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9월 10일 <금희의 오월> 박효선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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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이 붙은 영화가 참 많다. 아무래도 일본의 영향이 ㄴ껴진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고전 <7인의 사무라이>가 있었고 그리고 그걸 베낀 <황야의 7인>이 있는가 하면 원제는 전혀 다르지만 <새벽의 7인>으로 번역된 영화가 있었고, 역시 원제가 아니지만 진 해크먼 주연의 <지옥의 7인>도 있었다. 꼭 일본풍만은 아닌 것이 헐리우드에서 <7인의 신부>도 나왔고 이만희 감동의 <7인의 여포로>도 끼어든다. 행운의 7은 아닌 것 같고 뭔가 완성된(?) 느낌의 숫자여서 그런가 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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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도 ‘7인’이 있다. 이른바 ‘들불 열사’ 7인들이다. 광주 지역의 노동 야학이었던 ‘들불 야학’ 출신으로서 광주항쟁 동안, 그리고 그를 전후하여 숨져간 일곱 명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를 낳았던 <빛의 결혼식>의 주인공 윤상원과 박기순, 80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 광주의 마지막날 YMCA를 사수하다가 죽어간 박용준, 역시 광주의 마지막을 지키다가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이상을 일으켰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 김영철, 박관현과 함께 수십일간 옥중 단식투쟁을 하며 전두환 정권에 맞섰고 출소 후 과로로 사망한 신영일. 그리고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그러나 얼마 살지 못하고 1998년 9월 10일 나이 마흔 넷에 숨을 거둔 박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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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선은 광주항쟁 도청 지도부의 홍보부장이었다. 그의 지명 수배 전단에도 ‘자칭 홍보부장’이라고 돼 있으니 빼박 자타공인(?)의 항쟁 지도부였던 셈이다. 70년대 말 마당극을 연출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그는 집회의 명기획자이자 탁월한 진행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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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광주항쟁을 짓밟기 위한 무력이 광주 일원을 철통같이 봉쇄하던 그날, 도청 광장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를 거대한 집회이자 축제였고 집체극의 무대로 만들어 버린 이가 그였다. 임철우의 소설 <봄날>에서 다른 사람들이 글자 하나 바꾼 소설 속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반해 박효선은 유일하게 실명으로 등장한다. 임철우는 그와 유달리 친했고 그의 단편 <동행>의 모델인 그에게는 소설 속 가명을 씌우기 싫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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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의지는 같았지만 최후의 시간은 갈렸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그리고 고아 출신으로 구두닦이를 하며 고등학교를 나와 YWCA 신협 직원으로 일하면서 들불야학에 함께 했던 박용준은 계엄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박효선도 거기에 있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빠져 나왔다. 살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윤상원인들 살고 싶지 않았을까. 그저 순간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그에게 평생의 짐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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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은 내가 5월 광주로부터 도피했다는 사실이다. 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 야심한 밤 총을 든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달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며 집으로 향했다. 난 골방 속에 숨어서 총소리가 멈출 때까지 오들오들 떨며 앉아 있었다.” 그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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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그가 떨고 있을 때 죽어간 사람들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아니 지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모든 걸 용서하시고 세상에 관용과 사랑을!…..”이라고 마지막으로 일기에 쓰고 죽어간 고아 출신 청년 박용준을 어떻게 잊겠는가. 고등학생들은 모두 나가라고 내몰면서도 자신은 미동도 않고 싸우다 죽은 윤상원을 어떻게 지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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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개의 바늘이 기계처럼 돌아가면서 온몸을 찔러내는 했을 그 고통을 황광우는 이렇게 묘사한다. “서울에서 오월을 보낸 우리들도 괴로웠는데, 효선의 경우 그 아픔이 얼마나 깊었을까? 효선의 영혼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악마의 속삭임은 얼마나 집요했을까? ‘너 도망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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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살았으되 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망가진 김영철 앞에서 그는 또 한 번 무너졌다. “ (영철이) 형은 또 삽을 들고 어머니의 무덤으로 갔다. 형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고 주장했다. 고문은 형을 죽였다.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모서리에 이마를 찍었다.” 또 한 번 악마가 뇌까렸겠지. “이 도망자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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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는 되었으되 배신자가 될 수 없었던 박효선이 자신이 한 일은 자신의 장기를 살리는 일이었다. 글을 쓰고 희곡을 짓고 연극을 무대에 올려 광주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먼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업이었다. 우리 연극사에 남을 광주 소재 연극 <금희의 오월>은 그의 대표작이자 도망자의 멍에를 벗고자 하는 몸부림이요, 폭도의 멍에를 명예로 바꾸는 혁명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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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주인공 금희는 실제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 이정연도 실제 인물이다. “공부를 잘해서 상고를 나와 전남대 사범대에 들어갔던 오빠. 그렇게 집안의 든든한 맏아들이었던 이정연은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계엄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었음에도, 다시 시민군이 지키던 도청으로 들어가 학살자들에게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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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가 들이쳤던 27일, 그는 도청 앞 정문에서 이마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고 나흘이 지나서야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들이 오빠의 방에서 숨죽여 울던 그 시간들이 일곱 해로 쌓이자, 이금희는 오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권경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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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선은 이 사연에 주목했고 다큐멘터리 같은 대본을 쓴다. 주인공 정연은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날 집으로 돌아온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어머니. 하늘이 도왔다며 춤을 출 듯한 어머니. 하지만 이정연은 다시 이를 악문다. 어쩌면 그 순간 박효선은 다른 의미로 이정연에게 빙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못했던 일, 내뱉지 못한 결의를 그의 입으로 풀어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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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집에 들어왔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제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비겁함이 남아 있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식구들 사랑을 핑계로 내가 집안에 갇히게 되기를 속으로 바랐던 겁니다. 아 그러나 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전 이 도시를. 이 나라를 너무 사랑하니까요...... 돌아올 수만 있다면 꼭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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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을 쓰면서 그는 얼마나 울었을까. 죽어간 친구, 미쳐 버린 친구 앞에서 무너져 내린 그의 심장의 조각 조각을 이어 쓰는 심정이었을 것 같다. 아마도 실제 인물 이정연이 그의 일기에 써놓았던 구절을 읊조리며 글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아무 것도 헛됨은 없어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 괴로움 당했던 것, 아무 것도 헛됨은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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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선은 그 후에도 광주에서 떠나지 못했다. 금희의 오월을 들고 세계 각지를 누볐고 광주항쟁 당시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한 주부의 사연을 그린 <모란꽃>을 썼고 다큐드라마 ‘시민군 윤상원’을 제작했고 광주항쟁 후 미국에 밀항했던 윤한봉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와 한몸이라 할 극단 <토박이>에서는 그렇게도 박효선이 죄스러워하던 김영철의 가족을 주인공으로 한 <청실홍실>을 무대에 올린다. 오늘날 광주를 그린 3대 연극 <금희의 오월> <모란꽃> <청실홍실>이 모두 그와 연계돼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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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한 날 한 시에 죽지는 못하였으되 시민군 홍보부장이었던 그는 필생의 작업으로 죽은 이들을 되살려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고 광주라는 이름을 굵고도 진하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심어 넣었다. 이제 광주를 놓으라고, 광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는 광주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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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암으로 젊디 젊은 나이에 동료들을 따라가는 순간에도 그는 임종 기도를 올리는 목사에게 토로했다. “목사님 그 날 이후 저는 하루도 편안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1998년 9월 10일 들불 ‘7열사’의 한 자리를 채우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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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광주는 6.25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시대다. 내 딸에게 광주는 나의 6.25보다도 멀다. 하지만 멀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역사는 단순히 멀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라지게 된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는 것이니까. 우리에게는 아직 이야기가 부족하다. 6.25도 마찬가지고 광주도 마찬가지다. 박효선은 어쩌면 도망자로 운명지워졌는지도 모른다. 그가 도망하였기에 우리는 금희의 오월을 만나고 <모란꽃>과 마주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는 갔지만 전두환은 아직도 골프 치고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아직도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