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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친일만주군장교 조선의용군 소멸 토벌,5.16쿠데타,부산마산항쟁,6.3항쟁,YH사건,언론장악,하나회,지역감정조장,선거조작,대북 밀사를 통해 북한에 돈을 갖다주고등
◎부마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한민국의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시위인파는 5만명으로 불어났다. 폭발한 민심은 도심 곳곳에서 방화를 일으켰고
공공건물에 대한 습격은 이튿날도 계속됐다. 파출소와 공화당 지부 사무실은 시위대의 집중 타격 대상이었다.
10.16-11개 파출소 파괴, 방화
10.17-21개 파출소 파괴, 경찰차 6대 전소
부마항쟁에 구속자 1500여명 가운데 학생은 수십명에 불과했다.
폭력적인 공권력을 앞세운 계엄령 앞에 결국 부마항쟁은 막을 내렸다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은 대규모인명살상을 모의하고 있다가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한다. 박정희에 의해 무고하게 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은 뒷전으로 밀리고 순교자 이미지가 덧씌워졌습니다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김영삼의 짓이라고 믿었고 전두환 노태우는 광주항쟁을 김대중대통령에게 덮어 쒸우고 사형선고를 하죠
반면 전두환은 광주에서 5.18로 인명살상을 현실화하고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려고 전두환우상화가 이뤄져왔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부마항쟁은 살인미수 그쳤지만 광주항쟁은 아무 방해없이 살인 범죄행위로 이어져 법의 심판을 받아 전직대통령자격을 상실했습니다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부마항쟁의 심각성을 보고하자
박정희는 역정을 냈다.
"앞으로 부마사태 같은 것이 있으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
차지철도 박정희를 거든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20여 발의 총소리와 함께 숨졌다.
'독재자' 박정희 죽었는데도 세상을 못 바꾼 이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67144&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와 차지철을 쏘았는가?
http://danbis.net/8105?srchid=BR1http%3A%2F%2Fdanbis.net%2F8105
◎박정희 5.16군사쿠데타 주역 박정희 군관학교 선후배들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3년에 전두환불러 박정희가 전두환회장으로 하여 노태우 김보성등 경상도지역군인중심으로 구성된`하나회` 만든다
(운영원칙 충격적이라고한다 막가파와비교되기도했다) 하나회에서 대통령2명 안기부장4명 경호실장4명이 당선되기도 하였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32727
하나회명단일부
http://blog.naver.com/ksijk/130022724338
제2의 하나회 영포회를 아십니까
http://cafe.daum.net/parkgunhye/U8YZ/402129?docid=nqKg|U8YZ|402129|20100705102250&q=%C7%CF%B3%AA%C8%B8+%B8%ED%B4%DC
◎대한민국최조로 지역감정조장한 사람은 박정희
호남에서 국회의원을 계속 낙방했서 겨우 강원도에서 초선이 된 김대중대과 1971년 정권연장하려던
박정희는 정권 연장을 위해 돈을 써도 이기기 힘든것을 알고 영남은 영남사람을 뽑아야 지역경제가발전한다는
논리와 영남에 가서 '호남향우회'여 뭉치자 도발 플렌카드를 영남 지방에 유입시켜 '영남향우회' 도발 하여 지역감정이 터지게하고
부정선거로 투표를 조작해서 고전 끝에 김대중 후보어렵사리 94만 표 차이로승리를 거둬죠
김대중를 납치하여 바다에 수장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김일성과 박정희
1971년 9월 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100분 토론때 시민논객이 한나라당 공성진의원에게 박정희 시절 대북 밀사 예로 들면서
"냉전시절에도 북한에 밀사를 보내 국민을 안심시켰다' 라고 말하니까
공성진의원이 "그 밀사가 돈 갔다줬다" 대답했다
MBC다큐`이제는 말할수 있다` 김일성 남한에서 '김일성 가짜설'을 본격화시킨 인물은 박정희
http://cafe.daum.net/unlicensedurimal/1aqU/3?docid=C7Pl|1aqU|3|20020203150755&q=%C0%CC%C1%A6%B4%C2%20%B8%BB%C7%D2%BC%F6%20%C0%D6%B4%D9%20%B1%E8%C0%CF%BC%BA&srchid=CCBC7Pl|1aqU|3|20020203150755
◎박정희 경제
*긍정적인면
1.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건설비용이 1년 국가예산보다 많았다.일본이 주도한 아시아개발기금이 원조하는 자금을 바탕으로 착공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역사였다.
2.섬유라든가 합판 가발 등을 수출하면서 우리 경제의 잠재력을 일깨운 것.
3.60년대 말부터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등 네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과잉·중복투자로 국가 경제를 주름지게 했지만, 기간산업을 구축하고 우리 경제가 세계적 경제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된 것
*부정적인면
1.가장 큰 문제는 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 형성
(재벌과 불법공생관계를 형성한 것. 권력은 재벌에 각종 인·허가상 특혜를 비롯해 금융·차관·세제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권력과 재벌의 유착이라는 불법구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 그 정당성 없는 지배계층이 지금까지 사회·경제·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지배구조라는, 역사발전의 큰 걸림돌을 만듬)
2.빈부격차
(정경유착 테두리에서 돈을 마구 뿌리고 고속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부동산 값이 폭등했어요. 권력의 특혜를 받은 계층은 부동산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
부동산 값은 일반 물가보다 몇 배 상승, 지배계층은 그걸 이권으로 삼았고 증권시장도 비슷한 성향을 띠어 부동산과 증권시장이 지하경제의
온상이 된 것은 고속성장의 큰 부작용)
3.재벌을 집중지원해 경제성장
(재벌을 집중지원해 경제성장 정책을 펴다보니 일반 중소기업이 빈사상태에 빠진 져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직적 주종관계가 돼버었다
중소기업은 산업의 풀뿌리로 상품 개발과 기술력 향상을 통해 경쟁력의 저변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재벌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해 산업발전에 엄청난 불균형이 생겼다 각종 인·허가 특혜를 받은 대기업이 조금씩 대주는 걸로 연명하다보니 자생적 기술이나 상품을 가지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4.조립수출산업 위주로 산업이 발전
(외국에서 부품과 기계를 사들여 조립해 만든 상품이 주종을 이루다보니 수출로 해외에서 돈을 벌어와 봐야 부품값 갚고 기계값이나 기술료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진짜 이익인 부가가치는 뺏기고 조금씩 던져주는 먹이나 얻어먹고 사는 가마우지 경제를 만든 겁니다. 자생적 경쟁력의 기반이 처음부터 형성되지
않는다)
5.지역격차
(대개 동쪽에서 집권세력이 나오다 보니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 그 결과 동서간 경제력 격차가 커지고 그것이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요인
지배계층은 그것을 또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경제의 동서분단선을 만든 겁니다. 그에 따른 사회갈등이 선거 때마다 극단의 형태로 표출되면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골이 깊어진 것)
6.도시 농촌간 격차
(재벌들에게는 한국은행을 독촉해 돈을 지원해주면서 농촌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지원엔 인색 지배자들의 횡포였다. 그렇지 않아도 산업화과정에는 농촌경제가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인위적으로 육성하고 발전시키지는 못할지언정 거꾸로 황폐화를 가속시켰. 농촌 사람들이 안 되겠다 싶어 다 도시권으로 옮겨가면서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는 비대해지고 농촌은 황폐해지는, 기형적이고 비효율적인 국토발전)
7.관료주의 확대
(독재권력을 장기간 유지하려다 보니 입법부 기능을 축소하고 사법부를 마비시켜야 했다. 반면 행정부는 굉장히 비대 사회를 지배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기업들을 길들이기 위해 엄청난 규제가 양산 관료주의가 엄청난 힘을 갖고 경제를 지배하다 보니 정부와 유착하지 못한 기업은 아예 발전 대열에
진입도 못하게 됐다. 말만 시장경제지, 사실은 관치경제였다)
8.빚경제
(정부로부터 금융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다들 자기 돈이 아닌 은행돈으로 사업을 벌이다 보니 부채비율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특정 기업이 좀 어려워지면 그때마다 한국은행 돈 풀어 구제해줬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좋은 기업이란 시장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물건 판 돈으로 스스로
발전하는 기업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돼야 하는데, 거꾸로 됐다. 금융특혜를 받은 부실기업에 자꾸 돈을 대주니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부실이 확대 재생산됐다. 기업들을 빚 먹고 사는 공룡으로 만든 것. 외국 차관도 끌어다 그런 기업에 대주고. 기업들이 시장에서 평가받고 스스로
자본을 축적해 투자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돈 대줘 발전하는 기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다 보니 산업구조가 매우 취약해졌다. 위험도도 높아졌다.)
9.부패공화국
(정경유착에 따라 재벌과 권력층이 경제를 독식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경제가 희생됐다. 관료주의가 확대되고 규제가 양산되다 보니 뇌물이 판치는 비리구조가
위에서부터 형성됐고 그 영향이 민간부문에도 미쳤다)
박정희시절은 미국이 역사상 가장 경제적 활황을 이루던 시기였고,
미국의 지원으로 그당시 중국과 접하고 있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 등이
동반 성장을 하던 시기였고 대일경협차관과, 베트남 전쟁, 독일파견근로자, 독일간호사, 독일광산, 중동노동자들등 국민이 피땀흘려 벌어들인 돈으로 정부로 부터
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자기돈이 아닌 은행돈으로 필요할때 사용하여 기업발전해 산업구조가 매우 취약해졌고 불균형지역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동시에
노조나 노동3권 같은 것은 말만 꺼내도 빨갱이로 몰아 폭압의 사슬과 함께, 저임금 노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국가부도낸 박정희을 근대화 아버지로 추앙
http://www.youtube.com/watch?v=qetnoqBR7zs&NR=1
◎'친일사전' 속 일본군 장교 출신박정희 친일행적 무엇이 담겼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언론인 장지연 등 식민지 시절 일제에 협력한 인물 4천 389명의 행각이 담긴 ‘친일인명사전’이 8일 공개됐다.
특히 사회 지도층 인사와 문화 예술인들이 대거 거론되고, 독립유공자까지 포함돼 적지 않은 파장이 일고 있다.
사전에서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부분을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자)을 인용해 기술했다.
당시 신문에는 “그가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할 당시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넣은 군관지원 편지를 제출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박 전 대통령이 소개됐다.
사전은 또 박 전 대통령이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에는 만주국에 소속돼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일본 육사 졸업당시 수석차지 대표 선서도 했다 일본64 57기 졸업
대구에는 황국신민교육기관이 들어서서 일제 앞잡이들을 양산해냈으며,박정희도 그 사범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문경의 황민화
교육기관의 교사로 약 2년간 재직하기도 하였다
만주군 제8단 임무내용
팔로군하고 조선 의용대 있는 팔로군 소멸하고 토벌하는 일을 했다
박정희가 갔을때 제일 토벌 많이 할때 계급이 일본군장교 특징 를 생각한다면
군최고 통솔기본이 충성입니다
훈장도 많이 받았다고 하던데 많은 사람을 죽였을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친일행적 9가지
http://blog.naver.com/lhtoo/120004918485
박정희 - 친일행적의 분명한 증거 동영상자료
http://cafe.daum.net/hjl9308/JFOD/177?docid=1GwTU|JFOD|177|20100812200417&q=%B9%DA%C1%A4%C8%F1%20%C4%A3%C0%CF%C7%E0%C0%FB&srchid=CCB1GwTU|JFOD|177|20100812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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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우리가 남이가는 이제 그만해요ㅜㅜ
그의 딸이 국가의 수장이 된다는건 정말 말이 안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