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성현과 불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고 이 법문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법문은 중하 근성의 사람에게 매우 유효하고, 상근기의 지혜가 날카로운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상근기의 지혜가 날카로운 사람은
통상적으로 심성의 이론상에 치우치고, 뒤쪽에서 두 마디 말로 잘 설득하고 있습니다. "심성을 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인과를 버리지않는다(善者必不果)."이는 상근기의 지혜가 예리한 사람에 대해 한 말입니다. 그래서 상근기의 사람은 믿지 않음이 없고, 그의 신심은 중하근성의 사람보다 훨씬 견고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이치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수행은 반드시 여법합니다.
「대각구경진공실상 철저진원갱무차장지위」「대각」은 부처를 가리킵니다. 「구」는 궁구이고,「경」은 필경, 원만의 뜻입니다. 진공실상의 이체에 대해 「근원을 철저히 깊이 캐어 막아서 장애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대각입니다. 이는 대승의 불과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범부불각오 성문자각불각타 보살자각각타 단공행미원만但功行未圓滿。」이는 부처·범부·소승보살이 다른 이유를 설명합니다. 「유제불여내자각각타개원만惟諸佛如來自覺覺他皆圓滿 고독칭지위대각 세존내불지존호世尊乃佛之尊號이불구만덕佛具足萬德 위일체세계소존봉爲一切世界所尊奉 고왈세존」부처님께서는 구경원만의 대각을 얻어 일체세간의 존경대상입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큰 지혜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두루 일체상중하 근기를 치지致知성의정하는 대법수신(修身하게 하는 곧 인과를 깊이 믿고 악을 끊고 선을 닦는 법문입니다.
그러나 세간의 지혜로운 사람은 인과응보가 자신을 구속한다고 두려워하여 상에 집착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해탈하지 못한다 말하며),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방어하려고 인과응보는 아득하고 막연하다고 말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이 견지하는 변명은 실제로는 모두 자신의 단점을 두둔하는 일종의 조소를 면하기 위한 말이다.) 이러한 두 부류 사람을 제외하면 누가 인과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사람은 괴로워하면서 부끄럽고 창피해 할 줄 모를 뿐이다. 부끄러워할 줄 알면 곧 감히 잘못을 감싸지 않고, 창피해할 줄 알면 곧 그럭저럭 지내지 않는다. 부끄러워하고 창피해하는 마음이 있으면 곧 그 사람은 도에 들어가는 인연이 된다.)
이는 저 선근이 없고 인과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인과를 깊이 말하든 쉽게 말하든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우리 자신과 상관이 없는지, 거꾸로 물어야 합니다. 그가 그의 부처가 되든지, 그의 지옥에 떨어지든지 나와 무관합니다. 문제는 자신은 어떠한가? 입니다. 이래야 부처님께서 제도 · 교화하시는 진정으로 중요한 점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 경론은 반드시 나 한 사람을 위해 말씀하신 것이고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은 나 한 사람이 닦도록 가르치신 것이지 다른 사람과 상관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직하승당(承 현재의 자리에서 깨침)하여야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업을 짓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직하에 승당할 수 없으면 늘 어떤 사람이 계율을 깨뜨렸고 어떤 사람이 나쁜 일을 하였는지 보입니다. 당신 입으로 이런 말을 하면 이는 곧 입으로 짓는 악업입니다. 당신 마음에 이런 생각이 움직이면 마음으로 짓는 악업입니다. 바깥 경계가 움직이면 그 속에서 악업을 짓는 것을 미혹)이라 합니다. 이는 깨닫지 못함입니다. 반드시 바깥이 선이든지 악이든 우리와 상관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응당 어떠해야 하는가? 「여여부동如如하고 요요분명分明」하여야 합니다. 또렷하고 분명하면 미혹하지 않고, 여여부동하면 업을짓지 않습니다. 마음이 청정하여 물들지 않고, 바깥 경계에 따라 동요하지 말아야 수행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마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점검하고 반성하여야 합니다.
광혜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른바 광혜는 대부분 세간의 총명지혜를 가진 사람, 세지변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한 부류의 사람은 부처님의 경전에 대해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는 철학이고 매우 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계율을 말하면 공자의 예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계율은 예교보다 여전히 엄격합니다. 이는 시의에 맞지 않은 생활 교조로 굳이 그것을 배울필요가 있는가? 그것의 이론을 배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매우 많은데, 언제나 자신을 총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계율이 3천 년 전에 제정된 외국인의 생활규범일 뿐 우리가 궂이 준수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합니다. 삼대의 예절이 모두 같지 않은데, 하물며 외국의 옛 예절이겠습니까? 우리는 현대인인데, 굳이 고대의 예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까? 현재인이 보기에 최상의 경례는 허리를 굽혀 세 번 절하는것인데, 굳이 여전히 무릎을 꿇고 정례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것이 곧 광자입니다. 계율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저 계율을 지키는 사람을 상에 집착한다고 말합니다. 《금강경>에서는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상을 여의고 수행하여야 하는데, 굳이 계율에 집착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은 계율의 상아래 죽음입니다. 진정으로 계율의 상 아래 죽음이 있습니까? 정말 있습니다! 없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사람에 대해 꼭 완전히 상에 집착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는 여전히 매우 고상하고 현명한 사람이 있어 상에 집착하지 않고 일체 선을 닦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는 고불이 다시 온 사람이 매우 많고 절대 다수는모두 명심견성明心見性한 사람인데, 왜 계율 상에서 지나치게 따져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공연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우리는 여전히 명심견성하지 못한 채 상에 집착하여도 가까운 장래에 이로운 점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십시오." 설사 성불하고 조사가 될 수없을지라도 절대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악한 과보를 받지 않으니, 이는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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