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엄경산림 대법회 43강-2 (2013. 09. 02.)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六
須彌頂上偈讚品(수미정상게찬품) 第十四.
八. 菩薩偈讚(보살게찬)
1. 東方의 法慧菩薩(동방법혜보살)
(3) 擧因現果(거인현과)
2. 南方의 一切慧菩薩(남방일체혜보살)
(1) 不得見佛(부득견불)
(2) 知法乃見佛(지법내견불)
(3) 隨相不見佛(수상불견불)
(4) 佛法一如(불법일여)
(5) 了法見佛(요법견불)
(6) 推德法慧(추덕법혜)
3. 西方의 勝慧菩薩(서방승혜보살)
(1) 如來의 智慧(여래지혜)
(2) 凡夫의 迷惑(범부미혹)
오로지 우리 한 걸음 떼는 데, 저~ 기 아프리카의 오지에 있는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겁니다. 요즘은 그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지요.
세계경제를 이야기할 때, 예를 들어서 “뉴욕 월가에서 기침을 하면 우리나라는 감기가 걸린다.” 그런 표현들 신문 지상에서 잘 쓰잖아요. 그것이 법계연기 아니고 뭡니까? 사실 그렇거든요. 우리나라만 사는 시대가 아니라고요. 본래 그런 연관 관계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화엄경은 어찌 그 오랜 세월 전에, 이러한 이치를 이야기했는가? 참 탄복할 일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서양 학자들은 화엄경을 보고는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걸작이다.” 화엄경은 인류사가 남긴 최대의 걸작이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3) 擧因現果(거인현과)
一一世界中에 發心求佛道하시니
依於如是願하야 修習菩提行이로다
佛以種種身으로 遊行遍世間하사대
法界無所碍하시니 無能測量者로다
慧光恒普照하사 世暗悉除滅하시니
一切無等倫이라 云何可測知리오
擧因現果.
因을 들어서, 원인을 들어서 결과를 나타낸다. 그랬습니다.
一一世界中(일일세계중)에, 일일 세계 가운데
發心求佛道(발심구불도)하시니, 발심해서 불도를 구하니,
依於如是願(의어여시원)하야, 이와 같은 원을 의지해서
修習菩提行(수습보리행)이로다.
菩提行 = 깨달음의 행을 수습하는 도다.
佛以種種身(불이종종신)으로, 부처님은 가지가지 몸으로서
遊行遍世間(유행변세간)하사대,
遊行 = 다니면서 세간에 두루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관세음보살의 32응신을 이야기 하는데요. 그 또한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중생들의 어떤 수준과 그 인연에 맞추어서 나타내는 몸으로 그렇게 우리가 이해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 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佛以種種身으로 遊行遍世間이라.= 다니면서 세간에 두루 한다. 우리 가까운 주변에 어떤 부처님이 나를 교화하기 위해서 어떤 모습으로 내 옆에 있는지, 그런 생각할 때가 사실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기본적으로 그런 어떤 관념으로 사람을 대하잖아요.
제가 그전에 해인사에서山監(산감)하고 있을 때, 거기 거지가 있었습니다. 문수보살은 항상 거지형상으로 산문에 이렇게 계신다는데, 이런 말을 어려서 들어가지고는 지나칠 때마다 ‘저 사람이 혹시 문수보살이 아닌가?’ 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합장하고 지나가고ㆍ합장하고 지나가고요. 그 진짜 문수보살이면 어떻게 우리가 그냥 지나칩니까? 그런 생각을 늘 했습니다. 그 사람 얼굴도 지금 생각이 날정도입니다. 그래도 무심해요. 하도 자주 보니까 “문수보살입니까?” 하면 무심해요. 가만히 있어요.
아는지 모르는지...
法界無所碍(법계무소애)하시니,
법계에 걸림이 없으시니, 걸리는 바가 없으시니
無能測量者(무능측량자)로다. 능히 측량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렇지요. 측량할 길이 없지요. 法界無所碍입니다. 법계에 걸림이 없어요.
그러니까 문수보살인지 그냥 거지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는 겁니다.
無能測量者로다.
慧光恒普照(혜광항보조)하사, 지혜의 광명이 항상 널리 비추사,
世暗悉除滅(세암실제멸)하시니,
세상의 어두움을 전부 소멸 하시니, 除해서 멸하시니,
一切無等倫(일체무등륜)이라. 一切等倫 = 같이 짝할 이가 없다.
云何可測知(운하가측지)리오? 어찌 가히 측량해서 알겠는가?
부처님의 지혜는 그야말로 우리 중생들의 어리석음의 어둠을 소멸 하는 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상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듣고 배웠음에도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려서 그렇지, 사실은 어떤 문제에 봉착하더라도 내 지혜가 안 되니까 화엄경 펴놓고 거기서 부처님의 지혜를 빌린다면 틀림없이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우리 어리석음의 어둠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2. 南方의 一切慧菩薩(남방일체혜보살)
爾時에 一切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南方의 一切慧菩薩. 두 번째 보살이지요?
爾時(이시)에 一切慧菩薩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시방을 널리 관찰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씀하셨다.
(1) 不得見佛(부득견불)
假使百千劫에 常見於如來라도
不依眞實義하야 而觀救世者인댄
是人取諸相하야 增長癡惑網하며
繫縛生死獄하야 盲冥不見佛이로다
不得見佛.
假使百千劫(가사백천겁)에
常見於如來(상견어여래)라도, 항상 여래를 본다하더라도
不依眞實義(불의진실의)하야, 진실한 뜻을,
여래라고 하는 진실한 뜻을 의지해서, 이 말입니다. 진실한 뜻을 의지해서
而觀救世者(이관구세자)인댄, 救世者를 보지 못할진댄,
救世者 = 부처님이지요. 세상을 구제하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면,
是人取諸相(시인취제상)하야, 이 사람은 모든 상을 취해서
增長癡惑網(증장치혹망)하며,
癡惑網을 增長하며, 어리석음의 그물을 자꾸 증장시키며,
繫縛生死獄(계박생사옥)하야, 생사의 지옥에 얽히고 얽혀서
盲冥不見佛(맹명불견불)이로다.
캄캄하고 캄캄한 것이 부처님을 보지 못하도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참, 우리 개경게에 뭐라고요?
無上甚深微妙法(무상심심미묘법) 百千萬劫難遭隅(백천만겁난조우)
我今聞見得受持(아금문견득수지)까지는 다 합니다.
無上甚深微妙法을 百千萬劫難遭隅인데,
我今聞見得受持,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한다고요. 그런데 그 다음 과제가
願解如來眞實意(원해여래진실의)다.
여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하노이다. 진실한 뜻. 정말 부처님.
“부처님” 하면 부처님의 진실한 뜻이 무엇인가?ㆍ진짜 부처님이 뭐냐?
여기 그랬잖아요. 假使百千劫에 항상 여래를 본다하더라도 진실한 뜻에 의지해서 救世者.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면, 뭐라고요? 이 사람은 모든 형상만을 취해가지고, 형상에 눈이 멀어가지고서 癡惑의 그물. 어리석고 미혹한 그물만 증장시킨다. 자꾸 불어난다 이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천불 만 불 불상을 만드는 겁니다. 천불 만 불 불상을 만들어 갖고, 또 그것을 가지고 중생을 인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온갖 눈먼 사람들이 또 더 많은 눈먼 사람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繫縛生死獄하야, 생사의 지옥에 말하자면 엉켜 가지고서, 캄캄하고 어두워가지고 진짜 부처님이 뭔지? 부처님의 진실한 뜻이 뭔지를 보지 못한다.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참 아주 대단한...
이런 법문을 한다고 우리가 얼른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로되,
그러나 법문은요? 정말 참~~ 뛰어난 법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不得見佛. 부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2) 知法乃見佛(지법내견불)
觀察於諸法컨댄 自性無所有니
如其生滅相하야 但是假名說이로다
一切法無生이며 一切法無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 諸佛常現前이로다
法性本空寂하야 無取亦無見이니
性空卽是佛이라 不可得思量이로다
若知一切法이 體性皆如是면
斯人則不爲 煩惱所染着이로다
知法乃見佛. 법을 알아야 이에 부처님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그것 참 유명한, 바카리 경에 있는 천고에 아주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법을 알아야 이에 부처님을 본다.
觀察於諸法(관찰어제법)컨댄, 모든 법을 관찰하건댄,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니, “제법” 하면 모든 존재입니다.
모든 사건입니다. 모든 사건과 모든 존재가 이 “제법” 이라고 하는 것 속에 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온다. 라고 하는 것도 제법 속에 들어있고, 형상 없는 것이지요. = 시간성. 그 다음에 공간성으로는 모든 형상들, 지금 저렇게 초목이 무성해가지고 시커멓게, 잎이 푸르다 못해서 지금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저렇게 변해졌는데 지난봄에,
불과 몇 달 전에는 어땠습니까? 아주 아름다운 연녹색으로 장엄을 했었지요. 그러다가 이제 또 멀지 않은 시간에 푸르고 누른 단풍잎으로 변할 거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自性無所有입니다.
“푸르다” 하는 것이 그대로 푸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녹색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自性이 無所有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법은 그래요. 自性無所有.
如其生滅相(여기생멸상)하야,
그 생멸하는 모습과 같이, 모든 것은 생멸하잖아요.
자연현상을 보고 우리가 내 육신을 깨닫고, 내 마음의 변화를 깨달으면 = 비추어서 그렇게 보면 공부가 제일 좋습니다. 제일 큰 선지식입니다.
사실은 자연변화가 제일 큰 선지식입니다. 그래서 緣覺.
聲聞ㆍ緣覺(성문연각) 할 때 緣覺은 뭡니까? 자연변화의 현상을 보고 그대로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을 緣覺이라고 하잖아요.
但是假名說(단시가명설)이로다. 다만 이 거짓 이름으로 말한 것이다.
그 다음에 네 구절 한 게송, 이것은 별표를 한 세 개쯤 해야 됩니다.
一切法無生(일체법무생)이며 一切法無滅(일체법무멸)이니
若能如是解(약능여시해)하면 諸佛常現前(제불상현전)이로다.
모든 존재 = 諸法이지요? 모든 존재는 = 一切法은 生한 것이 없어요.
그 다음에 一切法은 無滅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뭐라고요?
諸法空相 不生不滅(제법공상불생불멸) 그랬습니다.
그것하고 딱 같이 매칭을 시킵니다. 若能如是解면,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일체 존재가 不生不滅이라고하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諸佛常現前이라. 모든 부처님이 항상 그 앞에 나타나 있음을 본다.
그렇습니다. 별 세 개아니라 열 개를 쳐도 아깝지 않은 구절입니다.
반야심경 不生不滅하고 많이 인용합니다.
그럼 법화경에는 뭐라고 했느냐? 똑 같은 구절,
是法이 主法位(시법주법위)하야 世間相常住(세간상상주)라.
그랬습니다.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습이 상주한다.
이 꽃. 금방 시들어버릴 이 꽃도 항상 있다. 그럽니다. = 常住한다.
그것이 不生不滅입니다. 不生不滅을 常住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물론 모습은 면하지만, 모습은 면하지만 그 실상은, 그 실상은 영원히 존재하는 不生不滅이다. 생긴 바도 없고ㆍ소멸한 바도 없고ㆍ변하는 바도 없다. 그러면서 무한히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해가고 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中道性(중도성). 中道적인 안목을 가지고 봐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화엄경의 이 구절하고, 반야심경의 不生不滅하고,
법화경의 是法이 主法位하야 世間相常住. 모든 존재는 진리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이 항상 있다. 不生不滅한다. 그 구절하고 세 개를 딱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존재의 불멸성이라고 할까요? 그 다음에 그것은 내면에 또 空性(공성)을 깔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의 空性을 깔고 있는 겁니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해가면서 본질에 있어서는 不生不滅이고, 不生不滅이면서 또한 空한 겁니다. 공하기 때문에 역시 不生不滅이다. 하는 그런 이치입니다. 뭐라고 했는가?
法性本空寂(법성본공적)하야,
법의 성품은, 일체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해서
無取亦無見(무취역무견)이니, 취할 것도 없고 또한 볼 것도 없다.
性空卽是佛(성공즉시불)이라.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다.
공한 자리가 그대로 부처입니다. 일체 존재의 본성이 공한 자리가 그대로 부처자리다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외형적으로 사람보다 조금 더 우수한 어떤 모습으로 특정한 어떤 존재로써 머리에 딱~~ 그리고 있습니다.
머리에 그리고 있는 그 의식이 도대체 지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이런 법문을 무수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ㆍ부처님” 조금만 문제 있으면 부처님한테 매달리고, 하다못해 부처님 안 되면 관세음보살에게다 매달리고, 부처님이나ㆍ관세음보살이나ㆍ지장보살이나, 그렇게 우리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性空卽是佛입니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공한 그 이치가 그대로 부처다.
不可得思量(불가득사량)이로다. 이것이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다.
사량 분별로써 얻어질 자리가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공성. 일체 존재의 공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若知一切法(약지일체법)이 體性皆如是(체성개여시)면,
만약 일체 법이, 體性이 = 본체의 성품이 다 이와 같은 줄을 알 것 같으면, 그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공성.
斯人則不爲(사인즉불위) 煩惱所染着(번뇌소염착)이로다.
이런 사람은 =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번뇌에 染着하는 바가 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다. = 번뇌에 끄달리지 않는다.
‘아~, 그것 공한 것인데 뭐,ㆍ공한 것인데 뭐.’ 예를 들어서 심지어 아니한 말로, 무슨 내가 운영하고 있는 사찰에 화장실이 탔다.
‘그것 본래 공한 것인데 뭐.’ 경제적으로 얼마나 손해가 많으며,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래도 사람 안 다친 것이 천만 다행이지요.
화장실에 사람 없을 때 불났으니까요. ‘아~, 그것 본래 공한 것이다.’ 그러면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아니해요. 뭐라고요? 煩惱所染着. 斯人은 則不爲 煩惱所染着. 이것은 사실은 아주 극단적인 그런 엉터리 예입니다.
엉터리 예를 들어서 한 예로써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게 고민할 것 없고, 애쓸 것 없고요. 斯人則不爲 煩惱所染着.
이러한 사람은, ‘일체가 공한 줄 그렇게 알면,’ 그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3) 隨相不見佛(수상불견불)
凡夫見諸法에 但隨於相轉하고
不了法無相일새 以是不見佛이로다
隨相不見佛.
상을 따라가면 부처님을 못 본다. 상을 따라가면...
금강경의 이치가 이 대목에는 아주, 南方의 一切慧菩薩의 가르침.
그 다음에 또 西方의 勝慧菩薩의 가르침. 이 속에서는 거의 금강경의 이치가 무르녹아 있습니다. 보니까 금강경 한 편이ㆍ금강경 한 권이 두 분의 게송 속에 다 들어 있더라고요. 상을 따라가면 부처님을 못 본다.
우리가 뭐라고요?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해야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봐야 부처님을 본다. 상 따라가면 부처 못 본다. 이 말입니다.
그대로 아닙니까?
凡夫見諸法(범부견제법)에, 범부가 모든, 제법을 봄에
但隨於相轉(단수어상전)하고, 다만 상을 따라서 굴러다니고,
但隨於相轉하고 = 상을 쫓아서, 그렇지요. 우리는 그저 뭐 그냥 처처에 상에 걸리는 겁니다. 전부 상에 걸리는 것입니다. 상 따라서 굴러가는 것이지요.
不了法無相(불요법무상)일새. 법이,
모든 존재가 형상이 없음을 깨닫지 못할 세. 알지 못할 세.
不了法無相일새.
以是不見佛(이시불견불)이로다. 그러므로 부처를 못 본다.
그러니까 금강경에서 끊임없이 凡所有相 皆是虛妄하고, 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끝내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음성이나 형상 쫓아가면 결국 여래를 못 볼 것이다. 이런 구절이 그대로 엑기스만 갖다 놓은 겁니다.
凡夫見諸法에, 범부가 모든 법을 봄에
다만 상을 따라서 굴러다니고 = 쫓아다니고 = 거기에 헤매고,
너무 상에 쫓아다니니까 우리 반성 좀 해야 됩니다. 상에 너무 쫓아다니니까... 不了法無相일새. 법의 無相을 알지 못할 세.
以是不見佛이로다. 그럼으로써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도다.
(4) 佛法一如(불법일여)
牟尼離三世하사 諸相悉具足하시며
住於無所住하사 普遍而不動이로다
佛法一如. 부처님과 법은 一如하다.
牟尼離三世(모니이삼세)하사,
석가모니부처님은 삼세를 떠나시사 = 초월하시사,
諸相을 悉具足(제상실구족)하시며,
초월한 상태에서 모든 상을 다 구족했어요. 이것이 늘 중도를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치지요.
住於無所住(주어무소주)하사, 주할 바 없는 곳에, 無所住에 머무사,
普遍而不動(보변이부동)이로다. 널리 두루해서 동하지 아니하더라.
그러니까 “상이 없다ㆍ없다.” 라고 이야기하면 거기에 또 떨어지니까,
이런 중도적인 안목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5) 了法見佛(요법견불)
我觀一切法하고 皆悉得明了하니
今見於如來에 決定無有疑로다
了法見佛. 법을 알아야 부처님을 본다.
아까 또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요?
我觀一切法(아관일체법)하고, 내가 일체 법을 관찰하고,
皆悉得明了(개실득명료)하니, 다 다 明了함을 얻어요.
모든 존재를 봐요. 꽃을 보면 꽃을 보고ㆍ산을 보면 산을 보고ㆍ하늘을 보면 하늘을 보고, 보는 대로 그 실상을 환하게 본다 이 말입니다. 환하게 안다. 그 환하게, 명료하게 안다. 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공성까지 아는 것이지요. 공성까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요? 이런 불교를 공부해 가지고 이것을 번역을 하는데, 어떻게 번역 하느냐?
미국의 유명한 칼럼리스트로 아주 이름 있는 사람인데, 불교 책을 썼습니다. 컵을 가지고, “이 컵이 깨져있다. 고 생각하고 사용한다.”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컵은 내가 사용하지만, 이것은 깨져있는 컵이다.’ 라고 생각하고 사용한다. 우리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실컷 외우고도 뭔 소린지 다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아예 그렇게 번역을해요. “이 컵이 깨져있다. 고 생각하고 사용한다.” 사용하면서도, ‘이것은 깨진 컵이다.ㆍ깨진 컵인데도 사용한다.’ 사용하면서도, ‘이것은 깨진 컵이다.ㆍ깨져있는 컵이다.ㆍ이미 깨져있는 컵이다.’ ‘나중에 언젠가 깨질 것이다.’ 이것이 아닙니다. 이미 깨져있는 컵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한다. 야~~ 色卽是空 空卽是色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참~~ 놀랄 일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불교가 번역이 돼야 이것이 세상 사람들하고 접근이 잘되고ㆍ소통이 잘되는데, 우리식으로 통하는 말만 가지고 자꾸 읊조려 대니까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종교의 가르침이 어느 다른 나라에 이렇게 전파될 때, 그 교리를 번역하는 것, 이것이 참~~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웃 종교에서는 그 사람들이 말하는 神을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해가지고 얼마나 큰 소득을 봅니까?
그 번역하나 잘 해가지고... 순전히 그 번역하나 잘 해가지고 얼마나 큰 소득을 보는지 몰라요. 神은 神이지, 그냥 神 이라고 되잖아요. 우리한테 다 통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번역 해버렸어요. 그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주 근사한 번역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요? 그 번역하나 때문에 그 종교가 그렇게 활개를 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관세음보살을 “어머니” 라고 번역을 해도 좋습니다. 또 그렇게 번역한 스님들도 더러 있습니다. “어머니” 물론 설명이 약간 필요하지만, 그것이 훨씬 더 낫지요. 더 잘 닥아 오잖아요. 더 잘 닥아 온다고요. 예를 들어서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今見於如來(금견어여래)에,
지금 여래를 봄에, 또 여래의 가르침을 봄에,
決定無有疑(결정무유의)로다. 결정코 의심이 없더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 여래를 본다고 하는 말은, ‘여래의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함에 있어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치를 알고 보니까 전혀 의심이 없더라. 일체 법을 관하는데 明了하게 본다. 그 실상까지 다 꿰뚫어 본다. ‘컵이 깨져있는 것으로 알고 사용한다.’ 이 뜻입니다.
‘컵은 이미 깨져있는 것으로 알고 사용한다.’ 죽은 몸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그것 보너스잖아요. 얼마나 가뿐해요?
실지로 그것이 우리가 뼛속 깊이 사무치게 이해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 사는 것은 하루하루가 그냥 보너스입니다. 아주 가뿐해요. 기분 좋아요.
감기 좀 걸리고 어디 좀 아프고 해도 그것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그대로 보너스니까요. 덤이라고요. 이미 ‘나는 송장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살면 야~~ 그것 근사하잖아요. 그런 명상을 한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아주 횡재를 할 겁니다. 그 명상 덕에 그 순간 횡재하는 겁니다. ‘야~ 나는 죽은 몸인데 이렇게 산다.ㆍ화엄경 한 구절 이것보고 호흡 한번하고 눈을 떠가지고, 산천초목을 바라보고, 귀로써 온갖 소리 다 듣고, 하~~ 텔레비전도 보고 듣고 하는데, 이것 전부 덤이다.’ 그것이 횡재 아닙니까? 그대로 횡재입니다. 그 다음에
(6) 推德法慧(추덕법혜)
法慧先已說 如來眞實性일새
我從彼了知 菩提難思議로다
推德法慧. 그 덕을 법혜 보살에게다가 미루는 것이지요.
이 분은 一切慧菩薩이거든요. 가끔 이런 식의 글이 있습니다.
法慧先已說(법혜선이설) 如來眞實性(여래진실성)일새.
법혜 보살이 이미 여래의 진실성을 설했을 세. 여래의 진실성을 이야기 했을 세.
我從彼了知(아종피요지) 菩提難思議(보리난사의)로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 我從彼 = 법혜 보살로부터 菩提를 難思議 = 깨달음에 대한 불가사의한 이치. 깨달음의 불가사의한 이치를 알게 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 다음에
3. 西方의 勝慧菩薩(서방승혜보살)
爾時에 勝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西方의 勝慧菩薩. 수승할 勝자ㆍ지혜 慧자.
爾時(이시)에 勝慧菩薩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普觀十方(보관시방)하고, 시방을 널리 관찰하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씀하시되,
(1) 如來의 智慧(여래지혜)
如來大智慧가 希有無等倫하시니
一切諸世間이 思惟莫能及이로다
如來大智慧(여래대지혜)가
希有無等倫(희유무등륜)하시니, 희유해서 어느 것하고도,
누구의 어떤 지혜하고도 짝할 이가 없다. 여래의 지혜하고 짝할 이가 없다.
一切諸世間(일체제세간)이 思惟莫能及(사유막능급)이로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사유하고 궁리 한다 하더라도 여래의 지혜에 미칠 수가 없다.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의 지혜가 생긴다.” 그런 표현을 우리가 하지만,
사실은 세상 사람이 다 동원이 되더라도, 70억 인구가 다 짜내더라도, 사실은 문수보살 한사람의 지혜를 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는 그런 교훈으로써 아주 멋진 말이잖아요.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의 지혜가 생긴다.” 고 했으니까, 어린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공양주에게도 물어보고, 부목에게도 물어보고, 행자에게도 물어보고, 不恥下問(불치하문)이라고, 밑에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자세가 있으면, 그런 사람에게는 사실은 지혜가 막 그냥 쏟아지는 겁니다. 문제 해결이 그냥 팍팍 되는 것이지요.
(2) 凡夫의 迷惑(범부미혹)
凡夫妄觀察하야 取相不如理하나니
佛離一切相이라 ←43 - 2
↓43 - 3
非彼所能見이로다
迷惑無知者는 妄取五蘊相하야
不了彼眞性하나니 是人不見佛이로다
凡夫妄觀察(범부망관찰)하야, 범부가 망령되게 관찰해서
取相不如理(취상불여리)하나니,
그저 가나오나 상만 취하는 겁니다. 상을 취해서 이치와 같지 못해요.
눈에 보이는 상에 속아 넘어가가지고 거기에 허우적대니까 이치와 같을 수가 있나요? 이치는 그것이 아닌데, 상은 금방 변하는 것인데... 아니, 이미 변해 있는 것인데... 컵은 이미 깨져있는 것인데... 이미 깨져있는 것인데 아~~ 그것을 애지중지하고 그래가지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슴에 응어리지고, 이치가 본래 깨져있는 컵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송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아미 송장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간다. 그것이 如理입니다. 이치와 같이 보는 것이고, 상을 취하면 이치와 같지 못하고요.
佛離一切相(불리일체상)이라. 부처는 일체 상을 떠난 것이라.
금강경에도 있지요? 離一切相이 卽名諸佛(이일체상즉명제불)이다.
제가 옛날에 금강경강설 책을 써가지고 선물할 때, 싸인 하면 꼭 이 離一切相 卽名諸佛이다. 상 떠난 것이 부처다. 상 떠난 것이 부처인줄 알아라.
부처가 딴 것이 아니다. 상 떠나면 바로 부처다. 그것을 본래의 취지에서 백보 양보해가지고ㆍ백보 양보해가지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상을 안 내고 산다. 그럼 부처대접 받는다. 이렇게 설명해요. 상 안 내고 살면 부처대접 받는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신도가 사찰에 시주를 상당히 많이 해요. 엄청 큰 시주입니다. 설판 중에서도 大설판 시주인데요. 이 사람은 오면 한 마디도 상 안냅니다. 주지스님하고 같이 식사하자고 해도 절대 같이 식사 안하고,
저~ 기 후원에 가서 허드렛일 솔선수범해서 더 먼저하고, 공양도 제일 나중에 하고, 또 주지스님이 불러서 차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언제 갔는지 모르고, 기도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요. 만약에 大설판 시주가 어느 사찰에 오면서 그런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그 주지스님은 아마 그 보살을 아마 부처님처럼 볼 겁니다. 안 그래요? 부처님처럼 대접할 겁니다.
마음속으로 존경스러워서 어떻게 할 바를 몰라요. 억지로라도 그만치 상을, 상내고 싶은 마음을 제대로 지워버리고, 억눌러서라도 그런 행동을 보이면 저절로 예불대접 받는 겁니다.
|
첫댓글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無所有를,
가질 것이 없다 해도 뭔가 찝찝.
가진 것이 없다 해도 뭔가 찝찝.
가진 바가 없다 해도 뭔가 찝찝.
있는 바가 없다 해도 뭔가 찝찝했는데,
無所有앞에 自性을 붙이고, 스님의 해설을 접하니 펑 뚫립니다.
[自性이 無所有 = 초목의 아름다운 녹색,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고맙습니다.
_()()()_
_()()()_
一切法無生 一切法無滅...고맙습니다..._()()()_
엄청난 스피드로 적으셨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멋지십니다. 고맙습니다.
과속해서 좋을 것 없다는 걸, 여기서도 뼈저리게 느낍니다,
과속한 결과는 "아이고 팔이야 허리야."
그래서 오늘은 푸~~ㄱ 쉬려니, 지버릇 개 줍니까?
느즈막히 배운 도적질이 재미가 쏘을 쏠.
一切法無生이며 一切法無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 諸佛常現前이로다...
性空卽是佛...모든 존재의 본성이 공한 그 이치가 그대로 부처다....釋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_()()()_
一切法無生이며 一切法無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 諸佛常現前이로다...
隨相不見佛--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해야 卽見如來..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_()()()_
_()()()_
_()()()_
無 取 亦 無 見 性 空 卽 是 佛 감사드립니다
어디 에서 이런 향기를 맡을수 있겠 읍니까 향기는 많으나 바른 향기가 없는 세상이니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_()()()_
佛以種種身 부처님은 가지가지 몸으로서
遊行遍世間 다니면서 세간에 두루 한다.
知法乃見佛. 법을 알아야 이에 부처님을 본다.
法性本空寂하야, 일체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해서
無取亦無見이니, 취할 것도 없고 또한 볼 것도 없다.
性空卽是佛이라.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다.
隨相不見佛. 상을 따라가면 부처님을 못 본다._()()()_ 고맙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_()()()_
一切法無生 一切法無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法性本空寂 無取亦無見 性空卽是佛 不可得思量
若知一切法 體性皆如是 斯人則不爲 煩惱所染着 ... 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불수자성수연성 요법견불 성공즉시불 불가듯사량 고맙습니다
一切法無生, 一切法無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 一切法常住' 생긴 바도 없고, 소멸한 바도 없고 변하는 바도 없다. 그러면서 무한히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해가고 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中道性 中道적인 안목을 가지고 봐야된다 .' 하는 것이다.
法性本空寂, 無取亦無見, 性空卽是佛, 不可得思量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_()()()_
一切法無生 一切法無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不生不滅
=是法 住法位 世間相常住~~
**性空卽是佛
**佛離一切相
감사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
_()()()_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離一切相 即名諸佛
자연변화가 제일 큰 선지식입니다.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