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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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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새 일판을 꾸리자
약 두 달 반 동안 산 안에 있다가 이제 내려와 다원 동네에서 첫 밤을 자고 그 이튿날 낮이 되어 새로운 지도원
동지와 마주 대하니 영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지도원 동지도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검은 조끼에 흰 핫바지저고리의 차림에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나갔다. 나는 그 모습에서 뭔가 다른 세상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좀 어리숭한 느낌이 들어 멍하니 앉아 있었더니 금방 흰 핫바지저고리에 검정 조끼에다 고무신 한 켤레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지금 정세가 많이 급박해서 거기에 걸맞은 차림을 해야 하오. 이제부터 동무는 이집 작은 머슴으로 어제 저녁 이집 상머슴인 최 씨
아저씨의 먼촌 일가 총각으로 행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름도 걸맞게 붙여야지요. 가명의 성은 최 씨하고 일가이기에 최가로 하고
이름을 덕생이보다 덕출이라고 합시다. 그래서 이집 사람들은 모두 동무를 보고 ‘덕출아!’라고 부르며 하대를 합니다. 거기에 대해
조금도 언짢게 생각지 마시오. 나이는 열일곱 살로 하고요. 고향은 부북면 덕실로 합시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는 잘
모른다.’고만 하고, ‘아재에게 물어보라.’고만 하기요.”
“그리고 언제나 덤덤한 인상을 하고 눈도 언제나 내리깔고 좀 모자라는 듯 하게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인상으로야 누가
머슴이라고 하겠소. 입도 다물고 있지 말고 헤벌쭉하게 해서, 좀 넋 빠진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요.”
그리고 나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셨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매무새를 보이면서 헤벌쭉한 얼굴로 해서 보이자, 지도원 동지는 허리를 잡고 웃는다. 거울이 있었더라면 나도 허리를 잡고 크게 웃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말했다.
“어째 그리 갑자기 멍청한 사람이 되어 나타났노! 됐어, 됐어. 그만하면 이집 작은 머슴으로 합격이요.”
“됐어. 오늘 「향보단」 훈련이 있는데 거기 가서 동네사람들과 얼굴도 익히고 함께 가자. 그런데 동무 이제부터 동무에게 말을 하대를 하네. 나보고 이제부터 ‘청도샌님’이라고 부르기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앞집 초당으로 가자. 거기에 ‘덕출이’ 방을 마련해 두었다네. 그 방에는 어떤 사람도 들지 못하게 해라. 자네 봇짐도
문제이지만 자네 가지고 있는 ‘돼지다리’(拳銃)도 남이 절대보아서는 안 돼지. 그래서 자네가 있을 때는 방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자네가 없을 땐 바깥에서 잠거 놓아야 하네. 특히 무기관리는 철두철미 조금도 틈을 보여서는 안 되고!”
“예, 알겠습니다.”
당시 농촌에는 머슴들이 잠도 자고 짚신도 삼고 술도 한잔 하는 마을 공동의 초가집이 있었다. 이를 초당 또는 ‘초당 방’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나는 특별히 초당의 독방을 얻은 셈이다.
지도원 동지는 나의 키슬링을 메고 갔다. 나는 창날이 든 작대기만 들고 초당으로 갔다. 초당은 이집 대문 앞 밭 너머에 싸릿대로
엮은 울타리로 둘러싸이고, 앞마당도 좀 있는 초가집이었다. 집은 남향인데 남쪽에는 반간 폭 되는 들마루가 있고 간반짜리 방이
나란히 두 칸이 있다. 그 두 방은 안에는 널찍한 미닫이로 가려져 있어 방 이용에 편하도록 했다. 집의 서쪽 두 간은 남쪽이
정지간이고 안쪽은 방문이 뒤 안으로 나 있는 방인데 방 앞에는 좁다란 널마루를 붙여놓고 미닫이문으로 들고나게 되어있다.
꼭 내가 오는 것을 알고 만든 것 같은 방이다. 이미 그 방문에는 큼직한 자물통이 걸려있다. 청도샌님은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열쇠를 가지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은 깨끗한 삿자리를 노랗게 깐 온돌이고 앞 부엌 쪽은 막혀있는데 중방 위에는 미닫이문으로 여닫는 좁다란 다락도 있다. 벽은
적갈색 황토로 새벽을 깨끗이 했고 오른쪽 바깥벽에는 서까래에 매단 삼 줄에 긴 옷걸이 장대가 매달려 있다. 안쪽 벽 구석에는
깨끗이 꾸민 무명베 솜 요이불이 단정하게 개어있다.
이만하면 그야말로 흡족한 대접이다. 아마 당에서는 할아버지의 손자라고 이미 알고 있어서 그렇게 배려한 것 같았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아직도 평양에 계실까. 일 다 마치시고 내려오셨을까. 밀양에 와 계실까. 상념으로 마음은 그야말로 왔다
갔다 했다.
조금 앉았다가 시계를 보니 아홉시 반이 넘었다. 열시가 집합시간이란다. 오늘 그 시간에 산외면 「향보단」 훈련이 있다는 것이다.
「향보단」은 1948년 4월 중순에 당시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의 명령으로 5.10남조선단독선거를 무사히 치루기 위하여 만든 관제단체이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유엔선거감시단의 ‘감시가능지역선거’ 실시를 제안한 미국측 제안이 결의, 채택됨으로써 결정된
5·10선거를 앞두고. 이 「남조선단독선거」에 대하여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계열의 이른바 민족주의진영도 이를 반대하고 이
5·10선거에 불참한다는 태도를 선언했고, 남노당과 민전산하의 정당·사회단체들의 파괴와 소요를 우려하고 했고 이 선거반대운동은
날로 격화되고 있었다.
당시 남조선의 3만 군정경찰만으로는 1만 3천이 넘는 투표소의 경비가 불안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 군정 당국은 경찰부 아래에 이 「향보단」이라는 봉건시대의 「보갑제도」를 본뜬 단체를 조직했다.
이는 전국 각지의 우익청년단원을 간부로 해서 조직했고 이른바 좌익계열의 파괴와 소요를 방지하고, 이른바 5·10총선거를 무사히 치른다는 것이 그 목적이라 했다.
그러나 이 「향보단」은 나중에 다시 말하지만 「유엔조선위원단」이 미 군정에 의하여 조직된 ‘준경찰조직’이라 했고,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이러한 선거로는
“만족한다는 뜻을 도저히 나타낼 도리가 없고, 경찰의 압력을 나타내는 수많은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주1)
다원에서 산외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까지는 1킬로미터 좀 넘을까 하는 거리이다. 둘은 그 집을 나와 거기에서 학교로 갔다.
당시 「만 18세 이상 55세 미만까지의 남자로 구성했고, 모든 경비는 단원의 애국적 정성으로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찰지서에서 임의로 결정해서 발급하는 고지서에 의해서 세금처럼 징수했다. 이 수금은 우익청년단체의 깡패들이 동내를
돌아다니면서 우악스런 인상으로 거의 공갈적으로 갈취했다. 뿐만 아니라 태극기나 문패도 들고 다니면서 강매를 하고 다녀 폐단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5.10선거가 끝난 다음에도 경찰과 작당을 하여 면 행정의 이권에도 간섭하고 다녀 그 폐단으로 면민이 모두
아우성이었다.
이로써 민심마저 흉흉해지자 군정의 조병옥 경찰부장은 5월 22일에야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익 간부들은 그냥 그곳에 남아서 계속 행정당국의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그날 산외국민학교에서의 훈련은, 처음은 3인 1조로해서 마을 사람들을 투표소로 데리고 가는 조 편성을 하는 일이고, 데리고 가는
사람들에게 표 찍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이 지정하는 사람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하는 일도 겸하고 있어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사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훈련의 백미는, 바로 각 마을에서 청년들을 거리 100미터마다 세워놓고 목소리로 전달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〇〇마을에 공산당 발견.”이라고 마을에서 시작하면 그 말을 그대로 “〇〇마을에 공산당 발견.”이라고 릴레이식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나 연습과 실제상황과 구별하기 위해, 연습 때는 먼저 ‘이는 연습이다.’라는 말을 꼭 붙이라고 했고, 실제상황일 때는 ‘이는
실제다.’라는 말을 붙이라고 했다. 그날부터 청년들은 매일 밤낮으로 “이는 연습이다. 〇〇 공산당 발견”이라는 소리가 온 남조선
전체에 가득 차도록 했다.
며칠 그러다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지, 시간을 두고 보초근무 점호로 한번 씩 했다.
후보자들의 정견발표 때는 유권자들을 강연장에 조별로 할당된 대로 몰고 오는 일도 했다.
4월에는, 밀양 일대 농촌은 보리매기라고 보리밭에 잡초를 매고 봄비에 씻겨버린 흙을 북돋우어 주어야 보리이삭이 튼튼해지는데 이런 농사일을 못하게 되니 농민들은 밤에도 보리밭을 매주어야 할 판이었다.
벼의 모판에도 제초작업을 해야 하는데 못하게 되니 벼농사도 말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채소농사, 목면농사, 모든 농사일을 조국의 허리를 가르는 일로 몰아가고 나니 사람들은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러한 모든 민폐를 일으키는 경찰업무의 법적 근거는 바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민중에게 들씌우는 이른바 「조선총독부령」으로
경찰업무규정에 있는 주민에 대한 명령권에다 근거를 두고 있으니 해방된 조선에서 정말 말이 안 나올 만큼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날 「향보단」 훈련을 마치고 다원 마을로 돌아온 지도원 동지와 나는 윗집으로 올라갔다. 상머슴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아재, 나 일 잘 못하는데 잘 가르쳐주소.”
아재는 내 손을 잡고,
“이름이 덕출이라 했나?”
라고 했다.
“산골에서 왔다면서, 일을 많이 했는가뵈. 손이 거친 걸 보니.”
“나무하러 다니고 해서 손이 그렇제.”
“그럼 밥묵으러 가자. 밥은 내 방에서 늘 겸상해서 묵기로 하고. 언제나 독상해서 묵으이 어디 밥맛이 있어야지.”
그러자 청도샌님이 나오셔서
“너그들끼리 맛있는 것 먹고 나는 떼놓을라꼬.”
이렇게 해서 머슴방에 셋이 들어가 적은 두레상을 펴고 상을 차렸다.
그리고서는 자연스레 동네 부위기를 설명했다.
아재가 먼저 말을 뗐다.
“이 동네는 민주부락이라 안 카나. 그래 그건 맞는기라. 이 동네는 대부분이 민주가정이고 반동은 없는 기라. 양반동네치고 이만큼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곳은 없제.”
내가 청도샌님의 눈치를 보면서 손기용 선생님에 대해서 물었다. 손기용 선생님이 동네에 계시는지는 몰라도 우연이라도 선생님이나 그들
가족을 만나면 반갑기야 하지만 내가 작은머슴 꼴을 하고 있으면 놀라기도 하겠고, 동네사람에게 알게 되면 입장이 난처해질는지도
모른다.
“아재, 이 동네에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많구만요. 미리 말해두어야 난처한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 덕출이. 미리 알아두어야 사전에 문제될 일은 막을 수 있을 테니.”
“손주헌 선생님 댁은 모두 다 알고 있고, 상동 할머니(손주헌 선생님 부인, 택호가 상동이고 성이 안가로 나와는 일가인데, 항렬이 할머니뻘이다.)까지도.”
아재는, “그래.”라고 하면서 “또.”
“또 여기에 요즘, 수산 면장했던 손흥 씨도 안 있는교?”
“그어는 요즘 동네에는 안계시지. 온 가족이 읍에 살지.”
“그래도 아재는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애. 읍에 계신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 그분의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와는 그리 멀지 않은
연척간이어서 내가 그 어른을 ‘고지할배’라고 부릅니다. 그 아랫대 우산할배, 나이는 할아버지라고 부를 지경은 아니지만, 항렬이
높아서, 그 밑에 두 딸도 잘 알고 있어서.”
“그거야, 여기에 안 살고 있으니 혹시 만나도 우연히 만나는 것으로 하면 문제는 없을 거야. 만나면 적당히 들러대면 될 거 아니야?”
“하기사 요 위에 죽남에 내 할아버지의 사촌누이, 그러니 나에게는 종존고모(從尊姑母)지, 그 죽남의 할매 집에 잠시 왔다가 다원에 좀 들렀다고 하면 될 게고.”
이렇게 해서 나와 덕실의 아재는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지도원 동지와 나는 지도원 동지의 방인 바깥채의 안방으로 갔다.
지도원 동지는 우리들의 임무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도원은 밀양군당의 연락부의 책임자였다. 조직부와 총무부의 당무를 하부 조직에게 전달하고 하부 조직에서 오는 보고와 문제제기를 신속하게 소통시켜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군당의 하부조직으로 되는 조직은 대체로 당으로는 각 면의 당부와 민전산하의 제 정당𐤟사회단체이다. 이들에게 모두 연락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이 연락부의 임무인 것이다.
이러한 연락부의 임무를 정확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선을 몇 개로 묶어서 경제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밀양군당 산하의 면 당부를 몇 곳으로 묶어서 한 면에서 담당하도록 선을 간추려놓았다는 것이다.
밀양읍당과 삼량진읍당을 밀양읍당에서, 부북면당과 무안면당 그리고 청도면당을 부북면당에서, 하남면당과 상남면당 그리고 초동면당을
하남면당에서, 산외면당과 단장면당 그리고 산내면당을 산외면당에서 묶어서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군 전체를 네 곳의 ‘트’ 또는
‘포스트’로 망라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네 곳 중에서 자기가 한 곳, 산외면당을 맡고 나에는 밀양읍당, 부북면당, 하남면당을 맡으라는 것이다. 자기는 거기에다 도당과의 연락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밀양읍당이라는 것이다. 검문이 심하고 반동의 역량이 집중되어 있어서 노출되기 쉽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밀양읍당을 부북면당으로 모으고 삼랑진면당을 하남면당에 붙이면 된다는 것인데, 그들과 토론해볼 것을 제기할 작정이라고
했다. 가능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연락부에서 할 과업 중 하나는 중요한 당 간부의 이동 시에 그 경호문제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군당의 조직부에서 제기되고 연락부에서 집행한다는 것이다.
연락부책 동지인 청도샌님은 내일부터 이들 연락선을 점검하고 ‘트’와 포스트를 인수받으라는 임무를 나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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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논문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 - 5.10단독선거(1948년)에서 제3회 국련총회(같은 해 12월)에 이르기까지』
이 논문은 「씨알의힘사」 주최로 1986년 8월 3일, 도쿄(동경)에서 개최된 「몽양 여운형선생 탄생 백주년, 순의 40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서 저자 매코매크 교수가 일본어로 강연한 것을 수록한 것이다. 텍스트는 잡지 『씨알의 힘』 제9호로부터 전재한
것이다.
저자 매코매크 교수는 1947년 「유엔조선위원단」의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의 일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