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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생활 입문(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성 프란체스코 살레지오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부디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주기를 바랍니다. 이는 내게 기쁨이 되고 여러분에게는 만족을 드릴 것입니다. 글리세라라는 꽃 파는 처녀는 솜씨가 좋아서 같은 종류의 꽃으로 여러 가지 모양의 꽃다발을 만들곤 했습니다. 포지아스라는 화가는 그녀의 재주를 부러워하여 그림으로 흉내 내려고 했으나, 글리세라가 꽃꽂이하듯 아름답게 그릴 수 없어 실망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당신 종의 혀와 펜을 통해 우리에게 신심을 가르치십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늘 한결같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는 다양하고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나는 이 입문서에 선현(先賢)들이 이미 언급한 것과 다른 내용은 쓸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것을 바라거나 시도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꽃다발에는 배합의 변화가 있으므로 선현들의 꽃다발과는 당연히 다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심에 대한 글을 쓴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세상의 번뇌를 피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기에 완전한 은둔 생활로 인도하는 신심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집안일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신심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흔히 이런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구실을 대며 신심생활을 시도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짐승들이 종려나무 잎을 먹지 않는 것처럼, 세상에서 분주하게 사는 동안은 그리스도교의 신심이라는 종려나무 잎을 맛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다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진주 조개 속의 진주가 한 방울의 짠물도 삼키지 않는 것처럼, 바다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첼리도니아 제도의 섬에 있는 샘에서는 단물이 솟아나오는 것처럼, 불속을 날아다녀도 불나방의 날개가 타지 않는 것처럼 인내심 많고 용감한 사람은 세속에 살면서도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않고, 세기의 파란만장하고 쓰라린 삶의 한가운데에서도 신심의 샘을 찾아내어, 지상의 온갖 욕망 속에서도 경건한 생활에 대한 거룩한 희망의 날개를 태우지 않고 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어려우며,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이끌기에는 부족한 줄 알지만, 이 책이 신심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실 이 입문서에는 내가 원해서 발행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고귀한 가문 출신인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신심 생활을 시작하고자 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나는 예전부터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고, 그녀의 이러한 계획을 매우 바람직하다고 여겼으므로 그녀에게 신심 생활을 바르게 이해시켜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바람과 상황에 알맞은 여러 가지 영적 수련을 알려 주었으며, 필요에 따라 그녀가 참고할 수 있도록 교훈을 적은 글들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 편지들을 훌륭하고 신심 깊은 수도자에게 건네자, 그분은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이것을 출간하라고 나에게 간곡히 권했습니다. 그분의 권고로 큰 용기를 얻고, 그분의 판단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뜻에 따랐습니다. 나는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유용하고 유익한 글이 되기를 바라며 다시 여러 번 읽어 정리하고, 알맞은 조언과 교훈을 첨가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바쁠 때 이 작업에 착수했기 때문에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다만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설명했고(되도록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념해야 할 여러 사항을 진솔하게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할 일도 많아 문장을 다듬는 데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글에서 필로테아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애초에는 한 사람을 위해서 쓴 글이었으나 결국 여러 사람들을 위해 출간하기로 한 만큼, 누구든지 깊은 신심 생활을 지향하는 이들을 적합한 이름으로 호칭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필로테아는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 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나는 신심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입문서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했습니다. 제1부에서는 설명을 곁들인 영적 강의로써 필로테아의 단순한 희망이 견고한 결심으로 바뀌도록 시도했습니다. 총고해 뒤에 결심을 서약하고 성체를 영함으로써 자신을 구세주께 바치고 구세주를 자기 안에 모시는 사람은 행복해지고, 구세주의 거룩한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제2부에서는 이렇게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들이 점차 우리 주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하고자 두 가지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성체 성사와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거룩한 기도를 잘 이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제3부에서는 영적으로 진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덕을 닦는 법을 제시했으며, 혼자서 또는 다른 방법으로는 쉽게 터득할 수 없는 특별한 가르침을 언급했습니다. 제4부에서는 악마의 암계(暗計)를 예로 들고, 이를 벗어나거나 피하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5부에서는 기쁨 가운데 신심 생활로 한층 더 나아가고자 영혼이 잠시 쉬며 그 힘을 보충할 수 있도록 고요한 곳에 머무르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지금은 비판의 시대이고, 특별한 신심 행위는 수도자나 독실한 신심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처럼 교구 관리에 바쁜 주교에게는 신심 생활에 전념할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임무를 맡은 만큼 그런 것이 오히려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나는 위대하신 디오니시오 성인을 본받아 “마치 ‘사랍(세라핌)’들이 천사들 중에 가장 뛰어나듯이, 주교의 직무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직무는 영혼들을 완덕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이러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 가장 유익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초대 교회의 주교들이나 교부들의 서신을 보면, 그분들은 우리 못지않게 이 임무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성실히 지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사도들을 본받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전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수확 외에도 특별하고 개인적인 애정을 가지고 개별적인 수확을 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티모테오, 티토, 필레몬, 오네시모, 테클라가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사랑스러운 제자였고, 마르코와 베드로닐라가 베드로 사도의 영적인 자녀였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닐라 성녀가 베드로 사도의 친딸이 아닌 영적인 딸이었음을 박학한 바로니우스와 갈로니우스가 증명했습니다. 요한 서간의 저자도 둘째 서간을 선택받은 부인에게 보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 영혼을 특별히 지도하는 일은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이 일은 나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수고입니다. 마치 농사를 짓는 사람과 과수원을 가꾸는 사람이 일이 많고 분주할 때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행운의 아라비아’(예멘)에서 계수나무 묶음을 나르는 사람이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사냥꾼이 다른 새끼 호랑이들을 잡는 동안 시간을 끌려고 새끼 호랑이를 한 마리만 남겨 두면 어미 호랑이는 남은 한 마리를 업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잽싸게 굴속으로 달아나는 것처럼 모성애는 자신의 짐을 가볍게 합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기 아이를 한참을 안고 다니면서도 피로를 크게 느끼지 않는 것처럼 나도 거룩한 완덕에 뜻을 둔 영혼을 만나면 몇 배 더한 열성으로 그들을 돌보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아버지의 마음도 필요합니다. 사도들과 그 시대의 선교사들은 자신의 제자들을 단지 ‘내 아이’라고 하지 않고, 더욱더 다정하게 ‘내 귀여운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나는 깊은 신심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지만 경건한 신심 생활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 역시 독실한 신심을 지닌 사람이 되고자 하는 원의만은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원의 때문에 나는 여러분에게 신심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어떤 위대한 학자는 무언가를 더 배우고자 한다면 남의 말을 경청하고 연구도 해야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경건한 플로렌티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르치는 일은 배우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명한 화가 아페레스에게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름다운 여인 콤파스페의 초상을 그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아페레스는 오랫동안 콤파스페의 얼굴을 바라보고 캔버스에 그녀의 초상을 그리다가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불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알렉산더 대왕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동정하여 그녀와 맺어 주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연인을 잃었으나, 플리니우스의 말대로, 이 조치로 전쟁의 승리보다 더 위대한 그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나는 주교이므로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일반적인 덕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심의 덕을 그려 넣으려고 합니다. 나는 이 일에 충실하기를 바라고, 사람들의 마음에 이를 새겨 주는 동안 내 마음에도 그 그림이 깊이 각인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도 이 덕에 대한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소망에서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합니다. 내가 이 일에 깊이 애착하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약속으로 나를 뒷받침해 주실 것입니다. 아름답고 정숙한 레베카가 아브라함의 낙타들에게 물을 먹임으로써 이사악에게서 금 귀걸이와 황금 팔찌를 받고 그의 아내가 되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양 무리를 내가 거룩한 영성의 샘으로 인도하면, 하느님께서 나의 귀에 거룩한 사랑의 황금 말씀을 들려주시고, 내 팔에 그 일을 바르게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며,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내 영혼을 주님의 배필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과 힘은 참된 신심의 정수이며, 나는 이것을 성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글과 행위, 말과 의지 그리고 사상은 언제나 성교회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1609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안시에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제1부 제1장 참된 신심 필로테아 님, 그대는 하느님을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려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신심 생활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기뻐하시리라 믿으며 신심의 덕을 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착오가 있으면 그 오류가 점점 커져 바로잡기가 어려워지므로 먼저 신심의 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오류와 허무한 것들은 수없이 많으나 참된 신심은 오직 하나뿐이며, 그러므로 무엇이 참된 신심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그릇된 길로 나아가 미신에 빠질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아렐리우스라는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들의 생김새와 모습을 따라 그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신심을 그리려 합니다. 금식을 중시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금식만 하면 신심이 깊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음식 절제를 중시하는 사람들 중에는 목이 말라도 포도주나 물을 마시지 않고 참으면서 남을 비방하거나 모함하는 말로 이웃 사람의 피를 송두리째 마르게 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매일 여러 가지 기도를 바치는 것이 참된 신심이라고 떠벌리면서도 같은 혀로 가족이나 이웃 사람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타인을 무시하는 교만과 멸시의 언사를 서슴지 않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돈주머니를 풀어 선심을 쓰지만 원수를 용서하는 선량한 마음이 없는 사람도 있고, 원수를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빚을 갚을 형편이 못 되는 채무자에게서 악착같이 빚을 받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신심 깊은 사람으로 통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 임금의 병사들이 다윗을 잡으려고 그의 집을 수색했을 때 그의 아내 미칼은 인형에게 다윗의 옷을 입혀 이불 속에 넣은 다음 남편이 병으로 누워 있는 것처럼 꾸며서 병사들을 속였습니다(1사무 19,8-17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경건과 관련된 일정한 외적 행위들을 통해서 자신을 가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참으로 경건하고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의 신심 생활은 경건을 가장한 허상에 불과합니다. 필로테아 님, 진실하고 살아 있는 신심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심은 하느님의 참된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를 신심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우리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해질 때 이를 ‘은총’이라 하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덕을 행하려고 노력할 때 이를 ‘애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애덕으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자주 선을 행할 때 이를 ‘신심’이라고 합니다. 타조는 아예 날지 못하고, 닭은 가끔 날개짓을 하지만 잘 날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나 비둘기 또는 제비 같은 날짐승들은 매우 높고 빠르게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인은 결코 하느님께 날아갈 수 없고, 그가 시도한다 해도 고작해야 지상에 머물거나 늘 지상 것들을 추구할 뿐입니다. 아직 신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간혹 선을 행함으로써 하느님께로 날아가기도 하지만, 그것은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대개는 가볍게 날지 못하고 매우 둔하게 납니다. 그러나 신심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로 빠르고 높게 날아갈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활동함으로써 우리가 그 사랑을 통해 열성적으로 행하는 선행이 일상적인 것이 될 때, 이 자연스러운 행위를 가리켜 신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애덕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지키게 하는 것은 신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않는 사람은 선량한 사람도 아니고 신심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신심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애덕을 지녀야 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할 때에도 기꺼이 그리고 신속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신심이란 어떤 면에서 완전한 사랑을 뜻하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지키게 할 뿐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선을 행하게, 곧 계명 준수와 의무 이행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감도(感導)에 힘입어 사랑으로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게 만듭니다. 병에서 간신히 회복된 사람이 길을 갈 때 숨을 헐떡이면서 천천히 걷듯이, 참회한 뒤 이제 막 죄에서 벗어나 신심의 경지에 오르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의 길을 헐떡이며 천천히 걸어갑니다. 그러나 일단 신심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건강한 사람과 똑같아질 뿐 아니라 뛰어갈 수도 있게 됩니다. 비록 험난한 길이지만 영적 가르침과 성령의 감도에 힘입어 그 길을 헤치면서 달려가게 됩니다. 결국 사랑과 신심이란 불과 불꽃 같은 관계입니다. 사랑은 영적인 불이고, 신심은 이 불에서 타오르는 불꽃입니다. 신심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나아가 영적인 가르침과 성령의 감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불꽃과 같은 것입니다.
-신심 생활 입문(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에서 발췌- (2008년~2012년 대련한인성당 소공동체 모임 및 중국어 성경 공부 때 영적독서로 묵상한 도서입니다 그 은총의 시간 속으로 1장씩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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