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은 이미 12-14절에서 언급되었다. 바울이 큰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확실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다. '미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충분히 믿을 만하다', '전적으로 확실하다'는 의미로 확실하게 권유하는 완곡어법이다.
이런 표현은 목회 서신에만 5번 나오는데 3:1 ; 4:9 ; 딤후 2:11 ; 딛 3:8 본절과 4:9에서는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라는 부가 어구가 첨가되었다. 혹자는 이 말에 대해 당시에 요한이 자주 사용하던 표현으로 추측하나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표현은 목회 서신에만 나오는 바울의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여러 사도들도 증거하였던 이 말씀은 기독교 진리의 가장 중요한 사실, 곧 복음의 본질을 잘 요약하고 있다. '세상에 임하셨다'는 단순히 성육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어난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Lenski).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바울이 괴수라고 고백한 본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내가 괴수 죄인들의 무리에 속해 있다. (2) 내가 역사적으로 첫 번째 괴수이다. (3) 내가 가장 나쁜 죄인이다. 여기서는 (3)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혹자는 본절에서 바울이 '건전하지 못한 비실제적인 겸손'을 취하고 있다고 말하며 , 또한 '형식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참으로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바울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회심한 지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자신의 과거를 깊이 회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울의 이러한 죄의식과 참회의 고백은 그의 복음 사역을 승리로 이끄는 근본적인 동인이 되었다.
[잠 13:21]"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 '따르고'는 원어상 '추적하다'란 뜻을 가지는 바, 단순하게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쫓아서 필시 뒤따라잡게 되는 것을가리킨다. 곧 본 구절은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심판적 보응이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약 5: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너희가 알 것은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케토'는 '알라'는 의미를 가진 '기노스코'의 능동태 명령형으로 본절이 앞절의 조건절에 대한 귀결절로 강한 명령임을 나타낸다.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 '그 영혼'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미혹된 자를 돌아서게 하는 권고자의 영혼으로 해석한다.
(2) 혹자는 미혹된 자의 영혼으로 해석한다. (3) 혹자는 잠 24:24,25을 근거로 하여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내포한다고 해석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두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는 것은 타인을 미혹된 것에서 돌아오게 하는 인간적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혹되어서 하나님을 떠난 자는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는 자였으나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영적 죽음에서 구원을 얻어 영적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마 5: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약 4: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슬퍼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레오'는 '불행해지다' 혹은 '비참해지다'는 의미를 가진 '탈라이포레오'에서 유래한 단어로 스스로 고행을 통해서 비참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했던 자신의 죄악의 비참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되는 근심을 하라는 의미이다 .
'애통하며'와 '울지어다'는 모두 억누를 수 없이 격앙된 뉘우치는 심정의 모습을 묘사한다. 야고보는 위의 세 단어를 사용하여 수신자들이 거짓됨이 없이 진실되게 회개할 것을 권면한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 '웃음'과 '즐거움'은 수신자들이 죄 아래 있는 삶을 살 때 느낀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쾌락'을 삶의 본질로 좇고 있었음을 비유적으로 시사하는 표현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죄에 빠져 즐겼던 삶에서의 '웃음'과 '즐거움'을 예수께서 복된 삶의 기본 요소로 가르치셨던 '예통'과 '근심'으로 바꿀 것을 권면한다.
여기서 '근심'의 헬라어 '카테페이안'은 문자적으로 '낙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죄인을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자세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어리석게도 쾌락으로 일관하던 죄 아래서의 삶을 과감히 청산하고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할 것을 권면한다.
[계 21: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은 '처음 것'과 같은 의미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 이전에 죄와 사망으로 인해 부패되고 변질되었던 옛 질서의 산물이다.
이 산물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소원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임재하셔서 처음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하나님과 백성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