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4. 성시간과 함께하는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저녁미사
♣ 최상훈 티모테오 주임신부님 강론말씀 ♣
독서는 계속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껴서 자기가 가장 사랑했고 좋아했던 티모테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게 티모테오 후서 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는 고난을 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그 고난을 견디어내라고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고통은 세상에 왜 존재하는 걸까요?
더군다나 열심한 사람,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마음 안에 분심이 생깁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저 올바른 사람에게 왜 고통을 당하게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어지럽힙니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되었는데 참 세상에는 특이한 병도 많습니다.
이런 병이 있습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 선천적으로 무통, 무반증, 영어로는 패인리스(painless) 라는 병입니다.
머리에 돌멩이가 떨어져서 피가 흘러도 아픈 줄 모릅니다.
뜨거운 물이 발에 쏟아졌는데도 뜨거운 줄 모릅니다.
그 사람이 잘 참아서가 아니라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 의학계에서는 현대 의학으로서는 치료 방법이 별로 없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픈 것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울지 않게 되고, 더 무서운 것은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지금 위험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서양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가끔 빵 대신 벽돌을 주신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그 벽돌을 발로 차서 발가락이 부러집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벽돌로 집의 주춧돌이 되어서 자기 집을 완성합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신 분이 고통을 받으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왜 그는 십자가를 지셨을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분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인간 삶의 필수불가결한 그림자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고통도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고통을 나의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함께 지고 함께 걸어가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그 예수님은 지금도 골고타를 오르고 계십니다.
인생에서 고통 없이 살아가는 것은 딱 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우리가 고통 없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죽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티모테오 후서 2장 11절,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
고통의 문제는 주님과 함께 견디어 내는 것, 그러면 우리는 놀라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독서를 복음에 비추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은 오늘 복음의 잣대로 바라보면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나의 고통을 통해서 사랑하는 법도 배워 나갑니다.
제가 처음에 물었죠.
세상에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나에게는 그런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는 암 같은 그런 무서운 질병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다는 것은 죽으면 가능합니다.
내 삶 안에서 다가오는 어쩔 수 없는 그 고통은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고, 그 고통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아멘.
** 주임신부님의 강론 내용과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을 수 있습니다. 양지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