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의 반야심경 강의의 일부를 여기 옮겨봅니다.
般若(반야) 그럼 ‘반야’란 무엇인가?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Prajñā’, 빨리어 ‘Paññā’를 중국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지혜’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지혜로써 해탈한다”고 하며, 지혜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도대체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란 어떤 것인가>이다. 큰 스님들과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는 분들께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어봤다. 그리고 “님은 평생 수행한 결과, 실제로 지혜가 얼마나 밝아졌으며, 수행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어봤다.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한국불교에는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지혜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으로서, ‘불교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얻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한다. 그런데 종래 한국의 전통불교에는 지혜의 개념이 모호할뿐더러 지혜가 밝아진 사람이 없는 것 같다. 한국불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저항감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30분 뒤 다음 글을 읽고 난 뒤에는 이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
///// 우리는 국사시간에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관겸수(止觀兼修)’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다. 이 둘은 같은 뜻으로, 붓다의 선(禪)수행 방법을 일컫는 말이다. 붓다는 아함경에서 “////”라고 했고, 법구경에서 “선정이 없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고, 지혜가 없는 자에겐 선정이 없다. 도는 선정과 지혜라고 하는 두 길을 따라가 열반에 이르게 한다(無禪不智 無智不禪 道從禪智 得至泥洹)”고 말했다. 이와 같이 원래 불교의 선(禪)수행 방법은 선정[定]과 지혜[慧], 즉 멈춤[止]과 관찰[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방법이다.
멈춤[止]이란 한 대상에 마음을 고정[定]시킴으로써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사마타 선(禪)법이고, 관찰[觀]이란 지혜[慧]를 계발하는 위빠사나 선(禪)법으로서, 자신의 몸과 마음, 즉 색, 수, 상, 행, 식을 관찰해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존 불교에서는 석가 고유의 선법인 위빠사나법을 없애려고 하는 일부 대승불교 및 중국 선불교의 영향으로 관찰수행법인 위빠사나법이 빠진 반쪽짜리 선(禪)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혜쌍수’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개념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완역인 <한글 대장경>을 번역해낸 동국역경원의 초대 원장이자 한국 최고의 강백으로, 최초의 우리말 불교사전을 펴낸 운허스님(1892~1980)은 그의 사전에서 定慧(정혜)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놓고 있다.
“定(정)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고, 慧(혜)는 현상(現象)인 事(사)와 본체(本體)인 理(리)를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위에서 定(정)에 대한 설명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만 慧(혜)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하고도 모호한 말로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강백 중 대강백인 운허스님이 무식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해놓은 것이 아니다. 慧(혜)가 이런 식으로 어렵게 설명되어 있는 까닭은 중국 선불교에서는 定(정)의 개념만 있을 뿐, 慧(혜)는 그 개념 자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중국 선불교의 실질적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는 육조혜능대사(AD638~713)는 <육조단경>의 정혜품(定慧品)에서 定(정)과 慧(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선지식들이여, 나의 이 법문은 선정[定]과 지혜[慧]로써 근본으로 삼나니, 대중들은 어리석게도 ‘선정과 지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선정과 지혜는 하나[一體]요, 둘이 아니다. 선정은 지혜의 본체요, 지혜는 선정의 작용이라, 지혜로울 때는 선정이 지혜에 있고, 선정에 들었을 때는 지혜가 선정에 있느니라. 만약 이러한 뜻을 알면 그것이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니라. 도를 배우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선정을 닦은 뒤에 지혜를 계발한다’는 말과 ‘먼저 지혜를 얻은 뒤에 선정을 계발한다’는 이 두 말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잘못된 소견을 내는 자는 법에 두 가지 모습[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 입으로는 옳은 말을 하지만 마음 가운데는 옳지 못하기 때문에 공연(空然)히 선정과 지혜의 개념을 따로 가져, 그 둘이 같지 않는 것이니라. 만약 마음과 입이 함께 옳아, 안팎[內外]이 하나면 선정과 지혜는 같은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 수행하는 것은 논쟁하는 데에 있지 않으니, 만약 [선정과 지혜의] 선후를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이기고자 하는 승부심을 끊지 못하고, ‘나’라는 존재만 키워나가, [끝내]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하리라.”
육조혜능은 이 법문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선정[定]과 지혜[慧]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중국의 선(禪)불교는 지혜는 닦지 않고 선정만 닦는다. 오온에 대한 관찰수행은 없고, 오직 ‘화두’라고 하는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켜 사마타수행만 하고 있는 것이다. 운허스님은 중국불교에는 이와 같이 慧(혜)의 개념이 아예 없는데 그것을 억지로 설명하려고 하니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불교에는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사마타의 멈춤수행만 있을 뿐 지혜를 계발하는 위빠사나의 관찰수행이 없는 까닭에 지혜는 말로만 있을 뿐,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사마타수행은 염불, 다라니, 화두 등의 방법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대승불교는 주로 이 사마타법에 의해 닦는다.
선불교가 시작되기 100년 전의 인물인 중국 천태지의(天台智顗)대사(AD538~597)는 그의 책「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의 서문에서 “멈춤과 관찰, 이 두 법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양 날개와 같다. 만약 이 둘 중 어느 하나만 치우쳐 닦으면 잘못된 길에 떨어지게 됨을 알아야 한다(
鳥之兩翼止觀此二法 如車之雙輪 若偏修習 卽墮邪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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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해서 열심히 관찰해가면 저절로 사선정도 닦이고, 지혜도 밝아진다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열심히 오랫동안 노력했는데도 집중이 잘 안되고, 관찰이 안되면 집중을 제대로 하기위해 선정, 즉 사마타부터 먼저 닦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사마타 수행이 선행되지 않은 위빠사나는 불가능하다는 견해는 옳지 않은 견해라고 봅니다. 저의 책, <대승기신론 속의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부 고맙습니다.
언제 얼굴 한번 봅시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반야심경에 대해 다시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