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슬로바키아의 붉은성을 보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출발했다. 오스트리아에 들어서자 바로 국경근처 주유소에 들려 비넷을 샀다. 비넷은 고속도로 통행증, 차 앞유리에 부칠수 있게 스티커로 되어있는 데 여기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이렇게 징수한다. 고속도로에 요금을 징수하기위한 톨게이트가 없고 이렇게 통행증을 사도록 해서 대신한다.
그리곤 비넷없이 다니다가 단속에 걸리면 벌금을 물게 한다. 10일 짜리가 8.9유로, 하루나 5일등 10일 이하짜리가 없어서 10일짜리로 샀다. 이돈 안내고도 다닐수는 있는 데 걸리면 큰돈을 벌금으로 내야 된다. 우리는 오늘 비엔나 근처의 캠핑장으로 숙소를 정했다.
이곳 오스트리아는 소득수준(실질소득 1인당 47,900불 2017 미CIA)이 높은 고물가 국가라 하루 100유로 미만의 숙소를 찾기 어려웠다. 우리가 잡은 캠핑장은 5인이 하루 55유로. 비엔나 도나우강변의 뉴도나우캠핑장에 들었다. 2박을 하면서 도착 다음날은 센부른궁을, 그 다음날은 시내를 관광했다.
오스트리아는 인구 850만 면적 8만4천평방키로로 한반도의 1/3보다 조금 크다. 19세기말까지 유럽의 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1866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지면서 독일연방에서의 주도권을 뺏기고 베니스와 이태리북부를 잃었다. 그리고 다시 1914년 발발한 제1차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동맹국편, 동맹국이 패전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항가리,체코,슬로바키아등이 떨어져나가고, 오스트리아제국의 영토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폴란드에게 할양당하고 현재의 작은 나라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근원은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로 올라간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17, 18세기 유럽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다. 1804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1제국 성립을 선포하자 이에 대항하여 황제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수립하였다.
1809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수도 빈까지 점령당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 굴복하여, 1810년에는 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과 혼인하게 된다. 그러나 1813년 오스트리아는 다시 프랑스와 싸워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고 프랑스군을 독일 지역에서 몰아냈다. 1814년 파리를 점령하였고, 나폴레옹의 제국은 붕괴된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열린 빈 회의를 이끌며 롬바르디아, 티롤, 달마티아, 베네치아 등의 영토를 회복했을 뿐 아니라, 독일 내 여러 군소 국가들의 맹주이자 유럽 최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1차대전 패전 이후 소국으로 전락하였다. 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는 빈(비엔나)으로 182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 슬로바키아 남서국경 카스타에 있는 13세기에 지어진 성
붉은성주변의 풍경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의 내부
붉은성(Červený Kameň Castle)의 내부
쇤브룬 궁전(독일어: Schloss Schönbrunn)은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로코코 형식 여름 별궁으로 1,441개의 방이 있다.
쇤브룬 궁전,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궁전이자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이며, 문화적으로도 가장 뜻 깊은 곳 중 하나이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은 한 시절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품격과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쇤브룬 궁전
쇤브룬 궁전, 50만평에 이르는 그 대지와 궁궐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 되었으며 쇤브룬 공원 안에 있는 빈 동물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다
쇤브룬 궁전, 156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가 카터부르크 지역을 매입하였는데 그곳이 지금의 쇤브룬 궁전 터이다. 궁전 내의 공원과 다른 건물이 다 이곳에 있다.
황제는 이곳에 관심을 보였고 처음에는 동물원을 만들었다. 후에 그는 새로이 정원을 꾸미게 하였고 진기한 식물을 가져다가 식물원을 만들게 된다. 그런 이유로 그는 쇤브룬 정원의 창조자로 불린다.
쇤브룬 궁전, 쇤브룬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우물이라는 뜻으로서 빈의 왕궁이 인근의 물을 썼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쇤브룬 궁전, 오스트리아 왕족의 다수가 이곳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고 사냥을 하기도 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공격을 당하면서 성 전체가 복구 불능 상태까지 가기도 했다
쇤브룬 궁전, 레오폴드 1세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어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에게 새로운 궁전을 지을 것을 명하였다. 그가 지은 첫 번째 도안은 상당히 유토피아적인 것으로서 고전과 근대의 조합을 꿈꾸었고 두 번째 도안에서는 이를 수정해 현실적인 건물 도안으로 변경하였다.
건축은 1696년 시작되어 3년 후에 첫 왕가 축제가 이곳에서 열렸다.
쇤브룬 궁전, 가장 초기 궁전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황제들 각기 모두 장식을 추가하거나 내부의 배치 등을 변경하였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건축가 니콜로 파카시에게 로코코 양식으로 궁전을 건축할 것을 명하였고 황제의 결정에 따라 오스트리아 황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쇤브룬 궁전이 완성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칼스 교회
빈은 도나우 강변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이다. 인구는 약 182만 명이다. (2013년 기준)
원시 시대부터 현재의 빈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고, 기원전 15년에 로마군이 경계선을 세워 “빈드보나”라고 이름을 지었다.
게르만족이 차지할 때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800년대 후반에는 마자르족이 빈을 통치하였다. 독일 황제군이 900년대 후반에 빈을 정복하였다.
1273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리로서 번영하였다.
교통의 요지여서 11세기에는 십자군의 통로로서 융성하였고, 15세기 이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하였다. 전성기 시절엔 인구 200만을 넘나드는 대도시였다.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두 차례(1529년, 1683년) 빈 문턱 앞까지 왔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군이 두 번이나 빈을 공략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빈에서 《꿈의 해석》을 출간한 1900년경, 빈은 다소 고색창연하기는 하지만 우아한 대도시로 비쳐졌다.
슈테판 대성당, 도시 한가운데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서 있다. 대성당의 고딕식 첨탑은 바로크 스타일의 여러 교회를 보듬고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빈 시청,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군이 빈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 소련군의 공세로 벌어진 빈 공세는 베를린 공방전 다음으로 치열하였다.
1955년까지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점령 아래 있었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인이 대부분이며, 소수의 체코인, 헝가리인도 살고 있다
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
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
호프부르크 왕궁(독일어: Hofburg)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또다른 궁전이다. 건물 가운데에는 오스트리아 연방 대통령의 관저가 있다. 빈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라츠 시청
그라츠 시청
그라츠 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