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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화엄경 지난시간에 이어서 19쪽 하단에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에 들어가는 출가수행인(出家修行人)들 주로 이제 출가 수행인을 지칭하는 그런 말로써 성문(聲聞)이라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이 이 부처님의 경지는 말할 것도 없고 보살의 경지도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지요. 전번에는 여래의 경지를 못 본다, 그 다음에 또 보살의 경계도 못 본다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못 본다고 하는 데는 알지도 못한다, 듣지도 못한다, 또 보지도 못한다, 이해도 못한다 하는 그런 의미들이 그 속에 다 함께 포함되 있는데 여기는 이제 못 보게 되는 이유 왜 못 보는가? 과거에 이러이러한 인연이 있어서 못 본다. 그 다음에 또 뒤에는 현재 이러이러한 인연으로 못 본다. 그 다음에 보면 또 못 보는 이유들을 그 못 보는 상황을 열 가지 비유로써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주 뭐 심한 비유도 나오는데 그런 비유를 들어서 못 보는 것을 이야기해요. 그래 이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마는 그 그릇이라고 할까 불교에서는 근기 이런 말을 하는데 수준이니 차원이니 하는 그런 말로도 대신할 수가 있습니다. 그 그릇 근기 또는 수준 차원 이런 것이 참 천차만별이에요. 여기에는 보살(菩薩)과 성문(聲聞) 이 두 가지를 특별하게 나눠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대승경전에 보면 특히 법화경 유마경 이 화엄경 이런데 보면 출가한 성문제자들을 상당히 비하하는 그런 경향이 상당히 농후하고, 또 재가의 어떤 보살 불자를 높이 평가하는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대승경전(大乘經典)이 거의 그래요. 법화경 특히 더 그렇고, 그 다음에 이제 유마경도 그렇고요. 여기도 이런 장면에는 보면은 지난 시간에 있었듯이 정말 기라성같은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이 사람들을 아주 비하시켜버리고 그 다음에 보살들을 우선적으로 상당히 소견이 넓고, 지혜가 있고, 뭔가 생각이 크고 한 그런 사람들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 사람이라고 그렇게 딱 그렇게 나와요. 뒤에 보면은. 세상 사람이라고 그렇게 나와 있고, 성문은 두말할 것 없이 출가한 사람이다.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 당시 경향이 부처님 열반하시고 부처님 당시는 그렇지 않았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한 백년쯤 지나니까 이상하게도 이 출가한 스님들이 너무 출가인의 어떤 그 권위에 떨어져있고, 또 불교가 출가인을 위한 그런 종교인양 잘못 오도되는 그런 경향도 사실은 적지가 않고 그래서 그런 세월이 한 삼사백년 그렇게 흘러서 이 화엄경 결집될 당시는 이제 오백 년, 육백 년경이 경과한 뒤에 흘렀기 때문에 그 당시 너무 교단 중심, 출가인 중심의 불교로 흘러가기 때문에 또 그렇게 이제 사실은 출가인들이라는 것이 생활이 편협해 가지고 산중에 들어와 가지고 출가한 사람들만 이렇게 편협한 인간으로서 두루두루 누려야할 또 그렇게 경험해야할 그런 생활을 못하고 아주 편협한 그런 생활을 하게 되다보니까 그 편협한 생활 속에는 설사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손 치더라도 좀 편협한 소견이 들 수밖에 없어요. 그 속인(俗人)이라고 하는 말은 그 한자를 이제 풀이 해보면 사람인변(亻)에 계곡이라고 하는 곡자(谷)를 속이라고 그래요. 그 골짜기 사람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 골짜기 사람이라고 하는 건 촌사람을 뜻하는데 촌사람은 견문이 좁다 하는 그런 말입니다. 견문이 좁고 경험이 적고. 그 골짜기에서 몇 가구 살지 아니한 그런 시골에 살다보면 아무래도 경험이 적거든요. 그리고 또 견문이 좁고 뭐 듣는다 해봐야 기껏해야 그 동네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들을 뿐이고 옛날엔 더욱 더 그랬죠. 요즘에야 좀 덜하지만은. 그 동네사람 가진 정보라고 하는 것이 기껏해야 얼마 안 된다고요. 그 동네라고 하는 게 좁은 동네고 시골이라고 하는 골짜기라고 하는 데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속인하면 속된 사람 이런 말인데 속된 사람이라는 게 왜 속되다고 하냐? 견문이 좁다는 뜻입니다. 경험이 적고 견문이 좁고 그래서 생각이 고루하지요. 자기 아는 게 그것뿐이다 보니까 고루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 이제 출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대개 그래요. 출가한 사람은 아무래도 세상을 멀리하고 있으니까 세상의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죠. 세상의 다종다양한 지식이 부족하죠. 세상에서 누리는 그런 아주 다양한 경험이 없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은 단순하고 그 단순하다는 게 좋은 의미도 되지만은 또 아주 안 좋은 의미도 돼요. 그만치 사람의 폭이 좁다는 그런 뜻이 됩니다. 폭이 좁고 그릇이 작다는 그런 뜻이 돼요. 그래서 교단중심의 불교였던 부처님 열반하시고 백 년쯤에서부터 사백 년, 오백 년 그 동안 한 삼 사백년 동안은 그런 불교의 어떤 그 교단 출가중심의 수행 뭐 이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보니까 이것은 부처님 본래의 그 정신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대승불교운동이에요. 그래서 본래의 부처님 사상에는 이런 것이 있었는데 출가인 중심의 그런 입장으로 불교가 흐르다 보니까 그것은 전부 땅에 묻히고 뒷전에 밀리고 그늘에 숨고 이렇게 됐어요. 그리고 빛을 본 것은 출가인이 자기들에게 맞는 그런 가르침만 빛을 보게 됐어요.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해석을 하죠. 불교도... 그러다가 상당한 세월이 들어서 아 이것은 본래 부처님 사상이 아니다 하고 자꾸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거죠. 그래서 그게 이제 하나의 힘으로 형성이 되고 거기에 맞는 부처님의 경전을 자꾸 발굴해 내고 이러다보니까 대승불교경전이 그때 막 쏟아지듯이 나오게 됐습니다. 이걸 이제 불교역사에서는 대승불교운동이다 이렇게 하는데 화엄경이 마침 법화경 금강경 예를 들어서 그 다음에 유마경 같은 이런 경전과 아울러 그 무렵에 결집이 됐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출가교단의 출가중심의 어떤 그 불교인들을 비판하는 그런 내용이 상당히 많아요. 법화경 유마경 특히 그렇습니다. 화엄경도 역시 마찬가지에요. 여기 보면은 세속의 보살들을 재가 신도들 위에 두고 그 다음에 출가한 십대제자들을 이제 이런 이들은 보살의 경지를 모른다. 이런 말을 딱 해 놨거든요. 그래서 좀 모르는 이유도 충분히 설명을 하고 뭐 과거인연 현재인연 아주 구체적인 그런 말들을 해 가면서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경전에 꼭 뭐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은 그 당시 널리 교단중심적인 그런 편협한 그런 소견을 가지고 교단의 중심에서 이것이 불교다 라고 해 가는 상황들이 너무나도 농후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경전에 많이 나타나게 되는 거지요. 아직도 저 태국 같은데 가면은 그런 그 출가인중심의 불교가 상당히 그 농후하게 있는게 거기 보면은 태국같은데 보면은 스님들을 아주 그 높이 존경해요. 그리고 사찰에 뭐 다리 무너졌어도 스님들은 그 손대면 안 되는 걸로 돼 있고 신도들이 해야 된다 이렇게 돼 있다는 거죠. 그 우리나라에 그 전에 이제 홍정식씨라고 동대교수로 아주 유명한 수행도 아주 잘 된 학자였었는데 그 분이 평소에 한국 스님들한테 불교를 가르치면서 한국 스님들한테 불만이 많았는데 태국에 한번 갔다 와 가지고는 한국스님들을 아주 존경한다고 하면서 스님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걸 내가 직접 들었어요. 그래 무슨 이야긴가 하고 자기가 강의하다 그런 말을 해요. 태국에 가니까 사찰에 막 그냥 어지러져 있고 담이 무너져있고 그렇더라는 거야. 그런데 왜 제대로 고치지 않고 놔두느냐 스님들보니까 스님들도 많고 하는 일도 별로 없고 한데 저런 것 좀 고치지, 한국스님들은 마당도 잘 쓸고 그러는데 일도 잘 하고 그러는데 왜 안하느냐 하니까 거기 스님 설명이 이런 것은 신도들이나 하고 그거 하면은 예를 들어서 벌레도 죽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그런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다는 거야. 그래 스님들은 그런 걸 하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 그 말 속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는고하니 신도들은 뭐 일하다 벌레죽여서 지옥에 가도 좋고, 스님들은 그런거 하다가 지옥가면 안 된다 이거지. 세상에 그게 어떻게 부처님 정신이냐? 지옥 갈 걸 대신 지옥 갈 줄 아는 사람이 그게 정말 진짜 불자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해 가지고 거기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이제 보고는 그렇게 이제 사람의 생각이 편협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된다고요. 그래가지고 이 사람이 한국에 와 가지고는 한국 스님들 다시는 욕 안 하겠다고 앞으로 한국스님 존경하겠다고.. 태국에 저그는 가장 부처님 말씀 잘 듣는 전통불교라고 자랑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고 도대체 그런 사상이 뭐냐 이거야. 그런데 그런 사상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사실은 불교 안에. 그런데 이제 부처님 열반하시고 한 백년이후부터는 한 삼사백년 동안 그런 사상이 사실은 상당히 지배적이었어요. 지금까지도 그쪽은 그런 사상이 남아있는 걸로 봐서 더욱 더 그랬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부처님 본래의 마음이 아니다 이렇게 들고일어난 일부의 수행자들이 말하자면 대승불교운동을 일으켰지요. 그건 곧 대중불교 운동이다. 출가한 사람들만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불교라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공경하는 것이지 어떻게 출가한 사람 중심일 수가 있느냐? 그래서 좀 역설적으로 출가한 사람을 더 완전히 비하시켜버리고 소견이 좁다. 너희들은 소견이 꼭 맥혀 가지고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하고 재가한 그런 일반신도들 다시 말해서 재가보살을 높이 사는 그런 말씀들이 대승경전에 상당히 많이 있어요. 여기도 이제... 그래서 지난 시간에 십대제자들을 모르는 사람들 이 보살의 경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대표로 이런 사람들도 모른다 이런 표현을 우정한 이유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 뭐 부처님 경지 보살의 경지가 높다라고 하면은 그냥 높다라고 하면 될 텐데 굳이 출가한 사람들의 대표격인 십대제자들의 이름을 들먹거려가지고 이 사람들은 십대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 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한 자리에 있었지만은 모른다. 여래의 경계를 못 보고 보살의 경계도 못 본다. 이런덴 이렇게 표현한데는 상당한 어폐가 있는 거지요. 그 깔려있는 속뜻이 있다고요. 뭐 어쨌거나 사람들은 그런 그릇이나 근기 수준이라든지 차원 이런 것은 상당히 차이 나게 마련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같이 화엄경을 공부하고 있어도 또 각자의 경험 따라서, 각자의 소견 따라서, 각자의 어떤 아는 지식 따라서, 또 각자의 어떤 생활환경 따라서 전부 이해하는 척도가 사실은 다 달라요. 그 다른 것이 그것이 이제 차이점이죠. 여기는 경전 그대로만 일단 본다면은 그런 성문들이 보살의 경지를 못 보는 이유 과거의 인연 이렇게 했어요. 4. 不見의 因由 (1) 過去의 因緣 如是等事를 一切聲聞諸大弟子가 皆悉不見하니 何以故오 以善根不同故며 本不修習見佛自在善根故며 本不讚說十方世界一切佛刹淸淨功德故며 本不稱歎諸佛世尊種種神變故며 本不於生死流轉之中에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故며 本不令他로 住菩提心故며 本不能令如來種性으로 不斷絶故며 本不攝受諸衆生故며 本不勸他하야 修習菩薩波羅蜜故며 本在生死流轉之時에 不勸衆生하야 求於最勝大智眼故며 本不修習生一切智諸善根故며 本不成就如來出世諸善根故며 本不得嚴淨佛刹神通智故며 本不得諸菩薩眼所知境故며 本不求超出世間不共菩提諸善根故며 本不發一切菩薩諸大願故며 本不從如來加被之所生故며 本不知諸法如幻하고 菩薩如夢故며 本不得諸大菩薩의 廣大歡喜故니 如是가 皆是普賢菩薩智眼境界라 不與一切二乘所共일새 以是因緣으로 諸大聲聞이 不能見하며 不能知하며 不能聞하며 不能入하며 不能得하며 不能念하며 不能觀察하며 不能籌量하며 不能思惟하며 不能分別하나니 是故로 雖在逝多林中이나 不見如來諸大神變이니라. 여시등사(如是等事)를 이와 같은 등의 일들을 일체성문제대제자(一切聲聞諸大弟子)가 개실불견(皆悉不見)이다. 모든 성문제자들은 다 못 본다. 보지를 못 한다. 이와 같은 경계라고 하는 것은 위에 말한 부처님의 경계, 보살의 경계를 말 하는 거지요. 못 보니 하이고(何以故)오 왜 그러느냐? 이선근부동고(以善根不同故)다. 보살들하고 이 성문들하고는 선의 뿌리가 좋은 일을 한데 대한 좋은 일을 한 근본이 같지가 않아. 다르다 이거야. 보살들이 좋은 일을 더 많이 했다. 이런 말입니다. 성문들은 좋은 일 별로 못했다는 그런 뜻이 되지요. 전체적으로 이렇게 말을 하고 그 다음에 부분적으로 나아가서는 본불수습견불자재선근고(本不修習見佛自在善根故)며 본래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그런 선근을 수습해서 보지 못했고 또 본불찬설시방세계일체불찰청정공덕(本不讚說十方世界一切佛刹淸淨功德)이라. 그러니까 본래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세계의 청정공덕을 찬탄해서 말하지 아니했다 이거에요. 부처님의 선근을 닦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청정공덕을 좀 찬탄해야 되는데 찬탄해서 말한 적도 없다 이거에요. 이 사람들은. 십대제자들은. 그 다음에 또 본불칭탄(本不稱歎) 이것도 이제 찬탄(讚歎) 이란 말하고 같습니다. 칭탄(稱歎). 제불세존종종신변(諸佛世尊種種神變)이라. 모든 부처님 세존의 가지가지 신통변화, 부처님의 신통을 찬탄하지를 아니했다 이거에요. 부처님의 신통을 좀 찬탄하고 그래야하는데 그런 찬탄하는 일을 안했고. 그리고 이것은 부처님 부처님 자꾸 그러는데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잘난 점은 정말 잘났다고 훌륭한 점은 좋은 점은 좋다고 훌륭하다고 이 찬탄하는 것 그걸 잊지 말아야 돼요. 꼭 찬탄해줘야 되요. 찬탄하면은 그 찬탄해준 공덕이 대단해요. 이 보십시오. 부처님의 청정공덕을 찬탄하지 아니한 것이 문제가 됐고, 부처님의 가지가지 신통변화를 갖다가 찬탄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거에요. 그러니까 좋은 것이면 반드시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칭찬해 주고 찬탄해 줘야 돼요. 마음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입으로는 할 수 있잖아요. 마음은 안 따라가도 입으로는 좀 찬탄하면 할 수 있거든요. 찬탄해 줘야 돼요. 그 공덕 지을 순간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찬탄하면 그 순간 자기가 아무 돈 안들이고 공덕을 짓는데 그 순간을 놓쳐버리고 찬탄을 안 하는 바람에 복 지을 것을 그만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불어생사유전지중(本不於生死流轉之中)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고(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故)며. 그러니까 생과 사의 그런 굴레 속에 우리가 우리 생사의 어떤 흐름 속에 흘러가고 있지요. 모든 사람들이 이 생사의 굴레 속에 흘러가는데. 이런 그 살아가는 문제가 급박하고 우리 산다는 문제가 보통일이 아니죠. 그런 그 어렵고 세속적인 그 삶속에서 그런데서 발심을 할 줄 알아야 돼.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발심(發心), 발보리심이에요. 도에 대한 마음, 깨닫고자하는 마음, 뭔가 인생의 실상을 인생의 참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아무리 생활이 바쁘고 생활에 쪼들리더라도 여기 생사유전지중(生死流轉之中) 하는 것은 생사에 쪼들리는 가운데 이런 말이에요. 살아가는데 쪼들리는 그런 가운데서라도 그런데서 발심할 줄 알아야 돼. 뭔가 인생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그런 가운데서 있어야 돼요. 편안하면요. 오히려 그런 마음이 안 생깁니다.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더 없어요. 편안하면.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 그랬어요. 춥고 배고플 때 인생에 대해서 뭔가 깨닫고자한다는 거에요.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기회가 그 기한(飢寒), 춥고 배고플 때, 그때 오히려 생각을 더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 인생이란 뭔가 어떻게 하면 정말 인생의 의미를 진정 깨달을 수 있을까.. 이 생각을 어려울 때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더 한다 이거에요. 권위 있고 배부른 사람들은 안한대요. 그런데 세상이 자꾸 살기 좋아지니까 도심은 약해지지요. 도에 대한 마음은 자꾸 약해지는 거라.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참 틀림없는 말이라.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 춥고 배고프면은 도 닦을 마음이 난다 이거야. 그 여기 보면은. 생사 유정 속에서 아주 그 삶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뭔가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그런 마음. 그걸 아니했더라. 이 말이에요. 이 사람들은. 또 본불영타(本不令他)로 주보리심고(住菩提心故)며. 또 자기 자신도 그렇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또 보리심에 머물게 하지 아니했어. 딴사람도 뭔가 인생에 대해서 도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생각을 거기에 좀 머물도록 그렇게 좀 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을 자기가 관심이 없으니까 본인이 관심 없으니까 또 남에게도 그렇게 하질 않았더라. 그 다음에 본불능영여래종성(本不能令如來種性)으로 본래 능히 여래종성으로 여래종성(如來種性)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 뿌리죠. 그것이 이제 단절하지 않도록 하지 못했다[不斷絶故].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되는데 부처님의 정신이 부처님의 사상이 계속 이어지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고. 또 본불섭수제중생고(本不攝受諸衆生故)며. 여러 중생들을 늘 거두어주고 보살펴주고 섭수(攝受)해 주어야 돼. 중생들을 자꾸 섭수해 주는 그런 그 뭐 늘 그렇게 하긴 어렵다 손치더라도 주위에 있는 사람, 나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여러 중생들을 좀 섭수해 주는 그런 마음자세 그런 생활태도가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다. 또 본불권타(本不勸他)하야. 또 다른 사람에게 권해서 보살 바라밀을 수습하지 못했다[修習菩薩波羅蜜故]. 딴사람보고 그 보살이 닦아야할 육바라밀(六波羅蜜) 그 육바라밀을 닦도록 좀 권해야 되는데 그 권하는 일도 하지 아니했다. 그러니까 딴 사람 보고 자기가 안하면서 권하면 좀 그 잘 안되지요. 자기가 할 때 자기가 어떤 좋은 일을 할 때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는데 혹 동참할 의사가 있느냐고 아 여기 이런데 동참하면 참 좋다고 이렇게 권해야 돼요. 좋은 일은. 그래서 권선 그러죠. 좋은 일에 권한다. 같이하길 권한다. 그 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 좀 좋은 일이 있으면 좀 같이하게 해 달라고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 권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뭐 화엄경 법회가 좋다고 확신이 서면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 자꾸 권해가지고 듣게 할 필요가 또 있는 거지요. 그러면은 그 일이 또 좋은 공덕이 되는 거지요. 이거 보십시오. 그런 공덕을 안 지어서 보살의 경지를 못 본다. 그랬거든요. 그 다음에 본재생사유전지시(本在生死流轉之時)에 불권중생(不勸衆生)하야 구어최승대지안고(求於最勝大智眼故)며. 그랬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인고 하면. 생사유전(生死流轉)에 있을 때 생사유전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현장을 생사유전지시(生死流轉之時)라 그래요. 삶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여기에서 중생들에게 권해 가지고서 최승(最勝) 가장 수승한 큰 지혜의 눈을 구하도록 권하지 아니했다. 제발 지혜의 눈을 떠라. 제발 지혜의 눈을 떠라. 그 육안만 가지고 뭐 물질만 분별하면 그게 다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줄 아는 그런 지혜의 눈을 떠라 라고 하는 이런 법문을 사람들에게 해야 된다는데 그걸 못했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본불수습생일체지제선근고(本不修習生一切智諸善根故). 또 본래 일체의 지혜를 내는 여러 가지 선근을 수습하지 못했다. 지혜를 갈고 닦는 일에 게을리 했다 이 말이에요. 이 사람들이. 그 다음에 열 한번째는 본불성취여래출세제선근(本不成就如來出世諸善根). 요거는 이제 여래가 출세하는, 여래가 세상에 태어나는 문제, 부처님이 이 땅에 오게 되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선근을 성취하지 못했다. 또 본부득엄정불찰신통지(本不得嚴淨佛刹神通智)라. 부처님의 세계를 엄정하게 하는. 요건 이제 아주 깨끗하고 장엄하게 하는 그런 신통의 지혜를 얻지를 못했다. 그 다음에 본부득제보살안소지경고(本不得諸菩薩眼所知境故)며. 또 본래 처음부터 여러 보살들의 안목으로 아는 바의 경계를 얻지 못했다. 그러니까 보살의 경계를 못 보는 것은 다시 말해서 보살로서 얻어야할 그런 그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 이거에요. 이 성문들은 그리고 본불구초출세간불공보리제선근고(本不求超出世間不共菩提諸善根故). 요건 이제 처음부터 세간에서 뛰어날 수 있는 특별한, 불공(不共)은 특별한 이런 말입니다. 특별한 깨달음에 대한 모든 선근, 보리제선근을 구하지를 못한 까닭이다. 그 다음에 본부득발일체보살제대원고(本不發一切菩薩諸大願故)다. 모든 보살들의 여러 가지 큰 원력을 발하지 못했다. 이게 중요하지요.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보살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큰 원력 큰 원력을 발해야 되는데 그 큰 원력을 발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이제 본부종여래가피지소생고(本不從如來加被之所生故)다. 본래 여래께서 가피해서 태어나는 바를 따르지 못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피로 태어나지 못했다 이거야.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태어났으면 보살이 될 텐데 지 멋대로 태어나놓으니까 부처님의 그 가피를 받지를 못했다. 그런 뜻입니다. 본부지제법여환(本不知諸法如幻)하고 보살여몽고(菩薩如夢故)며. 요건 또 참 그 모든 것이 모든 일이 제법여환(諸法如幻)이야. 모든 일이 꼭두각시와 같다. 환과 같다. 환상과 같은 줄을 알아야 되고. 또 보살도 보살보살 하는데 성문입장에서 보면 대단하지요. 그러나 보살 아니라 부처의 경지라 하더라도 여몽(如夢), 꿈과 같은 줄을 알지를 못했다. 그 너무 높은 경지니까 그 높은 경지가 환과 같고 꿈과 같은 줄을 그렇게 안다는 건 상당한 수준이죠. 제법여환(諸法如幻) 보살여몽(菩薩如夢)을 알지를 못한 까닭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높은 가르침을 우리가 마음속에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어떤 세속적인 것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는 가죠.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우리는 한 시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또 거기에 의지해 살면서도 그것이 또 때로는 또 아무것도 아닌 줄을 아는 것. 이런 것이 상당히 중요해요. 아 순전히 그 속에 파묻혀 살면서도 그것이 또 아무것도 아닌 줄을 알고 파묻혀 사는 것. 이게 참 바람직한 사상이고 바람직한 소견인데. 우리는 그만 파묻혀 살면 그만 그것뿐이려니 그렇게만 생각한다고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또 거기서 파묻힐 때는 묻혀야 되는데. 여기 보면 제법여환 보살여몽 그랬어요. 모든 일들이 환과 같고 환상과 같고 보살이라는 것마저도 꿈과 같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보살의 경계를 모른다. 또 본부득제대보살(本不得諸大菩薩)의 광대환희(廣大歡喜)라. 여러 큰 대보살들의 넓고 큰 기쁨. 보살들이 무엇을 기뻐하는가? 그 기쁨 그것을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어. 이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수준이 다르니까 차원이 다르니까 그런 보살의 기쁨을 성문이 알 까닭이 없지요. 이와 같은 것이, 여시(如是)가. 개시보현보살지안경계(皆是普賢菩薩智眼境界)라. 요 말이 중요합니다. 보현보살의 지안경계(智眼境界)라 그랬어요. 보현보살의 지혜의 눈으로 보는 경계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화엄경은 계속 보현보살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현보살 지혜, 보현보살의 행원. 그러니까 불교는 그래요. 이 화엄경의 입장에서 보자면 본래로 우리는 완전무결한 부처인데 그러면 본래 부처인데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그냥 살아도 좋아. 그냥 살아도 좋은데 좀 더 거기서 가미를 해서 사는 길을 우리가 말한다면 그건 보현보살이 실천한 열 가지 덕목, 보현의 십대행원 있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 그것은 결국 뭔고하니 일행일불이야. 한 가지 행위가 부처다우면 그 한 가지 행위를 하는 동안 안팎이 다 부처야. 그런데 그 한 가지 행위가 부처답지 않으면 반쪽 부처야. 속만 부처고 겉은 부처가 아니라고요. 속만 부처돼도 좋은 거에요 사실은. 좋은데 이왕 이제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라고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는 안팎이 다 부처로서 사는 것. 그것은 이제 보현행을 하는 것이다 하는 그렇게 이제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보현보살의 지혜의 눈의 경계다. 불여일체이승소공不(與一切二乘所共)일새. 여기 있잖아요. 일체이승(一切二乘)들로서는 함께 할 바가 아니야. 이승들하곤 함께 할 일이 아니다. 이승들로 더불어 함께할 것이 아니다. 이승(二乘)이라고 하는게 성문(聲聞) 연각(緣覺)이죠. 출가해서 아까 얘기한 속인(俗人), 골짜기 사람, 아주 견문이 좁고 고루하고 뭔가 정보가 어둡고 그래서 더 이상 어떻게 뭔가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 생활이 그러면 저절로 그래 돼요. 생활이 그러면은. 그 참 묘한 거에요. 사람의 한계란 게 그렇다고요. 우리 여기 저 부산에 있는 방송국에 아나운서들 전부 서울서 갖다 쓰는데 부산만 갖다 놓으면 그만 부산사람 돼 버려. 말하는 투도 부산 사람 돼 버리고, 어떻게 그렇게 옷 입는 것도 부산 사람한계에서 못 벗어나. 데려올 때는 서울서 데려왔는데 어찌해서 그렇게 됐는지 내가 알 수가 없어. 그게 그 한계야. 상황이 그러면 그렇게 돼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 고루하다 골짝 사람이다라고 하는 이유가 그렇게 있습니다. 그래 출가한 성문(聲聞)들은 지가 뭐 아무리 부처님의 십대제자라고 떠들어봤자 그 사람의 생활 한계가 딱 정해져 있어. 한계가 딱 정해져 있다고요. 맨날 자기들 끼리 모여가지고 뻔히 보는 거, 뻔히 하는 생활, 단순한 그런 생활 그거잖아요. 불교는 꼭 그렇게 단순한 생활만이 불교는 아니거든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전부 포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어떠한 생활도 다 거기에 감싸고 포용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출가한 사람들의 생활하는 게 너무 단순하고 특수한 사람들의 생활 아닙니까? 불교는 특수한 게 아니거든요. 불교는 아주 평범한 것이고 보편타당한 것이고 이게 불교인데 그렇게 편협한 것을 가지고 불교의 전부다 라고 하면 그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 불여일체이승(不與一切二乘)으로 소공(所共)일새. 일체이승(一切二乘)으로 더불어서는 함께할 일이 아니다 이거야. 이시인연(以是因緣)으로 이러한 인연으로써 제대성문(諸大聲聞)이 불능견(不能見)하며 모든 큰 성문들 큰 스님들이 능히 보지를 못하며, 불능지(不能知)하며 능히 알지를 못하며, 불능문(不能聞)하며 능히 듣지를 못하며 아이 세상 돌아가는 세상 알 수가 있나요? 불능문하며. 불능입(不能入)하며 그런 세계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고 불능득(不能得)하며 그런 경계를 얻을 까닭은 더욱 없고 불능염(不能念)하며 생각도 못해. 불능관찰(不能觀察)하며 관찰도 못하고. 불능주량(不能籌量)이라 주량은 이제 헤아린다 이거에요. 그것을 이렇게 마음속에 헤아려서 이해하는 거에요. 헤아리지도 못해. 불능사유(不能思惟)라 생각도 못해. 불능분별(不能分別)이야 분별도 못해. 여기에 이제 뭐 불능견 보지도 못한다 알지도 못한다고 해도 충분할 텐데 견(見), 지(知), 문(聞), 입(入), 득(得), 염(念), 관찰(觀察), 주량(籌量), 사유(思惟), 분별(分別) 이렇게 해서 꼭 열 가지를 채워요. 고 불능지 불능문 이걸 이제 부연했는데 요것도 이제 안 되는 것 까지도 열 가지를 이야기하면 만수 원만한 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늘 그걸 이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잊어버리면 안돼요. 어떤 삶을 살던지 자기가 뭐 어떤 불만이 있던지 무엇이 부족하던지 그대로 좋은 삶이다. 그대로 완전한 삶이다 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이제 화엄사상이고 불교의 본 사상이에요. 시고(是故)로 이러한 까닭으로 수재서다림중(雖在逝多林中)이나 비록 서다림 가운데 있지만 서다림이라고 하는 법회가 열린 화엄경 법회가 열린 바로 그 장소지요. 바로 그 장소에 같이 거기에 있지만 불견여래제대신변(不見如來諸大神變)이니라. 여래의 여러 가지 큰 신변들 신통변화들을 하나도 보지를 못한다. 그러니 우리가 이러한 그 상황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컨대 우리가 화엄경을 이렇게 공부하는 인연이 있는데 같이 화엄경 공부를 하는 인연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그것을 소중한줄 알질 못하고 보질 못하고 듣질 못하고 그걸 체득하지 못하고 생각을 못하고 헤아리지 못하고 관찰하지 못하고 이렇게 또 말 할 수가 있는 거에요. 여기에 보면 이 십대제자도 화엄회상에 있어요. 그 자리에 있지만은 모른다 이랬거든요. 그리고 이 자리에 같이 화엄경 공부한 인연이 있어요. 일단. 인연은 있는데 이 인연의 소중함을 얼마나 아느냐하는 거는 또 천차만별이야. 역시 또 천차만별이야. 아 이 참 스님들도 공부하기 어려운 이런 그 화엄경을... 하긴 뭐 이런 그 화엄경을... 하긴 뭐 보살이니까 할 수가 있는지도 모르지. 사실은. 스님들은 복이 없고 보살들은 복이 많으니까... 이 화엄경의 입장에서 보면 그래요.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폭이 넓고 견문이 넓고 그래서 온갖 경험이 많고 그래서 부처님의 소견에 더 가까이 있어요. 이 화엄경의 이야기는 그거에요.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이런 큰 가르침은 오히려 출가한 스님들 보다 훨씬 능력이 많을 수가 있습니다. 많게 돼 있어요. 사실은. 그런데 이게 그냥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니에요. 화엄경을 보면 그런 신념이 생겨요. 따라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게 바로 이런 큰 가르침 화엄경 공부의 인연을 우리가 함께하면서도 그 소중함을 보질 못하고 알질 못하고 듣질 못하고 그게 납득이 안 되고 뭐 이럴 수도 또한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거는 알아야 되겠죠. 여기에 이제 너희들은 못 본다 하는 인연의 뜻은 얼른 노력해서 보도록 해라 화엄경의 이치에 접근하도록 해라 하는 그런 뜻이 사실은 담겨있습니다.
16강 ...의 인연이라 했어요. 그건 이제 과거인연이고, 현재인연이 또 여러 가지가 있어요. (2) 現在의 因緣 復次諸大聲聞이 無如是善根故며 無如是智眼故며 부차제대성문(復次諸大聲聞)이, 또 여러 성문들이. 무여시선근고(無如是善根故)며, 이와 같은 선근이 없는 연고며. 여시지안고(如是智眼故)며, 이와 같은 지혜의 눈이 없는 연고며. 無如是三昧故며 無如是解脫故며 無如是神通故며 無如是威德故며 無如是勢力故며 無如是自在故며 無如是住處故며 無如是境界故라 여시삼매(無如是三昧), 삼매가 없기 때문이고. 해탈도 없기 때문이고, 신통변화가 없기 때문이고, 이와 같은 위덕도 없는 때문이고, 무여시위력세력(無如是威力勢力) 이와 같은 세력도 없고 무여시자재(無如是自在), 이와 같은 자유자재한 그런 능력도 없고. 또 무여시주처(無如是住處), 주처(住處) 머무는 곳 그 정신적으로 머무는 곳입니다. 뭐 사는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구요. 뭔가 마음속에 삶에 대한 삶의 길에 대한, 道에 대한, 진리에 대한, 어떤 확신이 없다 이거죠. 또 무여시경계고(無如是境界故)며, 앞에서 설명한 그런 경계 그게 또 없는 연고라. 是故로 於此에 不能知하며 不能見하며 不能入하며 不能證하며 不能住하며 不能解하며 不能觀察하며 不能忍受하며 不能趣向하며 시고(是故)로,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불능지(不能知)하며. 불능견(不能見), 알지 못하며 보지 못하며. 불능입(不能入), 들어가지 못하며. 블능증(不能證), 깨닫지 못하며 증득하지 못하며. 불능주(不能住), 머물지 못하며. 해(解), 이해하지 못하며. 관찰(觀察)하지 못하며. 인수(忍受)하지 못 한다. 요건 이제 받아들이지 못 한다 이 뜻입니다. 인수(忍受)라는 말이.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불능취향(不能趣向)은 이제 그 쪽을 향해서 나아가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뭐 어느 산을 오른다 하면 그 산 산봉우리 향해서 올라가는 거, 그게 취향(趣向)이거든요. 보살의 경지, 부처의 경지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하며. 不能遊履하며 又亦不能廣爲他人하야 開闡解說하며 稱揚示現하며 引導勸進하야 令其趣向하며 令其修習하며 令其安住하며 令其證入이니 불능유리(不能遊履), 그 경계에서 그 정신세계에서 노닐지 못하며. 우역불능광위타인(又亦不能廣爲他人)하야, 또 이런 것도 못 한다. 뭔고 하니 널리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개천해설(開闡解說) 이제 그 어떤 이치를 열어 보이는 게 개천(開闡)이고, 그걸 설명하는 것을 해설(解說). 칭량시현(稱揚示現), 칭량(稱揚)은 이제 들추어 내 가지고 막 이렇게 선전하는 거지요. 또 시현(示現)은 나타내 보이고. 또 인도권진(引導勸進), 인도(引導)하고 뭐 그런대로 인도한다든지, 권진(勸進)은 그리로 가자고 자꾸 권하는 것, 가자고 가자고 내가 모시고 갈 테니까 가자고, 이렇게 이제 권하는 것, 권해서 나아가게 해서. 영기취향(令其趣向)하며, 그들로 하여금 취향(趣向)하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수습(修習), 그것을 닦아서 익히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거기에 안주(安住)하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증득(證得)케 들어가게 하지 못함이니. 아니 불 자(不)를 거기다 새겨요. 우역불(又亦不)하는 그 불 자(不)를 그렇게 하지 못함이니 이 사람들은. 현재 그렇게 못하고 있다 이거야. 요건 이제 한 마디로 말하자면요. 활발한 포교활동 또 활발한 보살행, 아주 활발한 보살행 아주 활발한 포교활동,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적극적으로 펴려는 생각, 이게 부족하다 그게 없다하는 그런 뜻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요. 거의 그런 뜻이죠. 개천(開闡), 해설(解說), 칭량(稱揚), 시현(示現) 또 인도(引導), 권진(勸進) 이런 말들이 전부 딴사람을 위해서 타인(他人)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된다 하는 게 전부 불교를 크게 펴는 그런 일에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런 말이에요. 그럼 이제 산중에서 출가해 가지고 지 하나 편할라고 가만히 있으니까 당연히 그렇지 못하죠. 남을 위해서 무슨 해설을 한다든지 포교활동을 열심히 한다든지 칭량시현(稱揚示現)한다든지 하는 게 아무래도 적극적이지 못하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당시 이제 승단(僧團)이 그런 경향이 높았다는 거지요. 何以故오 諸大弟子가 依聲聞乘하야 而出離故로 成就聲聞道하며 滿足聲聞行하며 安住聲聞果하며 於無有諦에 得決定智하며 常住實際하며 究竟寂靜하며 遠離大悲하며 捨於衆生하며 住於自事일새 못하니 하이고(何以故)오. 왜냐? 제대제자(諸大弟子)가 또 의성문승(依聲聞乘)하야, 제자가 성문승을 의지해서, 모든 제자들이 성문승(聲聞乘)을 성문승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부처님이 설법해 주니까 편안하게 그 앞에서 듣고 마는 것. 이게 성문승이에요. 또 經 보면 경을 그저 보는 걸로 그걸로 듣고 마는 것. 여러분들도 여기 오면 그냥 뭐 덮어놓고 오면 뭐 무조건 한 시간 듣고 가니까 그 다음에 나가서 보살행(菩薩行) 하던지 말던지 마 그거는 내 모르겠다 해 버리면 역시 성문승이 되는 거야. 성문승에 의지해 가지고서 출리(出離)를 구하는 고로, 출리(出離)한 까닭에, 성문승을 의지해서 벗어날려고 한다. ‘아이구 뭐 불교고 포교고 나는 그저 뭐 일주일에 한 번 가서 경 한번 공부하는 걸로 그걸로 나는 뭐 모든 불교 OK다’ 이래버리는 거에요. 그 출리(出離)를 구하는 까닭에.. 그래서 성문도(聲聞道)를 성취하는 거야. 성취성문도(成就聲聞道)하며 성문도(聲聞道) 와서 듣는 건 잘 하잖아요? 성문도는 성취 했어 일단은. 성문(聲聞), 소리 성자(聲) 들을 문자(聞). 성문도(聲聞道)는 성취했으니 열심히 .. 또 뭐 안 빠지고 왔다고 그 되게 자랑해 쌌지. 그 완전히 성문도(聲聞道) 성취한 사람이에요. 그 다음에 법문이고 기도고 참선이고 뭐 사경하라 해도 안 하고 숙제하라 해도 안하고 보살행은 더욱 안하고요. 포교활동은 더 안하고. 좀 옆에 이웃사람들에게 권해가지고 무슨 이렇게 나눠서 말이지 갖도록 불교 이 좋은 불교라면 여러 사람에게 나눠서 갖도록 해야 되는데 도대체 그 일을 안 하는 거야. 그리고는 그냥 와서 ‘아이구 내 나만 뭐 일 주일에 한 시간씩 가서 공부하면 되지.’ 딱 요렇게 생각해 버리는 게 그게 딱 출가한 제자들의 생각이야. 성취성문도(成就聲聞道)야. 성문도(聲聞道)를 성취했으며. 만족성문행(滿足聲聞行)하고, 성문행에 만족하는 거야. 여기 갈수록 다 해놨네. 다 해놨어. 안주성문과(安住聲聞果)야. 성문의 결과에 딱 안주해버려 그 이상 나아가려고 안 해. 성문행(聲聞行)을 만족하고... 그러니까 ‘아이고 일주일에 한 시간이 어딘데 그것만 해도 장하지’하고 이렇게 생각해. 경에 어떻게 알고 이래 해 놨는지 내가... 성취성문도(成就聲聞道), 만족성문행(滿足聲聞行), 안주성문과(安住聲聞果), 성문의 결과에 딱 안주해 있어가지고 “아이고, 나만치 불교하는 사람 없나 나와 봐라 해” 하고 아 이렇게 그냥 완전히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야. 성문행(聲聞行)에 만족하고 성문의 결과에 안주를 떡 해 가지고서는 어무유제(於無有諦)에 득결정지(得決定智)하며. 요건 뭔 말인고 하니 무유제(無有諦), 무의 진리 유의 진리, 이 뜻입니다. 제 자(諦)는 진리 제자거든요. 이건 뭔 말 인고 하니 흑백논리에요. 중도적(中道的)으로 알아야 되는데. 요건 요거고 이건 이거다. 딱 요렇게 나눠가지고,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거다」 딱 이렇게 아는 것을 무유제(無有諦) 그래요. 그래서 거기에 득결정지(得決定智)야. 결정적인 지혜를 얻어. 고것만 딱 고정된 지혜, 이 결정지(決定智)라고 하는 것은요. 자기 고집입니다. 자기 고집 딱 세워 가지고, 「아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게 도대체 뭐냐.」 그걸 이해 못 하는 거야 이제부터. 『또한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요게 이제 불교의 논리입니다. 고런 불교의 중요한 중도적인 논리는 그만 모르는 거 에요. 우리가 세속적인 그런 지식에 오래 익은 사람들은 그만「있다 없다」라고 하는 흑백 논리에 완전히 머리가 굳어져버렸어요. 완전히 머리가 굳어졌다는 말이 득결정지(得決定智)야. 결정적인 지혜를 얻는다. 이거는 이제 딱 그냥 거기에 굳어져가지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하는 것을 못 알아듣는 거야.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있던지 없던지 둘 중에 하나지 뭘 그게 왔다갔다하는 그런 게 있을 수 있느냐.」이런 식으로 이해하는게 무유제 득결정지(無有諦 得決定智)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그 사람의 폭이 넓어지지가 않지요. 그래 성문행(聲聞行) 성문도(聲聞道) 성문과(聲聞果) 이게 크게 좋은 게 아니에요. 성취성문도(成就聲聞道), 만족성문행(滿足聲聞行), 안주성문과(安住聲聞果), 해 가지고선 있다 없다고 하는 어떤 흑백논리에 딱 그냥 사로잡히며. 상주실제(常住實際)하며 어떤 실다운 진리에 상주(常住)하며. 요것도 이제 자기 아는 지혜를 말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어떤 진리를 고집하고 거기에 딱 머물러 있는 거. 그 이상 벗어날 줄 모르는 것을 여기서는 상주실제(常住實際)라고 그랬어요. 실제상주(實際常住)하며 구경적정(究竟寂靜)하며, 철저히 적정(寂靜)해. 고요하기만 하다 이거에요. 그 산중에 포교도 안할라 고통, 세상의 괴로움도 다 잊어버리고 자기 혼자만 이렇게 조용한 거 즐기면서 있으니까 그게 구경적정(究竟寂靜)이라. 끝까지 고요한 것만을 즐기는 거라. 그리고 뭐라고? 원리대비(遠離大悲)여. 대비(大悲)를 멀리 떠나서. 부처님 제자라면 자기가 설사 잘못되더라도 남을 위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이건 아니야. 그러니까 어디 중들처럼 신도는 뭐 죄 지어서 지옥가도 괜찮고 출가인은 지옥가면 안 된다 해가지고 무너진 담도 안 쌓고 아무 일도 안하고 또 마당도 쓸지도 않고. 마당까지도 쓴다네. 신도들이 와서 쓸고 스님들은 안 쓴다고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게 원리대비(遠離大悲)여. 대비를... 차라리 그 세속사람들이 지옥갈 것을 자기가 해서 대신 지옥가야지 지장보살의 그런 저..... .....것은 뭐 완전히 거리가 먼 거죠. 원리대비(遠離大悲)라. 큰 자비하고는 멀리 동떨어져있으며. 사어중생(捨於衆生)하며. 중생을 버리면 안 되는데 중생을 버린다 이거여. 보살은 중생 버리면 안 되죠. 불교에는 부처님은 중생 버린 적이 없거던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생을 버리진 않습니다. 중생을 버리며. 주어자사(住於自事)일새, 자기 일에만 머물러 있다 이거에요. 꼭 자기 일 밖에 못 해. 이 스님들 가만히 살펴보니 그런 사람들 많아요.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밖에 모른다고 그래요. 그 뭐 음식이 이렇게 나와도 뭐 권하는 법이 없어요. 자기 것만 얼른얼른 먹는 거야. 남이야 먹든지 안 먹든지. 이상해. 그 생활이 그렇게 돼 있어. 그래 생활이 그 사람을 만들어. 생활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요. 그래 골짜기에 살면 고루해지고 편협해져. 그래서 그 소견이 저거한 사람들은 어디에 보면 시골에 산다 이런 말이 있어요. 그 사람들하고 더불어 사는 것을 經에서는 권합니다. 그게 복이 있는 사람이라 그래요. 시골에 동떨어져서 사는 것은 그건 이제 복이 없어서 그렇다. 뭔가 소견이 잘못돼서 그렇다. 편협한 소견을 갖은 사람, 외골수인생은요. 나중에 태어나도 아주 저 시골에 그 저기 오두막 한두 집 있는 그런데 태어나요. 소견이 그렇게 좁으면은 고렇게 고런 결과가 오는 거야. 그럼 좁게 살아라 이거야. 생각이 넓은 사람은 넓은데 살아라 이거야. 그거는 뭐 어느 게 좋다 나쁘다 보다도 지은대로 가게 돼 있으니까. 그런 글이 있더라고요. 經에 보니까. 그래서 그 생활이 또 그 사람을 만들고 또 그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의 어떤 생활을 만들고 그래요. 가만히 보믄 여 참 주어자사(住於自事) 아주 재미있는 말이에요.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거야. 자기 일에만 몰두해. 그저 뭐 옆에서야 뭐 죽던지 살던지. 또 현재 그 생활이란 게 좀... 현대생활이 좀 그런 경향이 많지요. 옛날 같지 않아서.
於彼智慧에 不能積集하며 不能修行하며 不能安住하며 不能願求하며 不能成就하며 不能淸淨하며 不能趣入하며 不能通達하며 不能知見하며 不能證得이라 어피지혜(於彼智慧)에 불능적집(不能積集)하며, 저 지혜에 있어서. 보살들의 지혜입니다. 능히 적집(積集)하지 못 하며. 보살들이 지혜를 쌓을려고 안 해. 또 불능수행(不能修行)이라. 능히 수행하지도 못하고. 불능안주(不能安住)해. 보살이. 피지혜(彼智慧)라고 하는 피 자(彼)는 보살들을 가리키는 거야. 보살의 경지. 보살의 경지에 안주하지도 못하고. 불능원구(不能願求)라. 보살의 경지를 구할려고 원도 안 세워. 원을 세워야 할 텐데. 또 불능성취(不能成就)야. 원을 안 세우니까 성취될 까닭이 없지요. 성취하지도 못하고. 청정, 불능청정(不能淸淨)이라. 그걸 이제 말하자면 고귀하고 훌륭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청정인데 그런 마음도 없고. 불능취입(不能趣入)이라. 나아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보살의 세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불능통달(不能通達), 통달하지도 못하고. 알고 보지도 못하고. 증득도 못함이라. 깨달아 얻지도 못함이라. 是故로 雖在逝多林中하야 對於如來나 不見如是廣大神變이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수재서다림중(雖在逝多林中)하야, 비록 서다림가운데 있어서. 대어여래(對於如來)나, 그 자리 같이 앉아 있으니까 부처님을 딱 대하고 부처님 코빼기 쳐다보고는 있지마는 불견여시광대신변(不見如是廣大神變)이야. 이와 같은 넓고 큰 부처님의 신통변화는 꿈에도 못 본다 이거에요. 그래서 요런 것 때문에 미몽경계(迷夢境界)라 꿈에도 못 본다. 그런 표현을 써요. 그 앞에 딱 앉아서 얼굴은 쳐다보고 있지마는 정말 얼굴만 봤지 정말 부처님의 세계는 전혀 모른다 이거야. 그 뭐 모습 볼라고 부처님 보나요?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라고 그랬잖아요. 얼굴 모습가지고, 음성 법문하는 음성가지고 그걸 부처님이라고 한다면은 그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여래의 경지는 꿈에도 못 본다』라고 이런 말을 금강경에도 했듯이 그렇습니다. 여기 아주 참 글이 장황하긴 하지만은 그러나 아주 재밌고 우리가 꼭 그 염두에 둬야할 그런 내용들이 많이 이제 소개 됐다 이렇게 보아집니다. 그 다음에 이제 열 가지 비유를 들어요. 아주 이 저기 어떤 의미에서 보면 화엄경은 장황하면서도 그러면서 참고 느긋하게 보면요. 재밌어요 또. 이 보십시오. 뭐 한 번 이야기했다하면 열 가지 반복하고요. 비유를 또 꼭 열 가지 들어야 성이 차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화엄경을 대하는 태도, 또 인생을 화엄경에 의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느긋해야 돼요. 느긋하고 편안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바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바로 그것이 내 삶이다 그 외에 달리 다른 것은 없다. 그 외에 달리. 우리가 조급증 내어가지고 빨리 집에 가본들 뭐 하겠어요? 아 뻔한 일인데. 그러게 조급증 낼 일이 없어요. 그리고 시간되면 당연히 마쳐. 시간되면 어련히 마친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일을 가지고 있잖아요. 가슴에 무슨 일을 계획을 딱 품고 있으면 자기가 몇 시 되면 마치고 그때부터 일어나가지고 가도 되는 줄 뻔히 알면서 마음이 왜 그리 쫓기지? 쫓긴다고 일어나지도 않아 시간되면 일어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때까지 마음이 놓이지가 않는 거 에요. 사람이라는 게. 그 시간 되서 쫓아가봐야 사실은 또 그 사람의 삶의 한 모습일 뿐이지 그 외에 다른 거 없어요.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으나, 어디 쫓아다니나 역시 그 사람의 삶의 한 모습일 뿐이라. 화엄경은 이걸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던지 그대로 완전무결한 삶이다. 그래서 여기에 이런 여러 가지 비유와 중복되는 그런 말씀을 한 생각 풀어놓고 딱 들으면은 아주 재밌고 편안하고 그래요. 그런 경이 화엄경입니다. 그래 딴 경하고 그 양이 첫째 차이가 나고요. 그래서 아주 방대하지요. 말이 좀 많고. 그 대신에 아주 넉넉한 큰 바다와 같은 또 그런 감을 또 우리가 화엄경에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열 가지 비유를 이제 듭니다. 앞에 뭐 설명한 것만 해도 충분한데도 이런 비유를 들어요. (3) 十種譬喩
1. 佛子야 如恒河岸에 有百千億無量餓鬼가 裸形饑渴하며 擧體燋然하며 佛子야 예컨대 저 간지스강, 항하강(恒河江), 우리가 항하강 언덕에 백천억(百千億) 한량없는 아귀(餓鬼)가 있다 이거에요. 그데 아귀가 나형기갈(裸形饑渴)이라..아무것도 뭐 아귀니까 아무것도 옥을 걸친게 없죠. 나경이고 벗은 옷의 몸이고. 그것도 저 배고프고 목 말라해. 항하강 언덕에 있다는 거 잊어버리면 안 돼요. 항하강 언덕에 있으면 뭐 어떻게? 목마르면 내려가서 마시면 될 거 아니에요. 아 강변에 있으니까. 그리고 거체초연(擧體燋然)이라. 온 몸이 그냥 불이 타고 있어요. 갈증으로 불이 타고 있다 이 말이에요. 초연이란 말은. 불탈 초자 불탈 연자에요 이럴 때는. 烏鷲豺狼이 競來搏撮하며 爲渴所逼하야 欲求水飮하며 雖住河邊이나 而不見河하며 設有見者라도 見其枯竭하나니
그리고 오취시랑(烏鷲豺狼)이 경래박촬(競來搏撮)이라. 오(烏) 가마귀 오, 독수리 또 승냥이, 이리,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그 아귀(餓鬼)를 쪼아먹을려고 막 다투어 와 가지고 서로 쫓아와 가지고 그 아귀를 잡아가는 거야. 박촬(搏撮)이라고 하는 것은 막 잡아간다 이 말이야. 그리고 위갈소핍(爲渴所逼)이야. 그런데다 목은 말라 죽겠고. 욕구수음(欲求水飮)이나, 말하자면 물을 마시고자 하지만은. 수주하변(雖住河邊)이나, 물을 마시고자 해서 비록 항하강의 가에 있지마는. 그러나 불견하(不見河)야, 그 항하 강을 보질 못해. 참 문제지요. 항하 강을 보질 못 해. 설유견자(設有見者)라도 설사 항하 강을 보는 아귀가 있다손 치더라도. 견기고갈(見其枯竭), 물이 바짝 마른 걸로 보여. 이 사람 눈에는. 이 아귀의 눈에는 항하강의 그 넘실대는 물도 하나도 없이 바싹 마른강으로 밖에 보이나니. 何以故오 深厚業障之所覆故인달하야 何以故오. 왜냐? 심후업장지소부고(深厚業障之所覆故)ㄴ달하야, 업장이 아주 깊고 두꺼운 업장이 뒤덮여가지고 그렇다 이거야. 업장이 뒤덮여가지고 강에 물이 그렇게 맑은 물이 많이 흐르는데도 못 보고, 설사 본다하더라도 강이 바싹 마른 걸로 보인다. 그렇습니다. 참 우리 업도 가지가지고요. 업 따라서 모든 세상이 달리 보여요. 정말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이렇게 보고 아름답다고 이제 대개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데, 뭐 소나 이런 것은요. 소나 양이나 이런 것은 뭐 뜯어먹을 풀로 보는 거야. 먹을 풀로 본다고요. 그 외에 달리 다른 걸로 못 봐요. ‘아 아름답다’라고 그렇게 못 봐. 그게 업의 차이입니다. 그건 이제 예를 들어서 아주 극단적인 표현으로 사람과 소로 비유를 했지마는 사람에게서도 또 그런 차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그전에 그 6.25직후에 저 경전들이 불교 그 오래된 경전들이 종이가 귀하니까 그걸 가지고 뭐 고춧가루 싸주는 그 종이로 활용하는 경우, 또 그걸 가지고 뭐 이렇게 땅콩 싸 주는 종이로 활용도 하고, 혹 이제 도배도 하고, 도배지로 쓰이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경인 줄 모르는 거야. 그 석보상절(釋譜詳節) 같은 그 국보, 국보급 도서가 그렇게 해서 다 없어진 거 에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같은 그런 책들이 다 지금 있으면 다 국보거든요. 그런데 그런 책들이 거의 그런 식으로 없어진 겁니다. 어떤 스님들은 시장에서 장경(藏經)을 이렇게 내놓고 그렇게 사용하는 것을 단돈 몇 푼주고 다 사고 그랬잖아요. 사다 절로 가져오고 그런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업장 때문에 그런 것을 못 본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데 있는 거지요. 그래 이게 뭐 비유를 아귀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마는 우리도 때로는 뭐 아귀가 되니까요 가끔은. 그러니까 아귀가 되면 이런 업장이 뒤덮여가지고 그렇다. 그래놓고. 何以故오 深厚業障之所覆故인달하야 彼大聲聞도 亦復如是하야 雖復住在逝多林中이나 不見如來廣大神力하나니 捨一切智하야 無明瞖膜이 覆其眼故며 不曾種植薩婆若地諸善根故니라 저 대성문(大聲聞)들도 부처님의 십대제자들도 또한 다시 아귀와 같아가지고서 비록 다시 여기 서다림(逝多林)가운데 화엄경이 설해지고 있는 이 서다림 가운데 머물고는 있긴 있으나 불견여래광대신력(不見如來廣大神力)하나니, 여래의 크고 넓은 신통력의 신력을 보지를 못하나니. 사일체지(捨一切智)하야, 일체지를 버려서. 무명예막(無明瞖膜)이, 무명의 예막(瞖膜), 백태 낄 예자(瞖) 백태 낄 막자(膜)입니다. 우리는 뭐 막이 가렸다 그러죠. 그럴 때 쓰는 막자입니다. 눈에 백태가 끼어가지고 무명의 백태가 끼어가지고 캄캄한 그런 번뇌의 백태가 끼어가지고서 그 눈을 덮고 있는 까닭이며. 부기안(覆其眼) 덮을 부자(覆)입니다. 그 눈을 덮고 있는 까닭이며. 부증종식살바야지제선근고(不曾種植薩婆若地諸善根故)니라. 일찍이 살바야지(薩婆若地)의 모든 선근(善根)을 심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살바야는 일체지(一切智), 모든 지혜,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지혜를 살바야지(薩婆若地)라고 그래요. 그것을 말하자면 일찍이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너무 그 극단적으로 비유를 했죠. 그래도 아무도 할 소리가 없어. 할 말이 없어. 십대제자를 이렇게 몰아붙였어도 이 승단 중심의 편협한 그런 그 소견으로 불교를 오도했다고 한다면은 이런 소리 들어도 싸다 이거야. 그러니까 아무도 이 화엄경이 엉터리 경전이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렇게 소견이 돼 있다면 당연히 들어야할 소리다 이거야.
2. 譬如有人이 於大會中에 昏睡安寢이라가 忽然夢見須彌山頂에 帝釋所住善見大城의 宮殿園林이 種種嚴好하며 天子天女의 百千萬億이 普散天花하야 徧滿其地하며 그 다음에 두 번째 비유. 비여유인(譬如有人)이, 비유하건데 또 어떤 사람이. 어대회중(於大會中)에 큰 모임 큰 법회 가운데에 있으면서 혼수안침(昏睡安寢)이라가. 지금 자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법회가운데에서.. 이 부처님 당시 때도 이런 사람이 많이 있었는가봐 그러니까 경전에 이런 말을 해놓은 거지. 이런 일을 안 봤으면 이런 말을 안 하지. 할 수가 없죠. 아주 편안하게 자는 거야 그냥. 큰 법회 가 가지고는 그냥 편안하게 자는 거야. 혼수안침(昏睡安寢)이야. 편안하게 자다가. 홀연히 그 잠자는 사이에 홀연(忽然)히 꿈을 하나 꿨어. 꿈에 이런 걸 본다 이거여. 수미산위에 수미산정(須彌山頂)에 제석천이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사는데 거기에 선견대성(善見大城)의 궁전원림(宮殿園林)이 선견천(善見天)이라고 아주 훌륭한 성 이름입니다. 큰 선견지(善見地)라고 하는 큰 성이 있고, 그 안에 궁전이 있고, 그 다음에 동산과 숲이 아주 뭐 기가 막히게 잘 꾸며져 있어. 종종엄호(種種嚴好)야. 잘 꾸며져 있으며, 거기에 천자천녀(天子天女)의 말하자면 천왕의 아들과 천왕의 딸들이 백천만억(百千萬億)이나 돼. 보산천화(普散天花)하야, 그들은 이들이 널리 하늘 꽃, 아주 훌륭한 멋진 꽃을 곳곳에 뿌리는데. 변만기지(徧滿其地)에 온 땅에다가 그냥 꽃을 다 뿌려가지고 너무나 아름답게 해 놨다 이거야. 種種衣樹가 出妙衣服하며 種種華樹가 開敷妙華하며 諸音樂樹가 奏天音樂하며 天諸采女가 歌詠美音하며 無量諸天이 於中戱樂하고 其人이 自見着天衣服하고 普於其處에 住止周旋호대 其大會中一切諸人은 雖同一處나 不知不見하나니 그리고 종종의수(種種衣樹)가 요건 이제 종종 옷과 종조의 나무가 출묘의복(出妙衣服)하며, 아름다운 의복을 또 거기서 산출해 내고. 종종화수(種種華樹)가, 종종꽃나무가. 개부묘화(開敷妙華)하며, 아름다운 꽃을 또 피우고. 그리고 제음악수(諸音樂樹)가, 여러 가지 음악을 연주하는 나무가 또 있어. 그 음악을 연주하는 나무가 주천음악(奏天音樂)이라,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또 천제채녀(天諸采女)가 하늘의 여러 채녀들 요건 이제 하늘의 시녀들 택이죠. 그런 이들이 가영미음(歌詠美音),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무량제천(無量諸天)이 어중희악(於中戱樂)하고, 한량없는 하늘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아주 즐기고 논다 이거야. 그런데 그 사람이, 꿈꾸는 그 사람입니다. 꿈꾸는 그 사람이 자견착천의복(自見着天衣服)하고, 스스로 그 하늘의 옷을 떡 자기가 입고. 보어기처(普於其處)라, 널리 그 곳에서 주지주선(住止周旋)한다. 머물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두루두루 이제 구경하러 돌아다니기도 하는 그런 꿈을 떡 꿨다 이거에요. 법회에서 앉아 졸면서 이제 그런 꿈을 떡 꾸었는데... 그런데 이제 그 대회중(大會中)에 일체제인(一切諸人)은 그런데 거기에 법회에 있는 여러 사람들은 어떻게? 수동일처(雖同一處)나, 비록 한 곳에 있어요. 한 자리에 있지. 한 자리에 있지만은 부지불견(不知不見)이야. 이 사람이 그런 꿈을 꿨는지 어쨌는지 이 사람은 그렇게 아름다운 천상세계를 보았는데도 알지를 못하고 보지를 못하나니. 何以故오 夢中所見이 非彼大衆의 所能見故인달하야 一切菩薩世間諸王도 亦復如是하야 以久積集善根力故며 하이고(何以故)오, 왜 그러냐? 몽중소견(夢中所見)이 꿈 가운데 보는 것이 비피대중(非彼大衆)의 소능견고(所能見故)ㄴ달하야, 저 대중들의 능히 보는 바가 아니야. 이 사람은 지 혼자 꿈 꾼 거지 대중은 꿈 꾼 게 아니다 이거야. 일체보살세간제왕(一切菩薩世間諸王)도. 요 구절 그어놔요. 보십시오. 일체보살세간제왕 그랬어요. 여기서 보살이라는 말은 세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간 사람들을. 출가인을 두고 한 소리가 아니에요. 물론 출가인도 보살정신을 가진 사람은 보살이지. 여기서 왕이라고 했다 해서 꼭 뭐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왕은 아니에요. 무슨 바람도 신이고, 물도 신이고, 온갖 것을 다 주풍신중주공신 해서 신이라고 했듯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왕시 王格으로 왕의 격으로 그렇게 볼 때는 세간제왕(世間諸王) 이렇게 합니다. 일체보살(一切菩薩)의 세간(世間) 모든 왕들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또한 다시.. 여러분들도 다 각자 자기 왕이지 뭐. 둘만 있으면 왕이 아니지만 혼자 있으면 다 왕이지요. 그래 독립된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다 이런 의미가 포함돼 있어요.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이구적집선근력고(以久積集善根力故)며 오랫동안 선근력(善根力)을 적집(積集)한 까닭이다. 선근의 힘을 적집해 쌓았기 때문이다. 發一切智廣大願故며 學習一切佛功德故며 修行菩薩莊嚴道故며 圓滿一切智智法故며 滿足普賢諸行願故며 발일체지광대원고(發一切智廣大願故)며, 일체지혜의 광대한 원을 발했기 때문이다. 또 학습일체불공덕(學習一切佛功德)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공덕(功德)을 배우고 익혔기 때문이다. 또 보살의 장엄(莊嚴)한 길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일체(一切)의 지지(智智)의 복(福)을 원만히 했기 때문이다. 일체의 지지 요것도 이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뜻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지지를 원만히 했기 때문이다. 또 보현제행원(普賢諸行願)을 만족히 했기 때문이다. 만족보현제행원(滿足普賢諸行願). 보현보살이 실천하는 여러 가지 수행(修行)과 원력(願力)을 만족하게 했기 때문이다. 趣入一切菩薩智地故며 遊戱一切菩薩所住諸三昧故며 已能觀察一切菩薩智慧境界無障碍故라 그 다음에 취입일체보살지지고(趣入一切菩薩智地故)며 일체보살들의 지혜의 경지에 다 들어갔어. 보살들은 그렇다 이거야. 일체보살세간왕 그랬죠. 일체보살세간왕(一切菩薩世間王)은 전부 이제 그런 경지에 들어갔기 때문이고. 유희일체보살소주제삼매고(遊戱一切菩薩所住諸三昧故)며, 일체보살이 머무는 온갖 삼매에 거기에서 유희(遊戱)한다 노닌다 이거야. 그 속에서 노녀 그냥. 그걸 뭐 삼매(三昧)를 억지로 내가 어떻게 할려고 해서가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놀듯이 그냥 삼매를 누리는 거지요. 그게 유희입니다. 삼매(三昧)에서 유희(遊戱)한다 이거에요. 그래 돼야 공부가 그래 돼야 되는 거지요. 아주 아등바등해서.. 처음에는 아등바등하지만 어느 정도 되면 이제 자연스럽게 쉽게 그래 돼야지요. 운전을 해 보면 그렇죠. 처음에는 막 힘이 들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말이지 익숙하면은 그 다음에는 즐기죠. 드라이브를 이제 즐기는 식으로 되듯이, 삼매도 마찬가지고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처음 하듯이 계속 그렇게 힘들면 어떻게 해요? 계속 그렇게 힘들면 못 하는 거지요. 어느 순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제 그것이 몸에 배고 익숙해져가지고 그때가 유희가 되는 거지요. 노닐 유자(遊), 놀 희자(戱). 또 이능관찰일체보살지혜(已能觀察一切菩薩智慧)의 경계(境界)에 무장애고(無障碍故)라 일체보살들 지혜의 경계에 장애함이 없는 경계를 관찰하는데 장애(障碍)함이 없기 때문이다. 是故로 悉見如來世尊의 不可思議自在神變호대 一切聲聞諸大弟子는 皆不能見하며 皆不能知하나니 以無菩薩淸淨眼故니라 시고(是故)로 이러한 까닭에 실견여래세존(悉見如來世尊)의 다 여래세존의 부사의한 자재신변(自在神變)을 실견 다 보되. 여래세존의 그런 그 신통변화를 다 살펴보되. 일체성문제대제자(一切聲聞諸大弟子)는 개불능견(皆不能見)이야. 일체성문제자들은 못 봐. 보살들은 잘 보는데 부처님 세계를 잘 보는데 성문제자들은 못 보며. 개불능지(皆不能知)하나니 다 능히 알지를 못하나니. 이무보살청정안고(以無菩薩淸淨眼故)니라. 왜냐? 보살의 청정한 눈이 없기 때문이야. 보살의 청정한 눈, 훌륭한 눈, 뛰어난 눈 보살이 갖추고 있는 그 안목이 없어서 못 본다 이겁니다. 뭐 이 육안이 없어서 못 보는 게 아니에요. 육안은 다 있어요. 똑 같애. 그런데 부처님의 세계, 이 화엄경의 세계를 본다고 하는 말은 뭐냐? 말하자면 이해하는 거죠. 이해. 안목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뭐 온갖 그런 비유를 다 들고 하는데 보살은 그런 경지고 성문제자들은 결국은 못 본다 하는 그런 얘기로써 마무리를 짓고 있어요. 그 다음 세 번째입니다. 번호를 매겨놓으세요.
3. 譬如雪山에 具衆藥草하니 비여설산(譬如雪山)에, 비유하건데 설산에 히말라야산이죠. 구중약초(具衆藥草)하니, 온갖 약초를 다 갖추고 있어. 설산에 그 참 뛰어난 약초 많아요. 또 거기 저 히말라야 산 중턱으로 뭐 요즘 네팔에서 무슨 석청? 석청(石淸)이 그 약이 좋다고 해 가지고 그걸 또 우리나라 사기꾼들이 자기들이 가서 캐지도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 대충 제조해가지고 거기서 명현(瞑眩) 현상이 일어나는 약을 거기다 타 가지고는 이게 이제 히말라야에서 캐온 그 저기 석청이다 해 가지고 팔아가지고 어떤 스님이 먹고 죽었어 며칠 전에. 그런 이야기가 떠돌면요 절대 그거 사기입니다. 그 아마 더러 들어보셨을 거 에요. 나도 사기 당했어. 이런 소리 하는 거. 그런데 마침 내한테는 아무 현상이 안 일어났어. 그 명현현상이 일어나는 약을 타 가지고 그러니까 무슨 그런 현상이 일어나니까 ‘아 이거 진짜다’ 그러는 거야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간단하거든요. 그런 약 타면. 그럼 한참 뭐 몽롱하고 뭐 그냥 온 손발이 마비현상이 일어나고 그러는데 고게 잠깐 지나가면 괜찮다는 거라. 한 시간쯤 지나가면. 근데 그게 이제 몸이 약한 사람은 심해 가지고 어떤 스님 돌아가셨어 며칠 전에. 그래가지고 온 전국에 야단이 났어요. 그런 일도 있다구요. 그 어쨌든 그 설산에는 유명한 약이 많아. 그런데 그 약이 히말라야 설산에서 캔 약이 그 석청이 우리나라사람이 가서 캘 수도 없고, 허가도 안하고, 설사 캔다 하더라도 그렇게 많을 리가 없어. 많을 까닭이 없는 거라. 그런데 우리나라 어디든 다 퍼져있어 지금. 곳곳에 퍼져있어요. 나무 곽에다 뭐 이상하게 히말라야 뭐 무슨 그 저기 뭐 네팔에 무슨 그 지도 같은 거 뭐 이런 거 찍어가지고 빨갛게 찍어가지고 이상하게 만들어 가지고. 그까짓 우리나라에서 만들어도 실컷 만드는 거거든요. 그래가지고 판다고요. 히말라야에서 직접 온 것 같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어. 이것만 생각해도 가짜라는 걸 알 수가 있어요.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캐지도 못하고. 그것도 캐는 철에 조금 그저 셀파(Sherpa) 그 사람들이 가서 조금씩 뜯어오는 건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또 그런 특별한 약 좋아하니까. 좋아하니까 뭐 수요(需要)가 있으니까 팔리지요. 良醫詣彼하야 悉能分別이어니와 其諸捕獵放牧之人은 恒住彼山호대 不見其藥인달하야 어쨌든 그 설산에는 훌륭한 약초가 많은데 양의예피(良醫詣彼)하야 양의(良醫)가 아주 훌륭한 의사가 거기에 가 가지고서 예피(詣彼), 거기에 가서. 실능분별(悉能分別)이어니와, 다 능히 분별하거니와. 그런데 의사가 훌륭한 의사가 가서 분별해요. 이건 무슨 약이고 이건 무슨 약이고 하지만은, 거기에 있는 여러 포렵(捕獵)사냥꾼입니다. 방목지인(放牧之人) 요건 목동이에요. 사냥꾼이나 말을 먹이고 양을 먹이는 그런 목동들은 항주피산(恒住彼山)호대, 항상 그 설산 중턱에 머물고 살지만은 불견기약(不見其藥)이야. 그 약을 못 봐요. 볼 안목이 없으니까 못 보지 그 약을 보지 못 하듯이. 此亦如是하야 以諸菩薩은 入智境界하야 具自在力일새 能見如來廣大神變이어니와 諸大弟子는 唯求自利하고 不欲利他하며 唯求自安하고 不欲安他일새 차역여시(此亦如是)하야, 이 일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보살은 지혜의 경계에 입지경계(入智境界)하야, 지경계(智境界)에 들어가서. 구자재력(具自在力)일새, 자재한 힘을 갖출 새. 능견여래광대신변(能見如來廣大神變)이어니와, 능히 여래의 넓고 큰 신통변화를 충분히 보거니와. 그러나 여래의 큰 제자들은 제대제자(諸大弟子)들은, 성문제자지요. 요 잘 새겨야 돼요, 유구자리(唯求自利)야, 오직 자기 이익만 구해. 이 성문제자들은 오직 자기 이익만 구하고. 불욕이타(不欲利他)야. 이타행(利他行)은 하고자 하지를 않는다. 불교는 그게 아닙니다. 불교는 여러분들 마음에 들던 안 들던 이타행하는 거 에요. 그 나름대로 자기 힘이 미치는 데까지 이타행(利他行)하는 게 부처님의 정신이라고요. 그런데 이 부처님의 제자 큰 제자라고 하는 양반들이 오직 자기이익만을 구하고 타리(他利)는 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이익 하도록 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며. 유구자안(唯求自安)하고 오직 자기만 편안할려고 하고. 참 스님들 대고 되게 욕을 해놨네 아주. 욕이 아니라 바른 소리 한 거에요. 이게. 유구자안(唯求自安)이라, 오직 자기 편안함만을 구하고. 불욕안타(不欲安他)야, 딴사람 편안하게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참 아주 똑 떨어지게 이야기 해 놨어요. 자안(自安)일새. 雖在林中이나 不知不見이니라 수재림중(雖在林中)이나 비록 수풀가운데 있으나 부지불견(不知不見)이니라 그 약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느니라. 아주 확실하게 이야기 해 놨어. 이런 이야기들이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너무 편협한 생활을 하고 그 편협한 생활이 어느 한 길로 계속 가다보면 자기들도 모르게 그만 그 속에 휩쓸려가지고 처음에는 이게 아닌데 싶다가 나중에 그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 에요. 그래서 거기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헤어나지 못해서 자기의 어떤 그 생각과 자기의 사고를 타당시하고 당연한 것처럼 이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참 묘해서 자꾸 이제 다른 각도에서 자기 자신 점검하고 살펴보는 그런 노력을 해야 되는데, 뭐 그런 노력 안하고 자기 한 번 생각하면 뭐 이게 당연하고 이게 맞는 길이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 길이다 라고 아무 비평 없이 그냥 그대로 거기에 눌러 앉거든요. 사람들이라는 게 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들도 또 난 옳다고 생각을 하고 상대는 그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게 과연 옳은 것인가? 이걸 자꾸 한 번 점검해 봐야 돼요. 자기 자신을 자꾸 점검해 보고 남의 생각이다 이렇게 두고 제 삼자의 입장이 돼 가지고 그걸 한 번 생각해 보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참 어떻게 보면 상당히 바른 말 이면서도 어떨 땐 조금 심한 표현이기도 하고 그렇지요 그 다음에 한 단락을 더 하지요.
4. 譬如地中에 有諸寶藏하야 種種珍異가 悉皆充滿이어든 有一丈夫가 聰慧明達하야 善能分別一切伏藏하며 其人이 復有大福德力하야 能隨所欲하야 自在而取하야 奉養父母하고 賑卹親屬하며 老病窮乏에 靡不均贍호대 비여지중(譬如地中)에 비유하건데 이거 네 번째입니다. 비유 비유하건데 땅 가운데 유제보장(有諸寶藏)하야 여러 가지 보배 창고가 있어. 땅속에 보배가 있다 이거에요. 그렇지 온갖 좋은 광물질이 땅속에 다 있지요. 있는데... 종종진이(種種珍異)가, 가지가지 아주 진기하고 기이한 것들이. 실개충만(悉皆充滿)이어든, 그 안에 땅 속에 가득히 있어요. 금도 있고요 다이아몬드도 땅 속에 있고. 그런데 유일장부(有一丈夫)가 한 장부가 총혜명달(聰慧明達)해서, 지혜가 아주 뛰어나. 그래서 선능분별일체복장(善能分別一切伏藏)하며, 땅 속에 무엇이 있고 어디에 금이 있고 어디에 다이아몬드가 있는가를 잘 분별한다 이 말이여. 그래서 그 사람이 다시 복덕의 힘도 있어 마침. 볼 줄 알고 복이 없으면 그 자기 것이 안 되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볼 줄 아는 안목도 있고 복덕의 힘도 있어. 그래서 능수소욕(能隨所欲)하야, 능히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자재이취(自在而取)라, 자기가 갖을 만치 실컷 갖는다 이거야. 갖어서. 봉양부모(奉養父母)하고, 부모도 봉양하고 그 다음에 진휼친속(賑卹親屬)이라. 진휼(賑卹)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을 베풀어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또는 재앙을 당했을 때 그런 사람들 구제하는 일을 진휼(賑卹)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가난한 친속들 친부모 권속 친척들 이런 이들을 전부 이제 구제하고 돕기도 하며. 또 노병궁핍(老病窮乏)에, 늙고 병들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미불균섬(靡不均贍)이야, 두루두루 공급하지 아니함이 없어. 요건 이제 공급할 섬(贍), 구제할 섬(贍) 그렇습니다. 두루두루 구제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없을 미, 아닐 미(靡)라고도 하고. 또 그런데 호대 其無智慧無福德人은 雖亦至於寶藏之處나 不知不見하야 不得其益인달하야 그 무지혜무복덕인(無智慧無福德人)은, 그런데 지혜도 없고 복덕도 없는 사람은. 수역지어보장지처(雖亦至於寶藏之處)나, 비록 또한 그 사람하고 똑같이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렀지만은. 부지불견(不知不見)이야, 그 보배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해. 보는 눈이 없으니까, 또 복이 없으니까 복이 없으니까, 그게 눈에 띄지가 않죠. 부득기익(不得其益)인달하야, 그 이익을 얻지 못하듯이. 此亦如是하야 諸大菩薩은 有淨智眼하야 能入如來不可思議甚深境界하며 能見佛神力하며 能入諸法門하며 能遊三昧海하며 能供養諸佛하며 能以正法으로 開悟衆生하며 能以四攝으로 攝受衆生이어니와 諸大聲聞은 不能得見如來神力하며 亦不能見諸菩薩衆이니라 차역여시(此亦如是)하야, 이 일도 또한 이와 같아서. 제대보살(諸大菩薩)은 유정지안(有淨智眼)하야. 보살들은 청정한 지혜의 눈이 있어. 그래서 능입여래불가사의심심경계(能入如來不可思議甚深境界)하며, 여래의 불가사의한 깊고 깊은 그런 경계에 능히 들어가며, 부처님의 신력을 능히 보며, 또 모든 법의 세계, 법문(法門)에 능히 또 들어가며, 삼매의 바다에 능히 노닐며, 또 모든 부처님을 능히 공양하며, 또 능히 정법으로써 중생들을 개오해, 깨닫게 한다 이거에요. 깨닫게 하며. 능히 사섭(四攝)으로써 사섭은 이제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 그러죠. 베푸는 일, 아주 그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일, 그 다음에 상대에게 이로운 행동, 그 다음에 상대하고 또 같이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 이것이 보시 애어 이행 동사, 사섭법(四攝法)인데 누구를 말하자면 어디로 인도할려면 요 네 가지가 필수적이다 이거에요. 그 사람에게 일단 잘 대해줘야 말을 듣게 되니까요. 그래서 섭수중생(攝受衆生)이어니와, 중생을 섭수하거니와. 제대성문(諸大聲聞)은, 여러 성문들은. 불능득견여래신력(不能得見如來神力)하며, 여래의 신통력을 보지를 못 하고. 역불능견제보살중(亦不能見諸菩薩衆)이니라, 여러 보살대중들도 능히 그 보살이지만은 보살의 어떤 경계, 보살의 정신세계를 능히 보지를 못한다. 여기에 이제 아주 보배의 이야기를 했고 한데 금강경에도 그랬죠. 보면 지혜의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은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이라. 어떤 사람이 눈도 있고 또 밝은 태양도 있어서 모든 사물을 환히 알아보는 거와 같다. 또 지혜의 눈이 없는 사람은 말하자면 눈도 어둡고 태양도 없어가지고 아무 사물도 보지 못하는 거와 같다. 이런 식으로 이제 표현을 해 놨거든요. 여기도 딱 그 이야기인데 결국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산다는 게 우리는 우리 상식만치 보니까 자기 인생이 별 볼일 없어요. 그런데 자기의 어떤 상식과 지혜를 갈고 닦아 부처님의 지혜 성인의 지혜 이런 것을 자꾸 빌어서 내 지혜로 원융을 하게 되면 결국은 내 인생에 대한 깊이 내 인생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발견하게 돼요 절로 결국은. 그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 소중한 삶의 가치를 누리고 살면서도 그 가치 있다고 못 보는 것이 그만치 지혜가 없어서 그래요. 여기 있는 구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 밝은 눈, 지혜의 밝은 눈을 가지면 구석구석이 보물 투성이야. 여기 보십시오. 아 이 땅에 보물이 그렇게 많은데도 지혜 있는 사람, 복덕이 있는 사람은 남도 돕기도 하고 자기도 쓰고 이렇게 맘대로 쓰는데 지혜도 없고 안목이 없는 사람은 그 장소에 있으면서도 못 본다고 그랬잖아요. 그게 이제 무슨 말인고 하면은 이건 비유로써 들었지만은 사실은 우리가 똑 같은 인생을 살지만은 인생에 대한 안목이 얼마만치나 어느 정도의 안목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그 자기의 어떤 그 가치를 누리는 것이 전혀 달라요. 사람들 따라서 그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이제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안목을 넓히고 인생에 대한 실상, 인생에 대한 어떤 그 의미를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뭐 그게 이제 우리에게는 가장 시급하게 주어진 임무다. 그랬을 때 참 정말 우리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무슨 벼슬도 더 하지도 않고 돈도 더 벌지도 않은 현재의 상태 그대로 정말 그 소중함을 정말 값진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무엇보다도 그게 제일 중요해요 사실은. 그래서 이제 그러한 것들이 이러한 가르침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아주 비유가 여러 가지 비유를 하면서 단순하게 뭐 보살의 경지와 성문의 경지가 차이가 있다하는 것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주 우리들에게 아주 많은 그런 그 교훈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제 보아집니다. 오늘 화엄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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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엔 아주 중요한 대목이 강의됩니다. 글이 무척 길지만 파랑새님이 일일이 중요 부분을 글자를 진하게 하고 색깔을 넣어 놓으셨네요 읽기가 지루하신 분은 파랑새님이 강조해 놓으신 부분만 골라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파랑새님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_()_
저는 화엄경의 이 부분을 참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이 내용은 입법계품에만 나오는데, 제 기억으로는 40 화엄이 80화엄보다 이 부분은 좀더 길고 자세히 기록된 것 같습니다.
화엄, 그리고 보현행원을 전하며 제가 얼마나 많은 은산철벽을 만나는지, 우리 카페 불자님들을 모르실 겁니다. 정말 일부 불자님들-그것도 공부도 수행도 경계도 훌륭한 고수급 불자님들로부터 온갖 이상한 말씀을 들을 때의 충격,감은 정말 말을 드리리가 어려울 정도로 큽니다. 공부도 형편없고 경계가 로인 불자님들이야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정말 공부도 어느 정도 되고 말도 통하겠다 싶은 불자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제가 며칠을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요...그건 보현행원 공부를 한 지 14년째인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현행원을 비판()하는 말씀을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보현행원을 하나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저는 압지요 모르니까 당신이 겉만 보고 이해한 보현의 소식을 보현의 골수인 줄 알고 당신의 경계에서 당신의 안목으로 말씀들을 그렇게 하시는 거거든요 알면 당연히 그렇게 말씀 아니 하시지요그런데 그 분들은 당신의 보현 공부가 미진하다는 걸 당연히 모르세요 그리고 당신의 보현 공부 경계와 저의 보현 공부 경계가 같은 줄 알고, 당신의 보현으로 저의 보현을 마구 평가하시지요. 그러니 그런 분들 앞에 '당신은 보현행원을 모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들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분들인데..
그래서 보현행원 전하기가 참 힘듭니다. 보현행원 공부를 부디 해 보시라 불교의 요체가 모두 보현행원에 있다 당신의 공부에 보현의 소식이 더해지면 참으로 완벽해진다...이렇게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다들 요지부동이십니다. 그저 제가 보현행원에 미치고 집착하는, 그래서 보현행원만 제일이다 주장하는 가엾은 사람으로 보시지요. 선사가 선만 제일이고 염불행자가 염불만 최고로 치시듯,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로 보신단 말입니다..
이럴 때 경전의 이 부분이 늘 머리에 떠 오릅지요. 하기사, 화엄경을 읽어 보시지도 않은 분들이, 읽어도 십지품 정도만 읽고 화엄의 요지를 다 아시는 듯 하는 분들이, 보현행원을 제대로 공부해 보신 적도 없는 분들이, 그래서 그럴 때마다 화엄의 이 부분이 머리에 늘 떠 오르지만 그 분들이 당신들의 화엄 이해에 이런 이유가 있다는 걸 아실 리가 있겠습니까...그저 답답할 뿐이지요...
화엄은 기존 불교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전혀다른 불교입니다. 그러니 화엄을 읽을 때는, 무비스님도 강의 중에 그런 말씀을 언급하시지만, 기존의 불교 공부 방식을 잠시 접어 두셔야 합니다.그런데 이런 말씀조차 이해 못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이시니, 이 막막한 불교계를 어떻게 화엄을 전해 드려야할지..........
파랑새님, 오늘도 정성 들인 공양 감사합니다. 솔직히 지난번 공양 다 못 읽었는데... 어김없이 1주일이 지나 숙제로 남는군요. 마음 편하게 술술 읽으시라고 하니 꼭 편안하게 읽어나가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서서히 보현행원의 물이 스며들기를 발원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 항상 고맙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엄청난 공양 잼나게 편하게 받고 있읍니다. 이렇게 쉽게 화엄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저에게는 최상의 공양입지요 ^^ 묵묵히 삼배..._()__()__()_
화엄경을 공부하는 인연이 이런 수승한 인연인줄 처음 알았습니다 이인연 잡아주신 부처님께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저 부처님은혜 갚을 날 꼭 오기를 바랄뿐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큰 가르침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도록 원을 세워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