한 민족이었다.”, 라는 국수주의자의 발언도, “남자는 원래 이래야 돼!”라는 마초들의 발언도, “학교는 이런 걸 가르쳐야 돼!”, “학생은 이래야 돼!” 등의 꼰대들의 발언도 조금만 따져 보면 그 어떤 근거도 없다. ‘원래’는 특정 세력이, 특정 계기를 통해 만든 것일 뿐이다.
‘원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 실천할 수 있다. 물론 물적 조건이나 구성원들의 조건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자유’의 수위는 자연스럽게 조절된다. 그러니까 ‘자유’는 보수주의자들이 우려하는 수준의 ‘레세 페르’(laissez-faire)로 나아가지 않는다.
2.
대안교육을 간단히 정의하면, 기존의 학교교육이 가진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상상 가능한 그 어떤 교육이라도 실험해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없기 때문에, 학교교육이 부여했던, 교사-학생의 관계를 의심하고, 학급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의심하고, 거기서 가르치는 교과서와 교육내용을 의심하고, 거기서 주는 졸업장을 의심해도 된다. 그리하여 ‘교사’와 ‘학생’이라는 말조차 과감하게 폐기하며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 배움터를 만들 수 있고, 한 교실에 아이들이 떼거리로 모여 하루 종일 수업을 듣는 구조를 과감하게 깨고, 대학생보다 더 자유롭게 자기 주도적 학습을 택하는 배움터도 만들 수 있고,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씩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새로운 교육 내용을 짠 배움터도 만들 수 있다. 시험이나 성적이 아닌 장문의 논문이나 인턴십 결과발표를 통해 졸업장을 주는 배움터도 만들면 된다.
그런데, 이렇듯 기존의 학교교육이 해 온 것을 의심하고, 이제까지 상상해 보지 못했던 것을 과감하게 실험하는 배움터보다는 기존의 학교태에만 머물러 있는 대안교육 현장이 많아지고 있다는 건 지극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대안교육’이라는 이름 자체도 ‘학교’라는 틀거리를 가진 ‘대안학교’에 한정되어 쓰이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공교육의 문제점을 어떤 식으로라도 개선한 ‘대안학교’들이 가진 순기능을 부인할 순 없다. 그것은 그것대로 아주 소중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안교육은 단순히 공교육의 보완이 아니며, 보완 역할을 해야 할 필요성도 없다는 점이다. 대안교육은 새로운 삶의 기획이며, 새로운 존재 양식의 실험터이기 때문에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를 실험하고 구현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3.
그렇다면 시대가 대안교육에 요구하고 있는 게 뭘까? 한둘이 아니지만 여기서는 ‘교육에서의 전위성’, ‘순환적 주체성의 형성’, 그리고 ‘교육의 공공성 복원’ 등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교육에서의 전위성’
대안교육은 무엇보다 학생 개개인의 성장과 변화에 관심을 두고 대안을 탐색해 가는 운동이기 때문에 다분히 ‘전위적’이며 ‘프론티어적’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학교교육의 틀에서는 도저히 발휘될 수 없는 신선한 상상력으로 무장해서 기존의 주류 사회에 도전하는 아방가르드적 태도 말이다. 낡은 아카데미즘을 벗어난 연구자들의 자발적인 연구 공동체인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하고 있는 ‘월요학교’가 그러하며, 생산과 성장의 노예가 되어 있는 문명에 맞서 기초 생산공동체를 다시 일구고 그 한 가운데 배움을 위치시키려는 ‘변산 마을공동체’가 그러하며, 일과 놀이와 공부를 분리시켜 왔던 그동안의 우리 문화와 한판 싸움을 벌이며 배움과 직장이 공존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 ‘노리단’이 그러하다.
기존의 학교태를 벗어난 이 모든 실험들은 근대적인 학교교육이 추구했던 ‘국민양성’을 위한 교육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즉 이 실험들은 학생이 자기 삶의 주인임을 깨달으며, 자기 삶을 적극적인 도전거리로 인식하며, 나아가 지금 우리 시대의 과제가 무엇인지, 윤리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껴안는 그런 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순환적 주체성의 형성’
그래서 대안교육 현장에서의 주체는 결코 국가나, 교사, 교과서일 수 없다. 그동안 교육의 객체 혹은 대상으로만 여겨져 왔던 학생들이나 지지그룹(학부모나 지역사회 사람들)도 교육 활동의 주체가 되며, 특히 학생이 그 중심에 선다. 그러므로 교사-학생 사이의 관계는 새롭게 조정된다. 그동안 주체-객체 관계로 틀지어졌던 교사-학생 관계는 대안교육 현장에서 공동운명의 관계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때로는 학생이 교사가 되고, 교사가 학생이 되기도 하는 순환적 주체성의 관계로 바뀐다. 따라서 그 관계 조정이 상당히 파격적이다.
예컨대 일·놀이 통합모델인 하자센터의 ‘노리단’의 경우, 다양한 연령과 개성을 지닌 단원들은 역동적인 역할을 소화하며(때로는 학생, 때로는 교사, 때로는 악기를 만드는 노동자)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노리단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단원들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기가 잘 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자기-주체성’을 확립함과 동시에 동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일과 놀이를 동시적으로 하면서 ‘순환적 주체성’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모든 행위와 판단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타자에게 그러한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유연성, 즉 ‘탈주체화’를 통해 더욱 확장된 삶을 경험할 수 있게 되고 공동체적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순환적 주체성’은 우리의 교육이 가야 할 길이 근대적인 국민교육 사회가 아니라 후기 근대 평생학습 사회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내가 어떤 지식을 가졌고, 어떤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역동적인 사회 속에서 언제든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하며 언제든지 기꺼이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바로 그 평생학습 사회 말이다.
‘교육의 공공성 복원’
불과 10년, 2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성장 제일주의적인 분위기로 인해 장애인, 빈곤계층, 새터민과 외국인 노동자 같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이나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과 소수자를 따뜻하게 품어 안기에는 학교라는 구조는 너무 딱딱하다. 그런 점에서 대안교육의 수많은 시도들, 대안교육이 지닌 안목은 기존의 교육시스템에서는 결코 돌볼 수 없었던 이들을 품어 안게 되고, 그들의 배울 권리에 대한 인식을 우리 사회에 환기시켰으며, 교육의 대상이나 영역의 확장을 가져왔다. 지금 한창 진행 중인 새터민,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코시안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활동이나 ‘소년원학교’ 같은 게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렇게 교육 영역을 확장시킴으로서 다양한 계층과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고, 기존의 학교가 스스로를 한계 지음으로 사유화했던 교육의 독과점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정형화된 학교 구조 안에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전승되는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삶 한가운데에서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동료들과 찐한 생명의 활력을 느끼며 함께 성장하는 그런 배움이 실험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