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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는 동국(東國)의 양진(揚震)을 보지 못하겠구나! 고황제는 누구인가? 1413년에 북경에 갔으면 영락제외엔 없습니다.
주원장은 1398년 사망했으므로 , 최용소는 하정사로 북경에 가기는 갔을까? 이성계는 1408년 사망. 문맥상 성조 즉 영락제입니다.
최용소
崔龍蘇제정(齊貞)
시대 | 조선 |
출생 | 미상 |
사망 | 1422년(세종 4) |
경력 | 판한성부사 |
유형 | 인물 |
직업 | 문신 |
성별 | 남 |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
본관 | 강화(江華) |
요약 조선전기 개성부유후, 공조판서,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강화(江華). 고려 공민왕 초에 의릉직(毅陵直)에 제수, 이후 감찰규정(監察糾正)·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이성등처관군만호(泥城等處管軍萬戶) 등을 역임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70년(공민왕 19) 전라도체복사(全羅道體覆使)로 파견되어 민심을 위유하고, 같은 해 7월 환경하여 신돈(辛旽)을 먼저 본 뒤에 왕을 알현하여 장형(杖刑)을 받았고, 고려 말에 공조전서를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회례사(回禮使)로 일본 구주(九州)에 파견되어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이미카와(令州了俊)에게 왜구를 토벌하여 양국의 우호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전하고, 이마카와가 차견(差遣)한 승려 종구(宗俱)와 함께 피로인 570여 명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1397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1398년 강원도도관찰사를 지냈다. 1400년(정종 2) 3군 도진무(都鎭撫)로 재직 중 방간(芳幹)의 모반에 연좌되어 하옥되었다가 방면되고, 곧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에 좌천되었으며, 곧 방간의 당여로 재차 논죄되어 삭직, 장형을 받았으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사면되었다.
1403년(태종 3)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복직되고, 그 해 좌군총제(左軍總制)에 개수(改授)되고, 그 뒤 안동부사·개성부유후 등을 역임하였다. 1413년 형조판서로 한성부윤 김겸(金謙)과 함께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그 해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 판한성부사가 되고, 이듬해 전라도의 조운책(漕運策)을 진언(陳言)하였다. 성품이 청백하면서도 절개가 굳고, 언행이 정중하였다. 일찍이 명나라에 들어가 옥하관(玉河館)의 건축을 감독하고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시호는 제정(齊貞)이다.
다음백과
1407년에 영락제는 천도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1409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북부에서 보냈다. 1417년에 베이징을 재건하는 대규모 공사가 시작된 뒤, 그는 한 번도 난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베이징의 새 궁전은 1420년에 완공되었고, 1421년 새해 첫날 베이징은 정식으로 명의 수도가 되었다.
회동관(會同館)은 명나라 초기 남경(南京)에 설치된 관원 접대 겸 역참(驛站)의 장소로 출발하여 성조 영락제 때 북경에도 설치되었다. 이후 1441년(세종 23)에 남관(南館, 3개 소)과 북관(北館, 6개 소)으로 분리되었고 대사, 부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50년 갑오 > 5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50년 갑오(1774) 5월 10일(임술)
50-05-10[02] 승지 최민에게 최용소에 대하여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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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승지 최민(崔
)에게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가 일컬은 바의 관서 부자(關西夫子)는 승지에게 몇대 선조이며, 부자(夫子)라고 일컬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최민이 말하기를,
“신에게 13대조가 되는데, 명(明)나라에 봉사(奉使)하였을 때 황제가 옥하관(玉河館) 영건(營建)의 감동(監董)을 명하였는데, 그 뒤에 사신(使臣)을 통해 그가 작고(作故)하였음을 듣고 황제께서 매우 슬퍼하면서, ‘내가 다시는 동국(東國)의 양진(揚震)을 보지 못하겠구나!’ 하고,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의 초상화 2건(件)을 그려서 1건은 편전(便殿)에 걸어 두고, 1건은 사신이 돌아가는데 보내어 그 자손에게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제정공(齊貞公)이란 시호를 하사하였으며, 어필로 친히 ‘제정공 최용소(崔龍蘇)의 상(像)’이라 썼는데, 지금까지 종손(宗孫)의 집에서 봉안(奉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원전】 44 집 474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주-D001] 고황제(高皇帝) :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D002] 관서 부자(關西夫子) :
최용소(崔龍蘇).
[주-D003] 양진(揚震) :
후한(後漢) 안제(安帝) 때의 명사(名士)로서, 그 당시에 그를 관서 공자
승정원일기 1351책 (탈초본 75책) 영조 50년 5월 10일 임술 24/25 기사 1774년 乾隆(淸/高宗) 39년
· 규장각 원본
上問承旨誰也? 對曰, 崔
矣。上曰, 高皇帝所稱關西夫子, 於承旨, 爲幾代祖乎?
對曰, 十三代祖矣。上曰, 關西夫子之稱, 有所以耶? 對曰, 臣祖奉使皇朝, 以帝命, 監董玉河館營建之役, 竣事而還, 未久作故。翌年他使臣入去也, 帝下問臣祖安否, 使臣以作故仰達, 帝聞而震悼曰, 朕不復見東方楊震, 傷歎不已。仍下敎曰, 殷宗, 夢傅說而畵惟肖之像, 朕則親見其人矣。命畵工賜絹二端, 模畵其形容, 一則掛置便殿, 一則付使臣以歸東, 使覓傳其子孫, 仍賜謚齊貞公, 以御筆親寫像面曰, 齊貞公崔龍蘇之像, 至今奉安於臣家矣。上曰, 承旨爲其直孫乎? 對曰, 支孫矣。上曰, 宗孫誰也? 對曰, 再從兄㫤矣。上曰, 其時緣何取覽其畵像乎? 對曰, 賤臣, 以新恩入侍也, 仍承宣所建, 有取覧之敎矣。上曰, 其時承旨, 誰也? 對曰, 具允明·南泰耆矣。上曰, 然乎? 大抵貴矣。良漢進伏曰, 日已向晩, 湯劑尙未進御, 故提調等, 來待閤外, 不勝焦迫, 敢請求對矣。上命書傳敎曰, 噫, 此日何日? 寶鑑旣載, 何云多少? 雖點雨必下, 今番豈特其雨? 意謂霈然, 無一點雨, 太陽杲杲, 此何由乎? 專由恣飮小人湯而然, 纔者下敎, 旣臨于此, 遊觀而然乎? 噫, 人子以親心爲己心, 君親雖曰異也, 忠孝亦豈異乎? 萬萬寒心, 內局三提調皆解兼任。出傳敎 摘奸宣傳官入侍事, 下敎。出榻敎 宣傳官李翼炫等入侍, 奏以祈雨祭三處祭物·祭官皆無頉。上還入內, 諸臣以次退出
승정원일기 1208책 (탈초본 67책) 영조 38년 7월 25일 을유 27/28 기사 1762년 乾隆(淸/高宗) 27년
· 규장각 원본
今覽沁都啓本, 卽三人, 而其中金昌九, 曾於古說, 見此等之事, 今日果聞矣。昌九父之夢說, 其涉荒誕, 不足掛意者。昌九則八歲聞此記心, 於十二年, 其父爲五十八歲時, 歲首登高麗山禱天。朱夫子豈不云乎? 禱是正理, 自合有應, 不可謂無是而固爲之也。昔之庾黔, 婁禱北辰, 而能救其父, 今之昌九, 禱名山而能延父年, 可謂古今一二, 紫陽所云, 正指此也。其他條列, 予不暇諭, 卽此一事, 無愧棹楔。特豎紅門於其閭, 遵崔龍蘇賜號海東夫子之例書曰, 海東黔婁金昌九之閭。欲見其人, 金昌九其若生存, 令軍門將官調用。前察訪具澈, 以予審愼, 難以遽然, 而噫, 三忠之寄孫, 名登抄孝, 其涉異也。於此於彼, 何惜一邊將。令該曹僉使待窠, 卽爲懸注調用。金昌九之父年, 今八十二, 尙今生存云。噫, 丁丑推恩, 其必陞資, 亦令銓曹問其資, 西樞實職, 懸注調用, 以慰孝子之心。上曰, 崔
之先祖龍蘇, 昔高皇帝賜號海東夫子, 諸臣宜議金昌九之號, 汲以海東黔婁爲奏。上笑曰, 提學有用矣。益輔曰, 此古所無者, 其櫥風聲勵世道, 大矣。命留守入侍, 使之書給昌九之號。上曰, 曾前兩都留守上京, 則必參次對, 而近來雖値備局入侍之時, 無端不爲入參。自政院, 申飭備局, 可也。出擧條 上曰, 吏曹參議, 只推牌招, 入侍日次。出傳敎 上曰, 備局日次, 兩司不可不備員, 違牌臺臣只推, 與監試復命臺臣, 一體牌招入侍。出傳敎 命講官先退。
>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3년 계사 > 10월 17일 > 최종정보
태종 13년 계사(1413) 10월 17일(계해)
13-10-17[01] 신정을 하례하고자 형조 판서 최용소ㆍ한성부 윤 김겸을 명나라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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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판서 최용소(崔龍蘇)ㆍ한성부 윤 김겸(金謙)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게 하였다.
【원전】 1 집 691 면
【분류】 외교-명(明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3년 계사 > 10월 22일 > 최종정보
태종 13년 계사(1413) 10월 22일(무진)
13-10-22[01] 조영무와 유양을 부원군으로 봉하다. 남재를 우정승으로 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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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무(趙英茂)를 파하여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으로 삼고, 유양(柳亮)을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삼고, 남재(南在)를 우정승(右政丞)으로 삼고, 이천우(李天祐)를 의정부 찬성사로 삼고, 이숙번(李叔蕃)ㆍ박은(朴訔)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삼고, 유정현(柳廷顯)을 병조 판서로, 한상경(韓尙敬)을 이조 판서로, 조연(趙涓)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박자청(朴子靑)을 우군 도총제(右軍都總制)로, 성발도(成發道)를 형조 판서로, 최용소(崔龍蘇)를 공조 판서로, 심온(沈溫)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원(李原)을 영길도 도순문 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로, 최이(崔迤)를 평안도 도순문 찰리사로, 윤곤(尹坤)을 경주 안동도 병마 도절제사(慶州安東道兵馬都節制使)로, 이종무(李從茂)를 영길도 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施)로, 김승주(金承霔)를 평안도 도안무사로 삼고, 제주 도안무사 윤임(尹臨)의 자급(資級)을 올렸다.
>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3년 계사 > 12월 6일 > 최종정보
태종 13년 계사(1413) 12월 6일(신해)
13-12-06[01] 김한로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한성부의 겸관이 이때부터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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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로(金漢老)를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로, 김남수(金南秀)를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 한규(韓珪)를 지의정부사 겸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권홍(權弘)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여칭(呂稱)ㆍ최용소(崔龍蘇)를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로, 윤향(尹向)을 공조 판서로, 김학지(金學知)를 전농 판관(典農判官) 겸 한성 판관(漢城判官)으로, 정극종(鄭克從)ㆍ원황(元滉)을 봉례랑(奉禮郞) 겸 한성 참군(漢城參軍)으로 삼았다. 한성부의 겸관(兼官)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원전】 1 집 699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行政)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4년 갑오 > 5월 21일 > 최종정보
태종 14년 갑오(1414) 5월 21일(계사)
14-05-21[01] 대신을 백악ㆍ목멱ㆍ한강ㆍ양진 등에 나누어 보내어 비를 빌다
[DCI]ITKC_JT_C0_A14_05A_21A_00010_2005_006_XML DCI복사 URL복사
대신(大臣)을 나누어 보내어 비를 빌었다.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은 백악(白岳)에,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은 목멱(木覓)에, 흥녕군(興寧君) 안경공(安景恭)은 한강(漢江)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용소(崔龍蘇)는 양진(楊津)에 갔다.
【원전】 2 집 18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5년 을미 > 6월 25일 > 최종정보
태종 15년 을미(1415) 6월 25일(경인)
15-06-25[02] 육조에서 각사가 진언한 내용중 시행할 만한 사안 33건을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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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찬 유관(柳觀)이 진언한 것입니다. ‘경기(京畿)에 있는 각품(各品)의 과전(科田)은, 빌건대 소재지 관사(官司)로 하여금 답험(踏驗)하게 한 뒤에 조세(租稅)를 거두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한 내용에 의하여 소재지 관사(官司)에 손실 답험(損實踏驗)의 첩자(帖字)를 만들어 주어, 전객(佃客)이 경작한 전지(田地)의 손(損)이 10분의 8에 이른 것은 조세의 수납을 면제하여, 민생(民生)을 후하게 하고, 공전(公田)도 또한 이 예(例)에 의하소서.’ 하였습니다.
1.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용소(崔龍蘇)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그 진언의 내용에 이르기를, ‘전라도의 조운(漕運)은 빌건대, 사선(私船)으로 값을 주어 상납(上納)하고, 병선(兵船)으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에 의하여 시행하고, 나머지 미멸(米𥸴)은 조운선(漕運船)을 이용하여 상납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4년 임인 > 11월 27일 > 최종정보
세종 4년 임인(1422) 11월 27일(경진)
04-11-27[03] 전 판한성부사 최용소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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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판한성부사(前判漢城府事) 최용소(崔龍蘇)가 졸(卒)하였다. 용소는 강화(江華) 사람이니, 처음에 의릉(毅陵)의 능지기[陵直]에 임명되었다가, 여러 번 벼슬을 옮겨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이르러 계림 판관(鷄林判官)을 제수(除授)하였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근신하고 강개(慷慨)하여 치정(治政)이 여러 고을에서 우수하였다. 누니성(累泥城) 등 관군 만호(管軍萬戶)를 지나 공조 전서(工曹典書)로 전직(轉職)되었다가, 조선 태조(太祖) 2년에 명을 받아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에게 보빙사(報聘使)로 가서, 사로잡혀 간 남녀 5백여 인구(人口)를 찾아서 돌아왔다. 7년에 강원도 도관찰사(都觀察使)에 임명되고 승녕부 윤(承寧府尹)과 개성부 부유후(開城府副留後)를 역임하였다. 태종 13년에 품계(品階)가 자헌(資憲)으로 올라가 형조 판서에 임명되고 공조 판서로 옮겼다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천직(遷職)되었고, 이에 이르러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제정(齊貞)이라고 시호(諡號)를 내리니, 마음가짐의 엄정(嚴正)함이 제(齊)요, 청백(淸白)하고 절개를 지킴이 정(貞)이다. 아들은 최세렴(崔世廉)과 최세창(崔世昌) 둘이 있다.
【원전】 2 집 513 면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외교-왜(倭)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5년 계묘 > 1월 22일 > 최종정보
세종 5년 계묘(1423) 1월 22일(갑진)
05-01-22[04] 판한성부사 최용소에게 제를 내리다
[DCI]ITKC_JT_D0_A05_01A_22A_00040_2005_003_XML DCI복사 URL복사
돌아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용소(崔龍蘇)에게 제(祭)를 내렸는데, 그 제문(祭文)에 왕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께 몸을 바치매, 절개가 험난(險難)하고 평탄(平坦)함을 따라서 변하지 않고, 임금은 공로를 생각하매, 은혜가 처음부터 끝까지 돈독하였도다. 이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며 국가의 일정한 규범(規範)인 것이다. 경은 기우(器宇)가 침착 웅위(雄偉)하고, 성질이 곧고 신의(信義)가 있었다. 겸손하면서도 지조가 있고, 청렴하고 고요하면서도 겉치레가 없었다.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그 충근(忠勤)을 다하고, 입론(立論)할 때면 거의 다 정직한 것이 많았다. 영표(嶺表)에 나가 다스리매 능히 백성을 사랑하는 인(仁)을 베풀었고, 관동(關東)에 머무를 적엔 상시 깨끗한 뜻을 가졌다. 형조(刑曹)에서 옥사(獄事)를 평의(評議)하매 원통한 일이 없도록 하였고, 경조(京兆)에서 간사한 무리를 조사하매 숨긴 죄를 적발하는데 힘썼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는 자못 아름다운 칭찬이 있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또한 능히 자기의 직분을 다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관직을 역임(歷任)하여 남다른 명성(名聲)이 있었으니, 노성(老成)의 신하라고 이를 만하였고, 보필(輔弼)의 힘을 다했는데, 어찌 하늘이 갑자기 그를 빼앗아가 아껴 두지 아니하고 나로 하여금 추도(追悼)하게 하여 회포를 일게 하는고. 이에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박한 제수(祭需)를 진설하게 한다. 아아, 정영(精英)은 이미 가버렸으나, 대개 그 충의(忠義)를 잊기가 어렵고 휼전(恤典)의 예(禮)를 갖추매 어찌 유명(幽明)에 따라 간격이 있으랴.”
고 하였다.
【원전】 2 집 522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어문학-문학(文學) / 인물(人物)
[주-D001] 영표(嶺表) :
영남(嶺南).
[주-D002]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명의 멸망시기 : 1662년,
명의 존속기간 : 존재집과 승정원일기 영조편 270년
명=조선 : 1392년 + 270년 = 1662년
《강감금단(綱鑑金丹)》이라는 책을 보니, 명 태조(明太祖)가 처음 태어난 날부터 이미 정통의 호칭을 붙였습니다. 실질보다 형식이 성하게 된 폐단이 줄곧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조선건국 1392년(홍무25년) 이방원 생년 1367년+25년 = 1392년
선조 27년
고황제(高皇帝)께서 연경(燕京)을 서울로 정하고 요좌(遼左)와 조선을 왼쪽 날개로 삼았으니
임하필기 제30권
조선의 청주(淸州) 한확(韓確)의 누이는 명나라 태조의 비가 되었고
해동역사
오직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의 두 딸이 모두 명나라 조정의 선발에 한 딸은 영락(永樂) 15년(1417, 태종17) 정유에 역관(譯官) 원민생(元閔生)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선발하는 데 뽑혀 태종(太宗)의 여비(麗妃) -비(妃)의 호칭을 여비라고 한 것은 그 뜻이 확실하지가 않으나, 혹 고려 사람이므로 여비라고 칭한 것인 듯하다.- 가 되었으며,
고려와 명이 별도로 존재?
이방원=고황제 ?
명나라에 대해서는 아직 감이 없지만, 고려는 한반도에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7, 18세기에 나오는 지도에 한반도를 Coree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고려가 망할 때 서양은 세계를 탐험할 만한 역량이 없었고, 17세기 이후부터 겨우 탐험을 시작했는데, 그 시기에 나라가 없어진지 200년이 넘어서 그런 국명이 존재한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제가 본 한 지도에서는 고려는 19세기 1875년까지까지 존재했고, 1876 ~ 1895년까지는 한조선으로 개명했다고 나온 지도를 봤습니다.
그때부터 역사 조작을 의도해서 그렇게 국명을 바꾸도록 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고려가 19세기까지 존재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아직도 고려인을 부르는 여러 명칭들(까레이스키 같은)이 존재하는데, 어찌 사라진 지 수백년이 된 나라의 이름으로 고려인을 칭할 수 있겠습니까 ? 고려는 망한 것이라기 보다는 천자국의 지위를 조선에 넘기고 한반도로 이주해서 제후국으로 존재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