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 은은하고 따뜻한 조명이 있는 술집에 눈길이 간다. 이자카야 술집이다. 다른 가게는 문을 닫는 시간인데 돌아 올 때 보니 이 곳의 빈 자리는 오히려 줄어 있다. 주택가 술집이기에 이상(異常)한 일이지만 늦은 시간 편안한 만남을 갖기에 이상(理想)적인 곳인가 싶다. 간판을 보니 이상(李上)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대표 본인의 성과 항상 위를 보며 달리자는 뜻에서 이상이란다.
아이들를 앞세우고 들어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아내와 난 입맛만 다신다. 눈으로 만족하고 끝내라고 타일러 보지만 입과 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저 문을 내 손으로 밀고 들어가는 날이 곧 아이들로부터 해방되는 날이라는 생각에 미치면 더욱 매력적이다.
레몬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침이 고이듯, 산책길의 반복적인 학습에 이자카야 이상은 우리 부부에게도 이상적인 곳이 되어 버렸다. 술집 안을 기웃거렸더니 안의 손님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래! 지금은 아이들 모두 재우고 간접 조명만 따뜻하게 남겨진 부엌 식탁에 앉아 아내와 야채곱창에 소맥 한잔 걸치는 것이다. 이자카야 이상을 향하는 시선은 비우고 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채우는 것이다. 그렇게 매듭을 짓고 또 움직여야 한다. 대신 이자카야 이상은 나를 달리게 하는 동기로 잊지 않으면 된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이상이라는 필명은 절친인 구본웅이 선물한 사생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눈빛이 반짝거릴 만큼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김해경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이다. 김해경은 선물에 감격해 하며, 자기 아호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상'자를 넣고, 아호와 필명을 함께 쓸 수 있게 호의 첫 자는 흔한 성씨를 쓰되 상자가 나무로 되어 있으니 나무 목자가 들어간 이(李)씨 성을 택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김해경이 경성고공 재학 시절 건축 현장에 실습 나갔을 때 일본인들이 그의 성을 "이씨"로 잘못 알고 "李さん(리상)"이라고 부르던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모두 사실 같다. 그는 이상 아닌가?
김해경은 건축과 출신이다. 건축가로서 이상을 다룬 글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이상(理想)은 건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는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직으로 현장 공사를 직접 감독하는 삶을 한동안 지켰다. 온갖 이슈를 몰고 다니는 모더니스트였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한 부모님께 용돈을 충분히 드리지 못해 고민하는 맏아들이었다. 건축이라는 직업은 먹고 살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건축 역시 총체 예술이라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결정일 수 있다.
김해경은 꿈과 현실에 대한 갈등을 겪었지만, 삶의 어느 시점에 흔들림 없이 매듭을 지었다. 그가 흔들림이 없었다는 것은 건축과를 수재로 졸업했다는 것과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건축 현장을 지켰다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건축이라는 소재를 그의 작품을 살찌우는 요소로까지 승화시켰다. 리메이크 한번 했으면 하는 '건축무한육각면체의 비밀'이라는 영화도 이상의 시를 주제로 한 영화다. 대신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이상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고,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이상한 것이라고 외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우리도 어느 시점엔 흔들림 없이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것은 비워 할 것을 비우고, 채워야 할 것을 채운 시점이다. 나를 보듬었던 노력으로 삶의 균형을 얘기할 수 있는 시점이다. 매듭을 짓지 못해 균형의 추가 역방향으로 기울면 다시 어려움에 직면한다.
이상은 작품 속에서 자신을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이라고 하였다. 그런 좌절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매듭을 지었다. 이상을 생각하는 날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느낌에 빠진다. 겉만 핥는 것도 버겁다는 생각이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끊임없는 도전을 생각한다. 나 역시 어느 시점에 매듭을 짓지 않으면 내일이 힘들다. 오늘의 글쓰기는 이상(以上)이다.
첫댓글 이상의 본명을 처음 알게되었네요. ㅡ.,ㅡ
86일째 전체글과 87일째 초입글이 겹치는데, 이 글은 86일째 쓰려던 건가요..? ㅎㅎ
오호... 새로운 시도인가요? 동일한 단어를 여러 의미로 사용하며 글을 만들어보기?
이상은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이자카야 이상을 보면서 intro는 저걸로 해야지 싶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