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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식이 1931년부터 57년동안 살았던 서울 가회동 자택. 그는 화신산업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1988년에 이 집을 30억원에 처분했다
88년도에 30억.........어이가 없는 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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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는 광복 전 국내 최고 부호로 꼽혔던 ‘화신백화점’(화신그룹)의 고(故) 박흥식(朴興植) 회장 부인이기도 하다. 한씨는 도쿄 예대 피아노과를 나와 서울대·경희대 음대 교수를 지냈으며, 1956년 한국 여성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황제)’을 서울시교향악단과 협연했다.
약속 장소인 신라호텔 중식당에 들어서면서 기자는 ‘다리 불편한 할머니’가 예약한 방을 물었다. 한씨는 20년 단골 식당에서도 이름 대신 그렇게 통했다. 휠체어를 타고 간병인과 함께 나온 한씨는 맑고 정정했다. 말도 젊은이 못잖게 빨랐다.
“연극이나 미술 등 여러 예술분야에서 훌륭한 상이 많지만 서양음악 쪽에는 이렇다 할 상이 없어 안타까웠어요. 피아노를 위해 애쓰는 분들에게 작은 격려가 됐으면 합니다.” 한씨는 “상을 위해 번듯한 재단을 만든 것도 아니고, 작은 기금을 마련해 그 과실로 소박하게 상을 운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인하씨가 고 박흥식 회장을 만난 것은 도쿄예술대 대학원에 다니던 스물네 살 때. 평양에서 태어난 한씨는 도쿄로 유학, 손아래 윤기선(피아노) 박민종(바이올린)과 한 학교에 다니면서도 이들과 말 한번 나눈 적 없을 정도로 수줍었다. 그런 한씨를 박 회장이 덜컥 찾아왔다. 박 회장의 부인이 병석에 눕자 그 부부의 중매를 섰던 이가 한씨를 소개한 것. 한씨는 “그이가 나를 보고는 (예쁜 모습에) 첫눈에 나자빠졌다”고 웃었다. 집안에서는 재취가 뭐냐며 난리가 났지만, 우여곡절 끝에 25세 때 박 회장과 결혼했다.
그러나 한씨는 “(광복 후) 집안에 시련이 닥치고 박 회장마저 94년 세상을 떠나면서 낙산사 등에 들어가서 절사람처럼 세상과 끊고 지냈다. 지금도 만나는 이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는 10년 전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쳐 수술도 두 차례 받았다.
단골 식당에조차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한씨는 2000년 경희대 발전기금으로 1억원, 동아음악콩쿠르에 한인하상 기금으로 1억원을 전달하는 등, 음악계를 도와왔다. 한씨는 박 회장과의 사이에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박봉숙(재미)씨를 두었다.
한씨는 “서울의 요양원에서 홀로 지내고 있으며, 내가 세상을 떠나면 딸이 상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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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2월 철거된 박흥식의 동상. 광신학원은 동문회의 건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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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평남 용강~1994. 5. 10 서울. 경제인. |
일제강점기에 상징적인 조선인 재벌로 꼽혔고 1960년대까지 한국 경제계를 주도했으며, 그후 여러 차례의 실패와 재기의 시도, 그리고 독특한 경영기법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고향에서 미곡상, 지류도매업과 인쇄소를 경영하다가 1926년 상경했다. 이때 지류도매상에서 시작하여 1931년 화신백화점을 설립하고 사은경품판매, 연쇄점 운영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경영방법을 통해 일본인 상업가를 능가하는 조선인 자본가로 성장했다. 1930년대 후반 화신무역을 설립하고 동남아와 멀리는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해외무역을 시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배가 예측되던 1944년 조선총독부의 강권(强勸)으로 전투기 생산을 위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8·15해방 후 좌익과 노동자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수립 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7항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첫번째 연행·구속자가 되기도 했다. 그후 1950년 타결된 한일무역협정을 위한 사절단으로 활동했다. 6·25전쟁이 끝난 후 1955년 신신백화점, 1956년 화신백화점을 열었으나 전후(戰後) 유통업의 경기는 매우 저조했다. 1957년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대리점계약을 맺고, 1958년 정부에 원자력발전소 건립계획안을 제출하는 등 의욕적인 사업계획을 세웠으나 대부분 무산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요청으로 6대 사업계획안을 작성·제출하고, 화신은 그 가운데 일부인 송도해수욕장 개발과 화학섬유공장 설립을 맡았다. 그러나 1968년 막대한 외자를 투입해서 설립한 흥한화섬(지금의 원진레이온)이 1969년 한국산업은행 소유로 넘어가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후 1972년 설립하고 1973년 일본 소니사와 합작한 화신산업(지금의 아남정밀산업)이 1980년 부도를 낸 이후 경제활동을 멈춘 채 신병을 치유하며 지냈다. 흔히 낡은 것으로 평가되는 그의 독특한 경영기법은 부채를 쓰지 않는 경영원칙에서 비롯된다. 다른 경영인들과 달리 부도에 따른 재정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재산으로 충당했으며, 1980년 부도난 화신산업의 남은 부채가 1988년에 2억여 원인 것으로 알려지자, 부채 청산을 위해 자신이 57년 동안 살던 저택을 팔아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되었던 최초의 백화점. |
1890년대에 신태화(申泰和)에 의해 설립된 화신상회를 1931년 선일지물(鮮一紙物) 사장 박흥식(朴興植)이 36만 원에 매수해 자본금 100만 원의 화신상회를 설립하고, 이전의 목조 2층 건물을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증·개축하였다. 1932년 옆 건물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1934년 2월 주식회사 화신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6월 연쇄점과를 신설해 전국 350개소의 연쇄점을 모집·개점시켰다. 1935년 1월 화재로 50만원의 손실을 입었지만, 그해 12월 화신 평양지점, 1938년 화신 진남포지점을 개설했다. 1937년 11월 11일 화재로 소실되었던 건물이 지하 1층, 지상 6층, 총건평 3,011평으로 신축·준공되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인에 의해 건립된 최대의 건물로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구비되어 있었다. 1946년 12월 화신주식회사에서 독립해 자본금 2,000만 원의 화신백화점이 설립되었고, 1950년 1월 다시 화신주식회사와 통합되어 자본금 3억 원의 화신산업주식회사로 운영되었으나 6·25전쟁에 따른 물자부족으로 1950년 10월부터 일반에게 임대운영되었다. 1955년에는 종로1가에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1970년대 이후의 과도한 투자로 1980년대에 화신백화점을 운영하던 화신그룹이 모두 해체되었으며, 화신백화점 건물도 종로 도로확장 계획에 따라 모두 헐렸다. |
화신백화점의 주인 박흥식 - 반민특위의 구속 1호였던 매판자본가의 전형
박흥식의 기업활동이 성장해가는 과정과 자본축적의 성격을 살펴보고 그의 친일 행각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토착상업자본의 선두주자 화신 설립
그의 치부(致富) 과정은 다른 자본가의 축적양식과는 내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초기인 19세기 후반에 몇 몇 유명한 조선 귀족은 금융업에 진출하였다. 또한 김연수* 집안과 같은 지주 가문은 1920년을 전후하여 공업에 투자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안전하고 수익성 높은 토지투자가 공통적인 관심사였을 뿐, 상업투자는 거의 눈 밖에 있었다.
반면 박흥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기업 양태와는 달리 일찍부터 매판적 상업자본가로서의 자기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당시의 경제 상황은 면직물, 모직물, 비단, 종이제품, 도기류, 석유에 대한 국내수요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면직물 수입이 급증하고 종이나 고무신 등의 소비재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조선방직, 경성방직, 종연방직, 동양방직 등이 여기에 참여한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그러나 공급과 수요는 여전히 전통적 유통망인 장시나 지방상점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박흥식은 1934년 화신연쇄점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전국적 유통체계의 구축을 도모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상업발전은 일본의 자본과 조직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여기에 예외적으로 개입하였던 것이 바로 박흥식의 화신인 것이다. 화신을 중심으로 한 박흥식 소유 상업기업의 발전은 1923년 불입자본액 690만 엔, 1938년 2230만 엔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으며, 화신과 대창무역, 대창사 등이 이러한 토착기업의 선두주자로서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은 박흥식이 1929년 9월 종로 2가에 설립한 화신상회였다. 1934년 화신상회가 화재로 전소하자 다음해 신축, 이름도 화신으로 변경하고 일본인 백화점과 경쟁하였다.
화신은 서울의 본점과 전국의 지점망을 통해 일본상점과 경쟁하였다. 선일지물과 화신은 민씨 일가의 금융업과는 대조적으로 평민이 국내외 상업에서 남긴, 경험과 제도적 연속성이라는 식민지 유산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축적 활동의 구체상
화신으로 대표되는 박흥식의 자본축적 과정은 투자자로서의 박흥식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주력 기업에의 투자이다.
자신이 대부분의 지분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핵심 관련기업, 즉 선일직물, 화신백화점, 대동흥업 등에 박흥식은 에너지와 자본을 집중 투자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박흥식의 야심에 찬 계획과 @투철한# 기업가 정신, 그리고 개인적 신뢰와 유대관계(김옥현 등) 등에 힘입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발견하게 된다.
소유의 집중(박흥식, 박병교, 화신, 선일 등이 주식의 94% 소유)과 김옥현, 이장제, 조고(長鄕衛二:도쿄제국대학 공대 졸업, 1926년 치수 및 철도사업의 감독으로 조선에 들어 옴, 만선 무역협회 고문) 등 소수 경영자에 의한
경영의 지속성은 주력기업에 대한 투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신과 선일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방계 기업들에 대한 다양한 투자의 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둘째로, 경영 책임을 맡는 합작투자(주식회사)다.
박흥식은 민규식이나 김연수와는 달리 자신이 경영책임을 맡은 합작회사를 많이 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비천한 출신성분이었고, 서울에 인맥이 적었으며, 핵심 기업에 대한 투자로 여력이 없었던 데 연유하는 것 같다. 이 시기 이런 방식의 투자로 유일한 것은 화신무역을 들 수 있는데, 화신무역은 조고와 이규제를 중심으로 중국과 만주시장까지 진출한다. 이
기업은 박흥식에게 있어서 주요한 무역회사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계열회사 중 김연수*, 현준호* 등이 다양하게 참여한 유일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박흥식이 당시 상당히 폐쇄적이던 조선의 주요 산업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그로서는 대단한 성과였으며 이후 조선의 주요 산업가 그룹과의 상호의존이 증대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세째로, 경영 책임을 맡지 않는 중규모 기업에 대한 합작투자다. 이는 민씨 일가나 김연수의 투자전략과 유사한 것이다.
박흥식은 지방은행(호남은행), 금융회사(조선생명보험) 등에 많이 투자했으며 하준석의 조선공작, 한규복의 조선공영 등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들 기업의 이사회는 박흥식을 포함하여 대표적인 조선인 기업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김연수가 경영하는 경성방직, 남만방직에 박흥식이 투자하고 있었다는 점은 주요 토착자본가로서의 박흥식이 갖는 위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일본인이 경영하는 경인기업, 조선섬유화원어주, 대흥무역 등에 참여한 것이나, 일본인 기업이 도매단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사도매상연합 이사로 활동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당시 총독부와 조선무역협회는 무역회사를 차리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인은 조선무역진흥, 조선동아무역, 대흥무역 가운데 하나에만 참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쇼타니(涉谷禮治:와세다대학졸업, 한양사|조선은행 근무, 무역협회 소속)가 전무이사로 있었고, 김연수도 참여하고 있던 조선동아무역(조선질소, 미쓰이 등 일본 대기업도 투자하고 있었음)과 대흥무역(화신, 경성방직, 조선은행, 식산은행,日本帝國HOUSEHOLD의 공동투자)에 박흥식도 투자하고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총독부의 시책사업과 박흥식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또한 쇼타니나 나카토미(中富計太)와의 접촉은 북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무역회사라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박흥식이
이러한 사람들과 합작투자를 통해 다진 인적 유대는 그에게 중요한 기반이되었다.
끝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주식회사에 대한 투자다.
박흥식은 일본인의 전략 기업인 조선석유, 북선제지화학공업, 동양척식에 이사로 있었으며, 조선비행공업에 사장으로 참여하는 등 일본 전략산업에의 참여를 더욱 확대하였다.
북선제지화학공업 같은 일본인 대기업에 박흥식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총독 우가키(宇垣)가 그를 왕자제지에 고문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자제지의 경영진과 박흥식이 인연을 맺게 됨으로써 그의 지물사업은 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영향은 북선제지의 아키타(秋田秀穗)가 화신의 주요 투자가가 됨으로써(1943) 구체화된다.
총독부와 주요 재벌동맹이 지지하는 합작투자회사였던 조선석유는 광물의 수출과 파라핀, 아스팔트, 코크스, 석유 등의 수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따라서 엄청난 이윤을 내고 있는 기업이었다. 이러한 회사의 이사가 되었다는 것은 박흥식의 자본이 총독부 및 일본 독점자본과 더욱 강고하게 결합되고 또한 그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속자본가로서 박흥식의 축재 비결
박흥식의 자본축적 과정은 매판적 상업자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즉, 총독부 지배권력과의 결합에 의한 매판성이 축적의 본질적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민족적 관점을 사상하고 자본 자체로서만 본다면 시의에 부합하는 자본운동의 적응성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의 축재 비결은 경영의 지속성과 소유의 집중에서 찾을 수 있다.
박흥식, 이기연, 이규제, 윤우식, 조고 등이 화신백화점, 대동흥업, 화신무역등의 중역을 겸직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박흥식은 몇 안 되는 주식소유자가운데서도 소유를 독점하고 있었다(총주식 20만 주의 대부분 소유). 식민지 말기에 이르러 경영팀은 어느 정도 와해되었지만 소유의 독점은 지속되었다.
1941년 화신이 대동흥업을 통합하여 총자본이 800만 엔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때에도 여전히 45명의 주주가 65만 주를 소유하고 있었다.
박흥식의 투자 초점은 화신사였다. 그런데 화신이 초기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경쟁관계에 있었던 동아백화점보다 화신의 조직과 훈련 정도가 나았다는 점 이외에도,금수출 금지 이전 시기에 금은투자에 주력하여 금은 판매를 통하여 확보한 막대한 자본력이 밑바침되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겠다.
다음으로는 총독부 정책 및 경제여건에 재빠르게 적응한 점을 들 수 있다.
빠른 성장을 기록한 화신연쇄점은, 지방 상인에게 그들의 재산을 담보로 하여 무이자로 상품을 공급하고 4개월내에 자금을 회수하는 한편, 제조업자에게는 2개월내에 물건값을 지불하는 신용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체계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수송, 우편 등 식민지 경제의 하부구조를 최대한 이용하였기때문이었다. 민씨 일가가 귀족적 금융가라면 박흥식은 추진력 있는 평민사업가라고 평가될 수 있다.
박흥식이 지속적으로 경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겸직 중역회의#를 활용했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총독부정책이나 전시경제와 같은 우발적 상황에 잘 대처했기 때문이었다. 겸직 중역회의는, 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불안정한 상황에 대처하는 중요한 전략이며, 동시에 @우호적 투자가#로 이루어진 소유연관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필요한 것이었다.
김연수가(家)에게서도 이와 같은 연관이 발견되지만 민씨 일가에서는 이와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화신상사의 이사진으로는 박흥식, 이규제와 함께 히라타(平田新平),
동일은행의 미타니(三谷俊博:전무이사), 선일지물의 요내다(米田彌三郞),
호남은행의 (展口弼一), 현준호이상 이사, 한성은행의 한상룡*,
경성상의의 다카와(田川常治郞)이상 감사, 김연수(COMPANY DIRECTOR),
종연방직의 쓰다(津田新五)이상 고문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조선의
1급 경영자들과 기업가들 그리고 일본의 유명 기업가들을 망라한 것이라고도할 수 있는 구성이었다. 또한 이들은 총독부, 일본 기업, 조선 기업가에대하여 박흥식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의 신뢰도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그러나 이 때에도 주식의 대부분은 박흥식이 소유하였다).
이처럼 주력기업 이외에 다양한 방면에 대한 투자는 자기 기업을 유지하는 데필요한 조선인 혹은 총독부 및 일인 기업들과의 인적 유대를 맺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즉,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경영 책임을 지는 합작투자는예외적인 경우에 한했고, 경영 책임을 지지 않는 중규모 기업에 대한 경우는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사람을 사귀면서 위험부담이 많은 고수익사업(부동산, 무역)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주식회사에 대한 투자는 일본 재벌들과의 접촉을 위해 이용되었던 것이다.
박흥식 소유의 기업들이 1945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각 국면들에 대응하는 방식은, 그가 기업의 하부구조의 발전 및 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총독부의 전략에 부응하여 얼마나 잘 적응해 왔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예속의 양상과 매판의 본질
예속자본가로서의 박흥식의 성공은 총독부와 일본자본 양자에 대한 예속의 성격과 정도가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를 낳는다. 그러나 결론은 일반론적인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진남포에서 미곡상과 지물포를 경영한 이후 화신백화점, 화신연쇄점, 화신무역 등을 설립하였는 바, 농업자본도 없는 토착기업인이 대규모 상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우선 지적될 수 있다.
그의 자본이 부분적으로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토착 소유와 경영을 고수했다는 약간의 특수성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매판적 상업자본이라는 본질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박흥식의 자본이 식민지 지배권력인 총독부와의 관계에서 경제외적인 결합을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음은 그 성격을 적나라하게 증명해 주는 단적인 예이다.
상인으로서의 박흥식에게는 무엇보다도 자본과 신용이 중요했지, 자본으로서의 성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박흥식은 일본과 조선은행으로부터 대폭적인 금융지원을 받았다. 또한 그는 기업가로서 수송, 공급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소비자를 위한 연쇄점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이 때에도 식산은행에서 3000만 원을 대부받았다. 민씨 일가의 금융업이 총독부의 면밀한 조사를 받은데 비해 화신 등은 태평양전쟁 이후까지 총독부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도 박흥식은 경영진에 유명 일본 기업가들을 임명해놓고는 이들을 이용하여 총독부의 전략 내에서 여지를 발견해내고, 다시 이를 자신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기회로 민첩하게 활용하였다.
박흥식이 다른 사업가들과 달리 총독부의 지원을 용이하게 얻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여 화신이 기본적으로 매판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자본의 생산적 활용(토착자본의 성공이라는 총독부의 선전용으로도 좋음), 국가정책에 대한 조심스러운 적응(엔블럭에의 대응과 화신무역의 창설 등), 일본 기업과의 강한 유대(1932년 오사카에 구매국 설치, 상품공급자들과의 긴밀한 친분), 총독과의 친교 등을 그 이유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총독부가 화신을 믿을 만했고 총독부는 화신을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는 기업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요인이 박흥식이 총독부지배하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결국 박흥식이 매판자본가로서 유능했음을 말하는 것 이상은 아니다.
박흥식의 매판성은 지금껏 논의한 매판적 성향의 관철이라는 자본운동의 구체화인 것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지하에서 매판적 성향을 관철하면서 발전해 온 박흥식의 자본은 8|15 해방에서부터 비롯되는 상황 변화 속에서는 정상적인 자본운동으로 스스로를 변형시키지 못함으로써 파산을 맞이하게 된다.
매판의 정치적 측면--전쟁협력 행위
1949년 박흥식은 반민특위에 제1호로 구속되었다. 박흥식의 일제말기 전쟁협력행위가 일반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족한 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제1호로 구속될 만한 @정치적 거물#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역시 일제하 매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자본행위와 정치적 음모가 놓여 있었다.
반민특위가 설치되자 노덕술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경찰 출신들의 반민특위 해체 음모가 하수인 백민태의 폭로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배후자금책은 다름아닌 박흥식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반민특위 활동의 가장 중요한 위해 요소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박흥식의 해방 후 자본운동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박흥식은 어떠한 혐의로 반민특위에 기소되었던가. 먼저 총독부에서 주최한 산업경제조사회와 1938년 시국대책조사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여한 사실이 있었다. 이들 조사회는 총독부가 주최한 것으로 시국대응책에 대한 자문기관 역할을 수행했었다. 이 또한 위에서 말한 매판적 성격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1938년 이후 각종의 전쟁협력행위에 가담하게 되는데 이를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및 배영동지회의상담역으로 참여한다.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및 연성부의 연성위원으로 전쟁에 협력하며, 이때부터 각종의 전시동원 강연에 참여하게 된다. 1941 년 발족된 임전보국단의 이사로 참여한 그는 평양에서 강연행각을 벌인다. 이때 매일신보의 감사역과 조선총독부 보호관찰소 촉탁이라는 감투도 쓰게 되어 그의 친일활동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
1942년 총독 미나미(南次郞)가 퇴임하자,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라는 제목의 담화를 {매일신보}에 발표한다. 총독이 자부가 되는 관계가 매판자본가로서의 박흥식의 위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리라. 또한 그는 같은 해에 전일본 산업경제대표자들의 전쟁증강단합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여 일왕을 면접하고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산업경제인으로 대동아전쟁 완수에 전력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이었다. 1943년 학병제가 실시되자 학병 권유 강연 또는 독촉 등에 광분하고 나섰다. 일왕 면담 1주년이 되자 @배알 1주년 성려 봉체----지성으로 봉공#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그 성은에 보답하리라고 거듭 맹세하였다. 1945년 대화동맹의 심의원이 되는데 이 단체는 일제의 본토결전을 준비하기 위한 단체였다. 이것이 그의 전쟁협력행위의 대강이다. 그의 매판활동의 정점이 1944년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으로 드러나는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잘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에도 화신은 매판으로서의 자기 성격을 여전히 관철시키려 들었다. 상업에 편중된 박흥식의 자본은, 분단이라는 조건 속에서 남북교역에 적극성을 보였으나 앵도환 사건으로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그 뒤 외국자본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화신은 흥한비스코스공장을 운영하여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경제건설이라는 새로운 기치에도 불구하고 조잡한 기계만을 가지고 있던 흥한비스코스공장은 결국 몰락을 맞게 된다. 일제 식민지하에서나 통했던 낡은 매판자본가적 자본운동이 오늘에 와서는 부적합함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자본주의에 있어서 박흥식의 자본운동 양상은 비록 약간의 구체적인 특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다 하겠다.
■ 박현채(조선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