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 밖 우리집 첩첩 산 넘어 아득한데
가고 싶은 마음 늘 꿈속까지 가득하네
한송정 하늘과 물에는 둥근 달 떠 있고
경포대에는 한바탕 바람이 불고 있으리
바닷가 모래밭에는 갈매기들 모였다 흩어지고
수평선 위에는 고깃배들 이리 가고 저리 오리
언제 고향길 다시 밟아
비단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곁에서 바느질할꼬
위의 시는 연산군 10년인 1504년(10월29일)에 태어나 명종 6년인 1551년에 세상을 떠난 신사임당의 〈사친(思親)〉 전문이다. 아쉬운 것은 이 한글 시가 원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사임당이 창작한 한시 원문은 아래와 같다.
千里家山萬疊峰 천리가산만첩봉
歸心長在夢魂中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雙輪月 한송정반쌍륜월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사상백구항취산
波頭漁艇每西東 파두어정매서동
何時重踏臨瀛路 하시중답임영로
綵舞斑衣膝下縫 채무반의슬하봉
제목의 ‘친할 親’은 어버이를 가리킨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가깝게 여기는 사람이 부모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사이는 1촌이 되고, 형제자매는 2촌이 된다. 나를 기준으로 할 때 아버지의 형제들인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3촌이 되고, 어머니의 형제들이 외3촌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친은 부모를 생각한다는 뜻이니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다. 신사임당은 한송정, 경포대, 동해 바다 수평선, 고기잡이 배, 모래밭, 갈매기, 달, 바람 등을 통해 고향을 떠올린다.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꿈속에까지 그곳의 풍경이 나타나고, 한송정에서 본 하늘의 달과 그 달이 물에 비친 정경까지 세세히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가 고향의 자연과 풍경을 떠올린 것은 그 자체에 대한 애잔한 감정에서가 아니라 그곳에 어버이가 계시는 까닭이다. 즉 서경시가 아니라 서정시인 까닭에 〈사친〉이 읽는 이의 가슴에 감동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경치만 읊으면 일반화되기가 어렵다. 구체적으로 거명된 한송정과 경포대는 신사임당의 고향일 뿐 독자의 고향은 아니다. 하지만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아흔 부모가 보기에는 일흔 자식도 어린 아이’라는 속담처럼, 나이가 든 아들딸도 ‘비단 색동옷 입고’ 연로한 부모를 만나고 싶다.
신사임당의 시는 〈사친〉, 〈유대관령망친정시(踰大關嶺望親庭詩)〉 두 편과 2행만 남아 있는 ‘낙구(落句)’가 전한다. 남아 있는 시의 편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신사임당은 본래가 시인이라기보다는 포도, 산수, 풀벌레 그림에서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올랐던 화가이다. 그는 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후대인에게 익히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그를 간결하게 잘 소개해주는 문장으로는 묘소 앞 안내판의 글을 들 수 있다.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의 뛰어난 여류 서화가(書畵家)였으며, 사임당은 당호(堂號)로서 그 뜻은 당시 최고의 여상상인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은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7살에 이미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본보기로 삼아 배웠다고 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썼으며, 한시 역시 잘 지었다.
신사임당은 유학의 대가 이이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로서, 그리고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가로서 조선 시대 대표적인 여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사임당이 남긴 작품과 유품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오죽헌 경내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 ‘파주 이이 유적’ 경내에 각각 설립되어 있는 율곡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165호인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이율곡이 태어난 집이고, 사적 525호인 ‘파주 이이 유적’은 자운서원 등으로 구성된 율곡의 본가 마을 일대 문화유산이다. ‘파주 이이 유적’ 경내에는 신사임당의 묘소도 있다.
이 글은 현진건학교가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수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