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사랑의 영혼 엠마누엘>의 본문의 일부를 소개하고 관련 블로그를 하단에 추가합니다.
읽어보시고 괜찮으시면 주우선생님께서 곧 제본작업을 하신다고 하니 그때 주문하시기 바랍니다.
--- 책 본문 중 ----
지구의 차원은 그대 존재의 시작도 끝도 아닌 하나의 단계, 하나의 배움터일 뿐 나의 친구들이여, 그대들이 이 순간도 영원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는지, 그대들이 자신의 물질 세계 속에서 얼마나 환히 빛나고 있는지 ,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러한 계획이 얼마나 아름답게 "짜여져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드리지요, 신의 계획 속에서는 외로운 영혼도 길 잃은 영혼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햇빛을 가로막는 그늘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 세상이 완벽한 곳이라면 영혼은 그 어디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
이 세상의 한계들에 부딪칠 때, 그대여, 눈물짖지 마십시오. 그것들도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는 것이니. 이 불완전한 세계가 아니라면 그 어디서 배울 기회가 있겠습니까 ? 삶의 능력이 모자라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그대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영혼들이 세세하고 정확하게 학습과정을 선정하여 찾아온 곳이니 임시로 머무는 장소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 왜 우리는 일찍이 신의 합일을 떠났던 건가요?
신과의 분리는 사랑 여행의 시작입니다. 개별화된 의식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보다 큰 빛과 이해를 얻으며 다시금 합일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앎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합일의 실재에 보탬이 되는 것은 일체가 끊임없이 확장되고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공부입니다. 그대는 무엇에 최선을 다합니까? 그대에게 가장 큰 성취감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에 그대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대의 가슴이 성취를 향한 길로, 신의 구원 계획에서 그대가 맡은 역할로, 그대를 인도할 것입니다.
신의 왕국에는 목적의 추구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있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있음에는 정지된 것이 없죠. 있음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창조성, 성장, 움직임이 용솟음치는 상태입니다. 신의 우주에서는 아무것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신 의식 조차도 예외일 수 없지요. 그러기에 배움은 참으로 영원한 것입니다. 진정 놀랍고 기이하지 않습니까?
아주 미세한 변화라 할지라도 고요한 호수에 떨어진 조약돌과 같아서 끝없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질문)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삶의 모든 것들은 의식확장이란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을 추호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전 존재가 빛이 될 때까지 꾸준히 자기 자신을 빛으로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더딘 작업입니다. 한 달 전과 똑 같은 곳에 서 있다고 느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달의 삶을 더 경험한 만큼 깨우침도 그 전에 비해서 더 늘어나는 것이죠. 그러나 이 말은 낙담하지 말라는 뜻이지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할수록 성장도 한층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의 진화가 덜 된 부분들도 존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지나간 일들을 속삭여 줍니다. 그 부분들은 혼란과 미완성을, 신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고통을, 다시 유일자에게로 돌아가려는 그의 갈망을, 소곤소곤 얘기해 줍니다.
(질문) 어떻게 하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고통스런 상황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우선 그들을 천벌이 아닌 가르침으로 보아야 합니다.
친구 여러분, 삶을 신뢰하십시오. 아무리 빗나간 삶이라 하더라도 그 여행은 꼭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대는 경험의 지대에서 어느 부분이 올바르며 어느 부분이 왜곡되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한없이 드넓은 대지를 가로질러 왔습니다. 이후로 그대는 더욱 참신해지고 현명해져서 영혼의 자아에게로 고향이 한가운데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삶 속에서 그 어떠한 부수적인 목표가 생긴다 하더라도 참된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자아를 신과 하나 되게 하려는 영혼의 대장정일 뿐이지요. 마음을 편히 갖고 빛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며 일체가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신리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그대들의 영혼을 위협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삶의 경험은 실제로 그대의 자각을 더욱 고양시킵니다. 영혼의 성숙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없는 셈이죠.
그대의 인생은 그대 스스로 만들어 왔습니다. 그대의 바깥에 있는 그 어떠한 것도 그대에게 낯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자신의 바깥 현실 속에서 모르는 것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자기 주변의 바깥 환경에서 자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믿어서 나타낸 것들을 확인할 때 인간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대는 사명이 완수될 때까지, 공부가 무르익을 때까지 지상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이후 우리 모두는 다시금 신의 이름으로 또 다른 차원에서 창조를 시작할 것입니다.
- 환생
여행 전체의 목적은 진리를 발견하고 좀더 현명해진 모습으로 진리에게 돌아가 좀더 훌륭하게 진리를 섬기고 궁극적으로는 진리 자체가 되기 위함입니다. 바로 환생 자체가 다시금 빛과 하나 되고자 하는 영혼의 간절한 소망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지요.
자각이 깊어질수록 인과응보가 신속하게 나타나며 종내에는 그 운명의 저울질이 즉각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다 결국 인과응보 자체도 없어지며 오직 진리만이 남게 되지요.
(질문) 환생은 어떻게 결정됩니까?
영혼이 다시 인간이 되기를 고려해 볼 정도로 충분한 자각을 갖추게 되면 수많은 운명의 수레바퀴들이 돌기 시작하죠. 몸을 부여받기 전에 영혼이 가진 욕망과 욕구들의 모든 측면이 주의깊게 연구됩니다. 누구에 의해서냐구요? 바로 영혼 그 자신과, 교사, 동료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육체를 입지 않은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인생의 목적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기에 영혼 설계도의 온갖 양식들이 위애한 창조성에 따라 계획적인 인간의 탄생 속에서 구체화됩니다. 시대, 문화, 성, 종족, 가족, 그리고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능력들이 정해집니다. 이는 피자를 주문하듯 임의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청사진으로 정확하게 계획되는 것입니다.
(질문) 영혼은 인간이 사는 지구 같은 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의 환생을 선택할 수 있나요?
물질적인 지구가 필요한 동안 영혼은 이곳에 머무를 것입니다. 잘 들어두십시오. 이곳은 초급반이 아닙니다. 그대는 지구에 오기 전에 이미 다른 학급들을 거쳐왔던 것입니다.
환생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영혼이 자각했을 때 지구는 선택의 대상이 됩니다. 그대는 인간 세상의 이원성도 특별히 영혼이 선택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 지상에 오려는 영혼은 선택해야 하며 윤회전생을 끝마치는 영혼도 분명 궁극적인 선택의 순간에 마주쳐야 합니다.
(질문) 600만의 영혼은 대학살을 경험하기 위해 탄생하기로 결정했을까요?
환생의 문을 열면 많은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은 물론 남들도 가르친다는 것이죠. 인생이 이 일을 다 충족시키도록 설계되어있다면 그 인생의 목적과 사명도 그야말로 숭고해 집니다. 고귀한 지혜는 그런 사람들을 탄생기킴으로써 ‘자, 이제 그런 삶이 필요하다.’고 선언하는 셈이지요.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면서도 개인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길도 선택 사항입니다. 그 누구도 그런 일을 우연히 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모종의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됨으로써 자기 자신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런 필요성을 가늠해 봅니다.
(질문) 털끝만치도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인 상황에서도 배울 수 있단 말인가요?
인간은 배울 수 없을지라도 영혼은 배울 수 있습니다.
(질문) 영혼들의 환생은 단번에 전체적으로 일어납니까? 아니면 개인마다 다르게 일어납니까?
그 시기는 개개인마다 다릅니다. 영원하고 끝도 모를 데까지 확장해 가는 신의 전체적인 합일성 속에서 모두가 단 한번에 폭발적으로 환생할 수는 없습니다. 개개의 영혼은 독자적인 구도의 길에서 제 자신의 시간표를 짜게 됩니다. 개개의 의식은 확장하고 탐험하며 분열되고 생성되면서도 언제나 돌아갈 기회를 가늠하며 처신합니다.
(질문) 새로운 영혼들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의식은 제 스스로 나뉘고 또 나뉨으로써 자기 자신을 표현합니다. 의식은 나뉘어지다가 더 이상 성장이나 확장된 자각을 얻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다시 합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의 영혼이 되는 거죠. (질문) 업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는 업은 바꿀 수 있는 소재를 의미할 뿐입니다. 업은 장부정리를 하듯이 청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조금씩 있게 마련이죠. 또한 인간적인 경험이 필요없는 부분도 있답니다. 그러므로 업이란 스스로 공부해 나가는 학습방식입니다.
업이란 그대가 아직도 진리 안에 있지 못한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기 위해 현생에서 마주치기로 선택한 일련의 상황들입니다. 그대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그대 스스로 만든 것이죠. 그대가 자청하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답니다. 현명하고 의식있는 영혼의 내적인 욕망은 내면에서 참이라 믿어지는 것으로 유형의 현상으로 창조해 냅니다. 영혼은 이러한 내면이 외면화를 통하여 자신의 믿음대로 경험을 얻는 것이죠. 그리고 바로 그 경험을 통하여 변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질문) 잘못되거나 몰인정한 일을 저지르면 어떻게 되지요? 그것들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하나요?
그대가 여기 있는 것은 대가를 치르거나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대는 성장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스스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업보에서 풀려나게 되죠. 신 의식의 섭리에서는 필요치 않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꽃이 피어나는 것은 오래 전에 정원을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뿌려진 씨앗들은 자신들을 인정받기 위해 꽃으로 피어날 시기를 기다리지요. 그대는 주도면밀하게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옮겨심고, 키우며, 또 뿌리 뽑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현재 모습에서 원치 않는 것들은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하라고 나타나는 과거 실수들의 흔적들로 여기고 오히려 환영해야만 합니다.
(질문) 우리는 삶의 교과 과정의 진도보다 일찍 졸업할 수 있을까요 ?
어떠한 단계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만일 이것을 어기게 되면 두려움, 의심, 불신의 구멍이 뚫려 모든 것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유기적인 과정이 특정 과목의 생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죠. 분명 그대는 이런 불상사를 원치 않겠지요. 그대는 자신의 길을 찾을 것이며 그 길을 끝까지 쫓아갈 것입니다. 그대의 길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이죠. 그러니 알고 보면 이 세상은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대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을 보기 위해 온 것이잖습니까? 지금 있는 곳에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그대의 학업은 이곳을 변형시키는 것이지 이곳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 그리고 치유
병은 영혼으로부터 오는 메시지입니다. 다라서 그 가르침을 배우면 병은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게 되죠.
병은 특정한 영혼의 혼란이 육체적으로 나타나 제 자신을 의식에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 귀기울이십시오. 그것이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몸의 병든 부분이 되어 보십시오. 그래서 그 저항하는 부분의 목소리를 다 들었다면 성숙한 마음으로 ‘다른 길을 찾아보라’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내면의 비정상적인 에너지들을 마음의 것이든, 육체의 것이든, 감정의 것이든 모두 기꺼이 너그럽게 받아들이십시오. 바로 그 단순한 수용에 의해서 병의 동력원은 끊겨버립니다.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질문) 병도 업보에 의한 것입니까?
업보와 스트레스는 동일한 것입니다. 스트레스, 즉 병적인 요소는 그대가 영혼의 청사진에 따라 부조화의 영역으로 들어서기 위해 스스로 설계해 놓은 그대 자신의 시스템입니다. 이것을 업보라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실 이 단어는 이해보다 오해를 가중시킵니다.
병의 원인에 대한 진실을 알기만 하면 병을 곧 낫게 할 수 있습니다. 병이란 다름아닌 의식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항이 몸에 표현된 것이니까요.
생명력, 즉 영혼의 의식이 육체를 통하여 흐를 때, 영혼의 필요에 따라 특정한 시기가 되면 몸의 한구석이 그 흐름을 막아 스스로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질문) 왜 우리 중 어떤 이는 몸이 건강하고 어떤 이는 불구이거나 병에 걸리는 것일까요?
그대의 몸이 건강하다 하여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대도 과거에는 뒤틀린 불구의 육체에 주어진 운명의 기복에 대해 배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의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것입니까 ?
어떤 이들은 남향이거나 뒤에 연못이 있는 집을 사들이듯 유전적인 요소를 선택합니다. 그들은 해제 밸브 구실을 해줄 특정 질병의 발생 가능성이 있는 육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몸은 생명력의 일부 요소가 활동하지 않으려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 질병으로 반응하도록 설계된 것이지요.
(질문) 고통스런 관계를 끝낼 시기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고통을 충분히 겪었을 때 헤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그의 생애에서 또 다른 전환점을 찾았다고 해서 그대의 빛이 바래진다고 느낀다면 그대는 자기 자신의 특성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껏 그대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 온 것이요
(질문) 치료 불가능한 병은 없는고 하는데?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의 문제입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자신이 조건에 따라 주관이 가미된 것이니까요. 그대가 죽음을 일종의 치유로 볼 수 있을 만큼 현명하다면 실제로 만병통치약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둘 것은 이 육체를 떠날 때가 되면 튼튼하고 건강한 운동선수처럼 춤을 추다가도 심장이 멈춘다는 사실을, 물론 영혼이 떠날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육체는 저절로 낫습니다.
그대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의 힘을 알아야 합니다. 의지가 아닌 자유로워진 의식 그것은 육체를 재건하고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대들 중 어떤 이들은 평생 동안 치유자로 진화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치료되길 원치 않는 영혼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가정은 영적 성장을 위한 온실입니다.
가정 환경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깨우침과 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가족 제도가 세상의 설계에 포함된 것이죠.
한 가정에 태어난 어린애는 촉매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부모 안에 잠재된 미지의 속성들을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그 속성들은 자연히 자식의 영혼에게 전해집니다. 그 속성들은 영혼이 가져오는 은총의 일부가 되죠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신들 속에 있는 것들을 자식을 통하여 더욱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반짝반짝 빛나는 신의 거울로, 그들을 낳은 그대들의 거울로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그들 부모의 내적인 구조가 비치는 고통스런 반영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비쳐주는 모습 자체가 바로 부모들의 영혼의 성장 과정입니다. 아이들을 당연히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자유로이 키워야 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공부입니다. 그대는 무엇에 최선을 다합니까? 그대에게 가장 큰 성취감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 그것에 그대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대의 가슴이 성취를 향한 길로 신의 구원 계획에서 그대가 맡은 역할로 그대를 인도할 것입니다.
신의 왕국에는 목적의 추구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있음만이 , 존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있음에는 정지된 것이 없죠. 있음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창조성, 성장, 움직임이 용솟음치는 상태입니다. 신의 우주에서는 아무것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신 의식조차 예외일 수 없지요. 그러기에 배움은 참으로 영원한 것입니다. 진정 놀랍고 기이하지 않습니까 ?
아주 미세한 변화라 할지라도 고요한 호수에 떨어진 조약돌과 같아서 끝없는 파문을 일으킵니다.
----------------------------------------------------------- [출처] [빛과 사랑의 영혼 엠마누엘]|작성자 빛과사랑 [빛과 사랑의 영혼 엠마누엘] 진리를 찾아서 2006/08/23 18:27 http://blog.naver.com/yjh200012/70007646977
출처: 도서출판 은하문명
엠마누엘은 미국의 채널러 팻 로데가스트(Pat Rodegast)가 TM 명상과정에서 접하게 된 황금빛 존재이며, 그와 대화하며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는 영적존재이다. 엠마누엘의 메시지는 간결하면서도 인간계에서 육신쓰고 고뇌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쉽게 깨닫도록 청량제와도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두고 두고 반복해서 읽어도 너무 좋은 내용들이라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의 내용들의 출처는 원제 ‘Emmanuel’s Book’이며, 1991년 고려원 미디어에서 "빛과 사랑의 영혼 엠마누엘"이란 제목으로 번역,발행된 책 내용 가운데서 일부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 책은 절판되어 현재는 구할 수가 없으며 출판사도 문을 닫았다.
엠마누엘의 메시지(1)
미 하바드대학 심리학 교수 람다스는 엠마누엘의 메시지를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1. 엠마누엘은 어둠, 부정, 악(惡), 죄(罪)--- 등의 인간의 걱정거리들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육체를 지니고 태어난 자들의 필수 이수과목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영혼의 무자비함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인생을 감옥이 아닌 교실로, 싸움이 아닌 춤으로 바라볼 것을 권유한다.
2. 엠마누엘은 삶이나 죽음에서 겪게되는 어둠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소란, 의심, 혼돈, 위기, 분노, 절망, 고통들은 성장의 좋은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내면의 두려움과 어둠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그 관점을 왜곡하는 마음의 행로도 철저히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우주의 근원이 사랑이요 빛이며, 모든 경험은 이 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되살리는 구실을 한다고 외곬차게 역설한다.
3. 엠마누엘은 우리를 동료 영혼으로 대하면서 삶 속의 경험들이 우리의 창조적 선택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창조자(영혼)이며 동시에 창조물(육체,개성)이다. 그는 우리에게 스스로 창조한 것에 대한 창조자로서의 책임을 지라고 촉구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창조물과의 동일시에서 비롯되는 피해의식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4. 엠마누엘은 인간성의 부정을 수반하는 세속으로부터의 도피를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는 우리의 인간성(욕망, 집착 등등)이 오히려 신(神)의 진리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고 말하며, 삶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고귀한 진리를 찾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호탕하게 웃는 웃음 소리나 즐겁게 뛰노는 한 마리의 고양이 속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5. 엠마누엘과 함께하는 사람은 뭇 생명이 영위되는 방대한 진화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영혼을 분리라는 환상의 어둠 속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합일로 되돌려 보내는 창조력이 바로 신(神)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 그 자체로서 창조의 맥박의 일부가 되어 광대무변한 우주의 장식 직물(織物) 안에 수놓아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의 순간순간마다 적재적소에 가 있게 된다. 엠마누엘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재의 그대는 미래의 그대에 이르는 필수적인 단계이다." 또한 미래의 당신이 반드시 인간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는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영혼으로서의 의식을 다시금 일깨워 나가는 우리의 여정에서 시작도 끝도 아님을 상기시키고 있거니와 그 스스로가 이 사실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6. 엠마누엘은 어둠이 어떻게 해서 이성(理性)의 산물이 되는지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설명한다. 고귀한 지혜에 통하고 싶다면 판단하고 분별하며 대립하는 이성은 필연코 가슴과 직관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엠마누엘은 권고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보다 가슴이 영혼을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7. 엠마누엘의 말에 의하면 지구와 생태계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변동의 디자인 속에는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세상사의 혼돈과 의식부재도 포함된다. 그는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을 진정 무엇이 <더 좋은지>도 모르는 어린애들로 묘사한다. 정치인들 역시 인간 개개인에게 어느 정도 존재하는 사회적 병폐에 시달리고 있다. 즉 폭력은 탐욕에서, 탐욕은 두려움에서 나오는데, 이 두려움이야말로 사랑보다 강하다는 신앙이다. 이러한 암적인 잘못된 신앙 속에서는 약점과 자비로움이 한낱 나약하고 위험한 요소로 여겨진다. 그러나 엠마누엘은 인간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이 세상을 끝장낼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처럼 오만한 생각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학교는 일찍 파하지 않습니다. 종은 울리지 않을 겁니다."라고 외친다. 그는 우리에게 세속적인 세상과 관계를 끊지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수한 세월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8. 엠마누엘은 죽음에 대하여 저쪽 세계의 시각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언제, 어떻게) 죽는다는 것이 삶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태어나는 계획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란 걸 지적한다. 임종 순간에 대한 그의 묘사는 아주 매력적이다. 그것은 마치 <꽉죄는 신발을 벗는 듯한>, 그리고 <갑갑한 방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라고 우리를 안심시킨다.
9. 엠마누엘은 섹스, 낙태, 인간관계, 진리, 종교와 의식, 외계의 존재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종종 과장되고 애매모호한 이런 주제들을 명쾌하게 밝혀주어 활기차고 건설적인 시각을 갖게 해준다.
엠마누엘의 메시지(2)
1.《인간의 모험》
인생의 목적은 탐구, 모험, 배움, 즐거움,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발걸음
인간의 육신은 우주복과 같은 것
그대의 육체는 그대에게 구속, 궁극적인 고통과 죽음, 놀랍고도 절박한 궁핍, 끝없는 오염의 원천이 되는 자질구레한 것들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육체는 바로 영혼이 머무는 선택된 매개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은 우주복과 같아서 그대가 있는 곳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성(人性)을 통해서 신성(神性)을 깨닫습니다.
영성(靈性)과 인성은 서로 손을 잡고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성을 지지해 줄 기반이 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실재, 하나의 에너지, 하나의 지각(知覺)이 있을 뿐입니다. 마음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겪어야만 이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지요. 하지만 가슴은 이 진실을 무척이나 알고 싶어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어떤 것일까요? 그대가 신(神)에 속해 있어 영원하고 안전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영적 실재 안에서 그대는 이미 신과 하나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의 상황'은 천국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제한된 시야 안에서 물리적 형상으로 나타난 복제물일 뿐이죠. 인간이 겪는 경험들은 모두 영(靈)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상황은 바로 영의 상황을 정확히 비춰주는 거울이기에 인간의 상황은 사실상 축복입니다.
신성(神性)은 어디에나 있지요. 그러나 그 신성을 찾기 위해선 직접 연장을 잡고 일해야 합니다. 진흙이라고 하찮게 여긴다면 그 진흙을 만든 신성 에너지를 의심하는 것이죠.
그대의 교과서는 완전한 상태입니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인류는 성장을 위해 무엇인가를 더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가르침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가르침이란 필요없기 때문이죠. 영(靈)인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이미 그대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뿐입니다.
그대들은 사랑의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그대를 돕기 위해 여기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대들에게 무척 경탄하고 있답니다. 인간이 되어 본 적이 있는 우리들은 인생이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체험들이란 영혼이 알고파 하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상징들」
개개의 영혼은 내면의 빛에 대한 영혼의 의식적인 저항이 물질적으로 나타난 실재 속에 나타난 것이죠. 그러므로 그대여! 그대들이 겪는 온갖 인생살이 경험은 영혼의 갈망이나 그 갈망에 대한 반발이 겉으로 드러난 것들입니다. 몸을 입고 있는 모든 영혼들은 이 같은 부정성을 수반하기 마련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뛰어들다 보면 지각의 오류에 젖어들게 됩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환상(미망)이라고 하지요. 그대들이여, 이 환상을 진실로 착각한다면, 언제나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대는 생명의 창조주 그분의 시각으로 삶 속에 뛰어드십시오. 그리하여 삶 모두가 경이롭고 귀중한 배움의 터전임을 아십시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그대 자신이 도예공이었던 자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창조한 외적인 현실 속에서...
엠마누엘의 메시지(3)
(질문) 우리는 왜 이곳 지구에 있는 것일까요?
영혼은 본래의 하나로 되돌아가는 진화 과정 속에 있지요. 영혼이 현재의 의식 수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무수한 외적인 대상들 사이를 방황하다가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져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그대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기 위한 것, 바로 이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다시 인간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나왔겠습니까?
살아가며 종종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내가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 속에 있을 때는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는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나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친구들이여,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야말로 위대하고 영광스런 교실이자 그대의 의식이 진정으로 속한 곳이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이곳에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대들에게 고향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곳 지구는 바로 환상을 공부하는 교실입니다. 일시적인 것들에 영원한 실재성을 부여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목적했던 것을 배우면, 환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교과서를 남겨두고 갈 때는 다음 학급이 공부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남겨 두십시오. 환상의 목적을 안다면, 환상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환상이라는 것도 아주 쓸모가 있는 것이니까요.
빛으로 돌아가려는 갈망이 커지면, 그 갈망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 저항이 무엇인지 책임지고 탐구하겠지요.
신성의 법칙은 인간들이 처리못할 의무나 결정 사항은 아예 부과하지도 않습니다. 유유상종의 법칙은 물질적으로 나타난 인간의 실재를 그것에 맞는 의식(意識) 차원에 두게 되죠. 초급반에서 곧바로 졸업반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누구라도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 하지요. 의식이 스스로 탐구하고 창조하는 과정에서도 자각의 계단들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갑니다. 여러분이 육체를 떠나게 될 때 짙은 어둠과 무지에 싸여 있던 사람이 갑자기 찬란한 빛과 총체적인 의무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진실을 스스로 창조하기로 한 의식의 신성한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니까요.
수많은 차원의 진리가 있지만 그 모두는 전체적인 앎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지각 수준에 맞추어 길을 가되, 모순된 상황들을 겪는다고 해서 당황하지는 마십시오. 궁극적으로 이런 이원성들도 전체가 되는 데 필수적인 부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씨알도 바로 이런 환상 속에 있으니, 삶의 고통을 탐구하여 그 고통을 자신이 창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환상, 곧 내면의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통찰력을 얻고 어둠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질 수 있다면. 그 어둠의 얽힌 부분들을 풀어서 다시금 삶의 흐름 속에 띄워 보낼 수 있겠지요. 바로 진리 속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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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