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없는 ‘중도의 길’로 가라
불교사상의 핵심인 중도(中道)의 가르침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도가 불교의 종교적 완성을 위한 실천수행의 원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상과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불교의 철학적 안목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제시한 중도는 처음에는 불교도들이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잡아함 9권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에 나오는 ‘거문고 줄의 비유’ 는 중도의 내용을 설명해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소나라는 비구가 있었다.
소나란 황금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이름은 그가 부잣집 아들로서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청년이어서 붙여진 듯하다.
그는 라자가하의 쓸쓸한 숲(寒林)에 들어가 고행에 가까운 수행을 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그는 실망 끝에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번뇌를 다 소멸하지 못했다.
나는 집에 재물이 많다.
그것만 있으면 세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차라리 환속해서 널리 보시를 행하면서 복이나 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소나비구의 고민을 안 부처님은 어느 날 조용히 그를 불러 상담했다.
"소나여, 그대는 집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탔다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집에 있을 때 악기를 잘 다루었습니다."
"어떠한가.
거문고는 어떻게 했을 때 가장 미묘한 소리가 나는가?"
"거문고는 줄을 너무 팽팽하게 조이거나 너무 느슨하게 하면 미묘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조율해주어야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수행도 그와 같다.
너무 급하면 오히려 피곤해지고, 반대로 너무 느슨하면 게을러진다.
수행자는 너무 급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수행해야 한다."
소나 비구는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 중도적 방법으로 수행했다.
그것은 팔정도(八正道)로 불리는 정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를 급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닦아가는 수행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중도는 실천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된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극단적 고행이나 쾌락을 떠난 적당한 방법을 실천하라(離邊處中)’는 의미를 갖는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이 이처럼 중도수행을 강조한 것은 절실한 자기체험에 따른 것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부처님은 수행자 시절 극단적인 고행을 했었다.
그것은 하루에 쌀을 한 톨씩 먹는다든가, 몇날며칠을 잠을 자지 않는다든가 하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얻은 것은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건강의 쇠약에서 오는 정신의 혼미였다.
굶주림의 결과는 음식에 대한 무한욕망을 부채질했다.
고행의 무익함을 깨달은 부처님은 강물에 들어가 목욕하고 수자타라는 처녀가 끓여주는 유미죽을 먹고 원기를 회복했다.
그 뒤 보리수 아래로 자리를 옮겨 앉아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적절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명상을 거듭한 끝에 깨달음을 성취했다.
부처님은 이 경에서 소나에게 스스로 체험한 수행법을 가르친 것이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이 같은 방법과 가르침을 '중도(中道)'라고 이름 붙였다.
양극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적절한 방법이란 뜻에서다.
중도의 실천은 인생살이의 방법으로서도 중요한 암시를 준다.
극단적인 쾌락은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환각적 쾌락을 위해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한 사람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
술이나 여자, 도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패가망신담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반대로 지나친 도덕적 엄숙주의도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원리원칙과 꼬장꼬장함은 미덕이지만 융통성이 없으면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극단적 쾌락주의나 그 반대인 도덕적 엄숙주의는 모두 피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중도의 길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중도의 길은 불교의 철학사상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이론으로 발전했다.
대승불교는 두 개의 대립적 개념을 극복한 '반야(般若)의 지혜'를 강조하는데 이는 바로 중도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 이론의 선구적 완성자는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용수(龍樹)가 쓴 <중론(中論)>에 잘 나타나 있다.
용수는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을 인식할 때 여덟 가지 편견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생겨난다든가(生) 없어진다든가(滅) 간다든가(去) 온다든가(來) 같다든가(一) 같지 않다든가(異) 일시적이라든가(斷) 영원하다든가(常) 하는 집착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관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그야말로 편견에 불과하다.
옛사람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봄에는 금강, 여름에는 봉래, 가을에는 풍악, 겨울에는 개골로 불렀다고 한다.
이는 동일한 사물이나 현상도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느낌과 이름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도철학의 이 같은 관점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고전상대론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모두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도시락을 먹는 경우 밥알은 정지된 것인가 움직이는 것인가.
기차 안에 있는 사람은 밥알은 정지돼 있다고 하겠지만 기차 밖에 있는 사람은 밥알이 시속 200Km로 날아간다고 볼 수 있다.
속도란 이렇게 관측하는 사람과 관측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의 맥락에서만 정의된다.
이를 불교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 이라고 한다.
같은 물이라도 천상의 사람이 보면 유리장식으로 된 보배로 보이고, 인간이 보면 마시는 물, 물고기 보면 사는 집, 아귀가 보면 피고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거불래(不去不來) 불일불이(不一不異) 부단불상(不斷不常)을 강조했다.
여덟 가지 극단적 견해가 부정된 중도(八不中道)야 말로 ‘참된 진리(般若)’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러한 중도의 철학을 강조하는 뜻은 다른데 있지 않다.
자기가 보는 금강산만이 금강산이라고 우기는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릇된 집착은 인간만사 모든 시비와 분열과 쟁투를 가져오는 원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도의 가르침은 극단적 이념대립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주목해야할 철학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는 사색당쟁으로 사람을 나누고, 광복 이후에는 극단적인 좌우대립으로 나라를 분열시켰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싸우고 피를 흘렸던가.
이를 생각하면 이념적 대립과 갈등은 지긋지긋한 비극의 골짜기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비극이 다시 재연될 조짐이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가 겪는 진보와 보수의 좌우 이념 대립은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도무지 상대적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초래할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분열과 투쟁, 그로 인한 엄청난 소모적 싸움과 보상 없는 상처뿐이다.
좌우대립의 이념적 갈등을 치유할 방법은 자기생각만이 완벽한 진리라고 믿는 이데올로기적 집착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주의자 되라는 것이 아니다.
항상 힘 있는 쪽에 빌붙기 위해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기회주의와도 다르다.
부처님이 가르친 중도는 집착에 의한 삿된 길(偏則邪)이 아니다.
편견 없는 지혜로 발견한 바른 길(中則正)이다.
중도의 길을 가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편견 없는 바른 길'을 가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한 팔정도가 바로 그 길이다.
우리는 팔정도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중도를 실천할 수 있다.
중도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자기생각만 옳고, 자기 욕심만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편견과 집착에서 해탈해야 한다.
남이 가는 길도 서울가는 길이라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출신활로(出身活路)는 거기에서 열린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지리산 칠불암 운상선원에 가면 다음과 같은 멋진 선게(禪偈)가 있다.
새겨서 음미해볼 일이다.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것만 훌륭한 것이 아니다. (得樹攀枝未足貴)
벼랑에서 손을 놓을줄 알아야 대장부라 하리라. (懸崖撒手丈夫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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