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재는 정약현(丁若鉉), 정약전(丁若銓, 자 天全, 1758~1816), 정약종(丁若鍾,1760~1801, 아우구스티노),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정약횡(丁若鐄) 등 5형제와 그들의 누이 3명의 고향으로 한국 천주교회 요람지의 하나다.

이곳에 있던 나주 정씨 집안의 후손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집안에 보관되어 있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읽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정약전은 1779년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의 주도로 열린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여, 이벽(李檗,1754~1785,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례는 받지 않고 미루다가 끝내 세례를 받지 못했다.


정씨 형제 중에 특히 초기 교회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이는 정약종 일가다. 정약종은 교리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주문모 신부에 의해 명도회(明道會) 회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정약종은 그의 중형 약전이나 동생 약용보다 늦게 천주교를 수용하여 1786년경 세례를 받았으나 그의 형제들과는 달리 끝내 배교하지 않고 한결같은 믿음으로 교회 활동에 헌신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하신 분이다.
1785년 봄, 명례방 집회가 형조에 발각되어 유림에 척사통문(斥邪通文, 천주교를 배척하는 회람 형식의 글)이 돌자, 사대부가의 천주교 배척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정씨 가문에서도 명례방 집회에 참석했던 정약전과 정약용 등이 부친으로부터 엄한 추궁을 받았다. 그러다가 1791년 신해박해를 계기로 조정에서 정식으로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정씨 집안의 신자들은 문중으로부터 이전보다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1786년 세례 입교한 정약종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의 식솔을 이끌고 현재의 한강 팔당댐을 건너 광주 분원으로 이주하였다. 정약종의 가정은 1800년 양근 지방의 박해로 분원에서 서울로 피난하였으며, 이때 정약종의 처인 유 체칠리아와 자녀인 정하상, 정정혜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과 그의 전처 아들인 정철상이 순교하였으며, 1814년에 상경한 정하상은 1816년부터 조선 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마재에 있던 그의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는 정하상이 서울로 간 후 충청도에서 6~7년간 거주하다가 박해를 피해 서울로 와서 치명할 때까지 10여 년간 살았다고 한다.
의정부교구에서는 이 지역을 사적지로 개발함으로써 마재 지역에서 배출된 성인과 신앙 선조들을 현양할 계획으로 현재의 생가터 입구 약 500m 직전 우측에 경당을 신축하였다.

■ 순교자
◆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정하상은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하였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하였으나 성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의 집에 기거하다가 1813년 홀로 상경하여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도우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 베드로(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조이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이며, 그 뒤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1761∼1839)
유 체칠리아는 명도회장 정약종의 부인이며 성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이다. 상처한 정약종과 20세에 혼인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혼인 3년 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이 순교한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의 집에서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조카의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와 함께 체포되었다.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고령임에도 포청에서 곤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103위 성인 가운데 최고령 순교자이다.
◆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
동정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의 딸로, 네 살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이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은 순교하였으나 정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오빠 정하상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뒤 마재의 삼촌 정약용의 집에서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7월 11일 기해박해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대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 43세였다.
○ 성 정하상 바오로,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정하상 바오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내 각 계층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신앙생활 안에서 인내심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 꾸준해지기를 빌어 주소서.
○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 <하느님의 종 124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약종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으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 순교자 정철상 가롤로 ( ? ∼1801년) <하느님의 종 124위>
정철상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과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이복 동생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가 20세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4월 8일 부친이 순교하던 날, 그는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관리들은 문초로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가 최필제(베드로),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